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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재난’ 문학
21세기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재난’ 문학
  • 최승우
  • 승인 2024.03.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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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㉚ 신형철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정치와 경제·사회와 문화·과학기술·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1월 27일 신형철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가 「21세기 문학의 흐름과 방향」을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31강은 이찬웅 이화여대 인문과학원 교수의 「21세기 예술의 사조와 경향」이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재난 문학은 재난에 대한 이중적 대응이다. ‘사회적 연대’에 동참하거나 그것을 창조하고, ‘사회적 갈등’에 개입해서 그 근거를 해체한다. 우리는 첫 번째 유형을 ‘치유 서사’로, 두 번째 유형을 ‘대항 서사’로 명명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언어화하여 그 고통에 형상을 부여하고 그것이 공적 영역 속에 존재하도록 만들어서 사회적 연대의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치유 서사의 역할이다.

간토대지진(1923) 당시 한 기쿠치 간(菊池寛)은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들 문예가에게 있어서 제일의 타격은 문예라고 하는 것이 생사존망의 갈림길에서는 골동 서화 따위와 마찬가지로 무용의 사치품임을 똑똑히 알았다는 점이다.” 재난은 반복되고 탄식도 그렇다. 동일본 대지진(2011) 당시 다카하시 가쓰히코(高橋克彦)의 고백은 한 세기 전 선배 작가의 목소리를 닮았다. “예술이니 뭐니 말할 상황이 아니다. 그것보다 우유와 가솔린의 확보가 소중하다. 이러한 사실에, 문예에 관계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절망과 슬픔을 느낀다. 내가 해 왔던 일은 결국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이처럼 현실의 그라운드 제로는 그대로 문학의 그라운드 제로가 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문학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아니었던) 것이 되고 만다. 지금껏 사회적으로 받아온 대접이 근거 있는 것이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문학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라운드 제로’가 ‘출발점’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문학의 그라운드 제로는 문학이 “골동 서화”가 아니라 “우유와 가솔린”일 수도 있음을 새삼스럽게 입증하는 반론의 거점이 될 수 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문학의 쓸모가 확인된다면, 문학은 언제 어디서든 작은 쓸모가 있다고 믿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난 문학’을 쓴다. 이런 때 글이나 쓰는 게 옳은가 하는 자괴감과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쓰는 행위의 가치는 오로지 써서 입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무라 사에코는 재난 문학을 단지 재난 후에 쓰인 것이어선 안 되고 “글쓰기의 어려움 속에서 쓰인 작품”이어야 한다고 규정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만이 아니라 ‘무엇을’에 대한 답도 마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재난 문학’이라는 개념을 넓게 사용하면 가상의 재난을 배경으로 삼는 장르문학의 한 종류까지 포괄해야 하겠지만, 우리는 좁은 의미, 즉 실제로 발생한 역사적 재난에 대한 대응으로 제출된 작품에 논의를 한정할 것이다. 해당 재난을 직접적으로든(고유명사를 포함함으로써) 간접적으로든(세부 정보를 일치시켜 유추할 수 있게 함으로써) 지시하고 있는 작품들이 거기에 해당한다. 

신형철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는 “재난이란 무엇인가. ‘재난과 안전 관리 기본법’은 재난을 ‘자연재난’과 ‘사회 재난’으로 나눈다. 여기서 사회재난이란 인위적으로(인간에 의해) 일어났다는 속성을 가리키는데, 현대 재난 사회학에서는 이 사회 재난을 ‘기술적 재난’과 ‘갈등적 재난’으로 분리하기도 한다”라며 “재난 문학은 이와 같은 재난의 사실적 국면들을 반영하면서 쓰인다. 특히 중요한 재현 대상은 재난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속의 인간상이 될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 행동의 패턴은 현대 재난 사회학의 주요 연구 분야 중 하나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그러므로 이런 층위의 재난 문학 연구는 문학 바깥에서 재난이 규정되고 연구되는 맥락을 존중하면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재난이란 무엇인가. ‘재난과 안전 관리 기본법’은 재난을 “국민(의 생명·신체·재산)과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넓게 규정하고 이를 ‘자연 재난’과 ‘사회 재난’으로 나눈다. 여기서 사회재난이란 인위적으로(인간에 의해) 일어났다는 속성을 가리키는데, 현대 재난 사회학에서는 이 사회 재난을 ‘기술적 재난’과 ‘갈등적 재난’으로 분리하기도 한다. 

재난 문학은 이와 같은 재난의 사실적 국면들을 반영하면서 쓰인다. 특히 중요한 재현 대상은 재난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속의 인간상이 될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 행동의 패턴은 현대 재난 사회학의 주요 연구 분야 중 하나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그 학문이 정립되기 이전에 쓰인 소설 「칠레의 지진」(1807)에서 재난 사회학의 핵심 논점을 선취해 보여줬다. 리베카 솔닛은 9·11과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의 ‘집결’ 현상에 대한 정밀한 보고서에서 확신에 가까운 희망을 담아 이렇게 묻는다. “그러나 만약 최악의 순간에 낙원이 이따금 우리 사이에서 섬광처럼 번쩍인다면 어떻게 될까?” 이름하여 ‘재난 유토피아’다.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으레 공황에 빠진다는 관습적 이미지를 깨기 위해 이런 측면은 분명 강조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갈등’의 양상도 엄연히 존재한다. 재난으로 인해 공동체가 붕괴하면서 나타나는 반사회적 행동들이 있고, 9·11이 예시하듯 증오 범죄도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다. 말하자면 재난 문학은 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양면 대응이다. ‘연대’에 동참하거나 그것을 창조해야 하며, ‘갈등’에 개입해서 그 근거를 해체해야 한다.

