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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미디어의 시대, 아비투스란 무엇인가
1인 미디어의 시대, 아비투스란 무엇인가
  • 최승우
  • 승인 2024.02.1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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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열린연단 ‘오늘의 세계’ ㉘ 양혜림 청강문화대 교수(만화콘텐츠)

네이버 ‘열린연단’이 시즌10을 맞이해 「오늘의 세계」를 주제로 총 54회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의 세계’는 국제질서·정치와 경제·사회와 문화·과학기술·철학에 대해 인문·사회·자연과학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학문적 담론을 형성할 예정이다. 지난달 13일 양혜림 청강문화대 교수(만화콘텐츠)가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를 강연했다. 주요 내용을 요약·발췌해 소개한다. 제29강은 이수영 서강대 교수(커뮤니케이션학부)의 「디지털 매체의 진화」가 예정돼 있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소비 자본주의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상속 자본에 대해 생각할 때 물질적인 면, 즉 경제 자본만 떠올리는 경향이 있지만 부르디외는 다른 세 자본이 사회적 계급에 미치는 영향을 중요하게 다룬다. 마르크스와 달리 부르디외에게 있어 자본은 ‘사회적 경쟁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말하며 자연히 비단 경제력에 한정되지 않는다

참과 거짓·삶과 죽음·남자와 여자처럼 명사의 병렬에는 비교와 대조의 뉘앙스가 있다. 따라서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라는 제목을 보면 얼핏 두 복합명사가 서로의 대립항인 것처럼 느껴지나, 각각 ‘문화’를 잠시 가려두고 보면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면이 있다. ‘대중’은 ‘고급’의 반대말인가? 반대말이 되려면 한 쌍의 말 사이에 서로 다른 의미 요소가 있어야 하며, 동시에 서로 공통되는 의미 요소 또한 있어야 한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인간이라는 공통 의미 요소가 있다. 대중과 고급에는 어떤 공통되는 맥락이 있는가?

대중 문화의 대중(大衆, mass)은 사람에 관한 개념이므로 대중을 위한 문화, 대중이 즐기는 문화라는 의미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고급 문화라는 복합어에는 주체에 대한 힌트가 포함돼 있지 않으며, 단지 해당 문화 자체가 본질적으로 상위의 것이라는 주장만이 담겨 있다. 상하 개념은 상대성을 전제로 하기에 고급 문화라는 말은 저급 문화의 존재를 내포한다. 

즉 고급 문화의 반대말은 저급 문화, 향유 주체를 기준으로 한 개념인 대중 문화의 반대말은 엘리트 문화로 가정할 수 있다. 만약 대중 문화와 고급 문화가 대립항이 되려면 대중 문화와 저급 문화, 고급 문화와 엘리트 문화가 동일한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 개념들은 일상에서 혼용되는 경향이 있는데, 대중 문화를 매개하는 매스 미디어에 대한 막연한 경멸이나 소수 부유층이 즐긴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여가 방식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현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양혜림 청강문화대 교수(만화콘텐츠)는 “취향이 고급 문화에 접근하는 길이라는 말은 얼핏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는 이상론처럼 들리나 실은 정반대다. 취향은 사다리로 작용하기보다는 진입 장벽으로 기능할 때가 더 많다”라며 “갠스는 취향의 분화가 이뤄지는 근거로 수용자들의 사회·경제적 수준, 다시 말해 사회계층(class)을 들고 있는데, 특히 계층 구분에 사용되는 세 가지 수준인 수입·직업, 그리고 교육 중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부분을 강조한다”라고 설명했다. 사진=네이버문화재단

1960년대 전후 레이먼드 윌리엄스 등의 영국 문화 이론가들은 대중과 문화의 관계를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대중은 문화의 수혜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 속에서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주체라는 입장이다.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결과 우리의 손 안에는 다시 대중 문화라는 두 단어가 단출하게 남았다. 이제 대립항에 대해 생각해볼 차례다.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향유하는 삶의 방식을 대중 문화라 한다면 이에 반대되는 개념은 무엇일까? 소수의 권력자 계층이 향유하는 삶의 방식, 즉 엘리트 문화라 볼 수 있다. 엘리트 문화는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 사람들이 향유하는 삶의 방식과 다르나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며 하나의 변별적인 문화로 인정받는다. 

이 역시 학자에 따라 다양한 답이 존재하나 갠스(1974)는 ‘취향 문화’라는 말로 문화의 우열을 부정한다. 이른바 문화적 다원주의의 맥락으로,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문화를 가질 권리가 있으며 그저 취향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특정 문화의 우위를 부정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고급 문화·중급 문화·하급 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하급 문화의 향유자는 고급 문화를 접하거나 공부할 기회가 박탈돼 해당 취향을 갖추지 못한 경우라고 풀이한다. 

더 나아가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고급 문화를 선택하고 수용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배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교육적 지원 정책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문화에 진정으로 우열이 없다면 이러한 정책 또한 불필요할 것이기에 갠스가 말하는 심미적 다원주의의 진의를 의심하게 된다. 높고 낮음을 전제하는 다양성을 진정한 다양성이라 말할 수 있는가? 애초에 ‘높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앞서 갠스가 사용한 심미적 다원주의라는 용어로 돌아가 보자. 다원주의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갠스는 모든 문화들이 문화 그 자체로서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문화가 동등한 가치로 평가되는 것은 ‘해당 문화의 공중의 특성과 수준을 반영해 평가할 때’에 한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다. ‘저 못 배운 가난한 사람들이 저런 문화를 좋아하는 것’ 자체는 비난할 일이 아니나, 그렇다고 ‘저런 문화’가 바람직한 문화라거나 더 좋은 문화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더 고급한 취향 문화일수록 더 바람직하고 좋은 문화일 수 있다는 말로 갠스는 고급 문화의 심미적 우월성을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자면 「마리오 카트」 게임 플레이보다는 바다 위에서의 요트 운전이, K-팝 아이돌 댄스보다는 하프 연주가 인간에게 보다 오래 지속되는 심미적 충족감을 주며, 그렇기 때문에 고급 문화로 분류될 자격을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복제본을 구입하는 대신 화랑에서 원화를 구입하는 것이 고급 문화인 이유 역시 경제력의 문제라기보다는 그쪽이 보다 순수한 형태이며 더 깊은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다. 

다만 갠스 본인이 인정하듯 고급 문화가 인간에게 더 강력한 심미적 만족감을 준다는 가정을 실증적으로 검증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이 글의 목적 또한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이상 논하지 않으려 한다.

두 번째로 희소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보다 라틴어를 공부하는 사람의 수가 적으며 생활 속에서 접할 기회 또한 적다. 사교 모임에서 자신의 취미가 하프 연주라고 밝혔을 때 선망 섞인 야유가 터져 나오는 것은 기타 연주자에 비해 하프 연주자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 즉 희소성이 가치를 높이기에 고급 문화로서의 입지가 굳어지는 것이라는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희소성이 시장 경제의 핵심 개념인 점을 고려하면 얼핏 그럴듯한 주장으로 보인다. 다만 희소성이 곧 문화의 높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어느 소수 민족의 사라져가는 전통 민속이 문화에서 가장 높은 위계를 차지해야 할 것이며,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신인 작가의 작품을 읽을수록 문화적 안목을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으므로 희소성이 곧 고급 문화의 기준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세 번째는 어려움의 정도가 곧 문화의 높이라는 가설이다. 오페라를 제작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어려운 일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최고의 창작자들이 한 데 모여야 한 편의 작품이 만들어진다. 오트쿠튀르 의상 제작 또한 마찬가지다. 전 세계에 공장을 두고 옷을 대량 생산하는 SPA 브랜드와 달리, 오트쿠튀르 의상은 그야말로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서 만든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느 것이든 타인이 어렵게 창작한 결과물이며 더러는 요행도 깃들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오기 힘든 희소한 창작물이기 때문에 고급 문화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취향이 고급 문화에 접근하는 길이라는 말은 얼핏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고급 문화를 향유할 수 있다는 이상론처럼 들리나 실은 정반대다. 취향은 사다리로 작용하기보다는 진입 장벽으로 기능할 때가 더 많다. 취향이 무엇을 바탕으로 형성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갠스는 취향의 분화가 이뤄지는 근거로 수용자들의 사회·경제적 수준, 다시 말해 사회계층(class)을 들고 있는데, 특히 계층 구분에 사용되는 세 가지 수준인 수입·직업, 그리고 교육 중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부분을 강조한다.

소비 자본주의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상속 자본에 대해 생각할 때 물질적인 면, 즉 경제 자본만 떠올리는 경향이 있지만 부르디외는 다른 세 자본이 사회적 계급에 미치는 영향을 중요하게 다룬다. 마르크스와 달리 부르디외에게 있어 자본은 ‘사회적 경쟁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말하며 자연히 비단 경제력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경제자본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상태지만 문화 자본만은 풍부하게 갖춘 가정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모든 물질적 유산은 동시에 문화적 유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대를 이어 살아온 대저택·저택을 채우고 있는 고서와 고대 유물·최근 고평가받기 시작한 화가의 그림·갓난아기 때부터 자연스럽게 들어온 부모의 악기 연주 소리 등은 개인이 이것을 자본이라 의식할 틈도 없이 취향으로 자리 잡아 아비투스(습속·습성)를 형성한다. 그 결과 상류 계급은 고급스럽다는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고급 문화 취향을 가지는 반면, 중류 이하의 계급은 세련됨이나 미학과 무관한 필요에 의한 취향을 보유하게 된다.

즉 취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의 노력을 통해서 오롯이 얻어지는 것 또한 아니다. 기존 향유층의 비호를 받으며 권위를 지켜온 고급 문화들이 대중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움직임은 명확하다. 더 이상 고급 문화와 대중 문화의 경계를 의식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높고 낮음은 상대적 개념이며 인간은 언제나 이를 견줘 판정을 내리고 싶어 한다. 

대중은 더 이상 ‘덩어리’가 아니다. 분화된 미디어는 우리에게 한 가지 목소리만을 들으라고 강요하지 못한다. 우리는 개인화된 미디어를 통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며, 높은 확률로 우리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만 본다. 이러한 선호 성향은 알고리즘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화된다. 이렇게 되면 참과 거짓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가치의 경중 역시 우선순위에서 취향에 밀린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정치적 판단 앞에서 눈을 감는 것 또한 손쉬운 일이다.

매스 미디어의 시대였다면 공중파 뉴스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보도했을 이웃나라의 전쟁 소식을, 현대의 우리는 ‘아 진짜? 못 들었어’로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에 집중하나 이 또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개인 미디어를 통해 무한히 밀려드는 타인의 취향에 수시로 잠식되는 탓이다. 따라서 취향은 고급문화에 접근할 만큼 높이 쌓이지 않으며 문화 자본은 난잡한 형태로 축적돼 문화 생산의 마중물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 모든 현상을 우리는 더 이상 생산자와 미디어의 탓으로 돌릴 수 없으며 대중이라는 말 뒤로 숨을 수도 없다. 우리는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수용자가 능동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는 환경에 놓여있으며 이는 수용자의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함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민성이 강조되는 이유다. 무엇을 보고 듣고 무엇에 대해 이야기할 것인가. 우리가 선택한 이야기가 곧 우리의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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