둘 중 첫 번째 층위를 ‘치유 서사’라고 부를 수 있다. 재난으로 공동체가 맞닥뜨리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모든 종류의 피해를 가능한 한 빨리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신적 피해의 회복이 문학의 몫으로 주어진다. 

2024년 현재 시점에서 재난 문학을 논의 대상으로 제기하고자 하는 것은 21세기의 첫 사반세기가 일면 재난의 시대였다고 볼 만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2001년의 ‘9·11 테러’를 시작으로,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대한민국은 2014년에 ‘세월호 참사’를 경험해야 했으며, 2019년 말부터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인류는 팬데믹 사태를 함께 겪어야 했다. 공식 용어를 따르자면 이들은 각각 ‘공격(테러)’, ‘진재(지진)’, ‘사고’, ‘감염병’이다. 이들 재난을 통해 현대적 재난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하고, 이들이 산출한 재난 인식과 지배 서사의 양상을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재난 자체의 차이는 재난 문학의 차이로도 이어진다.

9·11 문학 중에서 가장 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역시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통을 재현해서 형상을 부여하고 피해 회복을 위한 공감을 유도함으로써 치유 서사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 본질적으로는 치유 서사이되, (정당한) ‘전쟁으로서의 드레스덴’과 (부당한) ‘테러로서의 뉴욕’이라는 허구적 구별을 문제 삼으면서 9·11의 지배 서사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대항 서사로서의 면모도 가진다고 할 수 있다면,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적과 동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배 서사에 더 본격적으로 대항한 작품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3·11’은 사망자와 행방 불명자의 숫자 총합이 거의 2만에 이르는 대재난이다. 3·11이라는 명칭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아우른다. 일단 지진은, 물론 역사상 최대의 피해를 주긴 했지만, 지진이다. 전례가 없는 종류의 사건은 아니라는 뜻이다. 1995년 1월 17일에 발발한 ‘한신·아와지 대지진’은 전후 최대의 규모였고, 이때 일본 사회가 겪은 충격과 회복의 경험이 이미 있는 터였다. 일본 사회는 늘 그래왔듯이 재난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치유 서사에 대해 말하자면, 신카이 마코토(新津誠)의 ‘재난 3부작’을 국민적 치유 서사라불러도 좋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2016)의 기념비적인 흥행을 시작으로, 「날씨의 아이」(2019)와 「스즈메의 문단속」(2022) 모두 성공을 거뒀다.

치유서사로서의 재난 3부작은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정점에 도달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 3부작은 결국 치유 서사인 것으로 자족한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재난의 원인을 신화적으로 사유하고 그 대안을 마음의 윤리학에서 찾는 작품에서 대항 서사로 기능할 요소를 찾기는 어렵다. 3·11을 이야기할 때 지진(쓰나미)만을 언급하는가, 아니면 ‘후쿠시마’도 포함하거나 더 강조하는가 하는 물음이 중요하다고 할 때, 3부작 어디에도 직간접적으로 원전 문제가 거론되는 장면을 찾기 어렵다는 점도 징후적이다. 

그에 반해 다와다 요코의 『헌등사』는 바로 다음 물음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이 이렇게 되고 만 것은 지진이나 쓰나미 탓이 아니야. 자연재해뿐이라면 훨씬 오래전에 극복했을 테니까 말이야. 자연재해가 아니야. 알겠어?” 이 소설이 3·11과 관련된 재난 문학(진재후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호명되는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헌등사』가 ‘후쿠시마를 쓴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재난 문학론 정립을 위한 또 하나의 시론(試論)이다. 재난 문학은 재난에 대한 이중적 대응이다. ‘사회적 연대’에 동참하거나 그것을 창조하고, ‘사회적 갈등’에 개입해서 그 근거를 해체한다. 우리는 첫 번째 유형을 ‘치유 서사’로, 두 번째 유형을 ‘대항 서사’로 명명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언어화하여 그 고통에 형상을 부여하고 그것이 공적 영역 속에 존재하도록 만들어서 사회적 연대의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치유 서사의 역할이다. 

재난을 바라보는 특정한 인식·서사가 지배 서사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촉발할 때 재난을 달리 사고하는 방식(대안적 재난 인식)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서사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대항 서사의 역할이다. 

생각해 보면 9·11의 대항서사가 ‘적과 동지’의 구별을 해체하려 한 것은 주디스 버틀러가 ‘인간 공통의 취약성에 대한 이해’라고 부른 것에 도달함으로써 상처의 연대를 이룩하기 위해서이고, 3·11의 대항 서사가 ‘신화와 부흥’의 재난 인식을 거부하고 디스토피아적 비관주의의 편에 선 것은 희망의 큰 목소리 속에서 외면된, 재난 지역과 미래 세대의 상처에 응답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문제가 21세기의 문화·문명의 핵심이라면 21세기의 문학은 본질적으로 재난 문학이고, 바로 그것인 한에서, 문학은 더 오래 존재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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