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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가 바라본 미술과 문학의 세계
몽상가가 바라본 미술과 문학의 세계
  • 이승건
  • 승인 2023.06.23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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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하다_『꿈꿀 권리』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 김웅권 옮김 | 동문선 | 2008 | 275쪽

바슐라르 예술사상·테마비평의 이론적 토대
예술작품의 형이상학적 순간

문학청년으로 미술에 한참 관심을 두고 있던 대학 시절, 1960년대 프랑스에서 문학연구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전기적 비평에 대항하는 새로운 문학 탐구의 방법으로서 정신분석적 비평, 마르크스주의적 비평, 구조주의적 비평, 실존주의적 비평 그리고 테마 비평(Thématique) 등으로 대표되는 신비평(Nouvelle Critique)을 접한 적이 있었다. 특히, 맨 마지막의 것은 작품 심층에 내재된 작가의 미의식과 작품의 주제를 직관적으로 파악해 작품을 해석하려는 입장으로, 작품을 창조한 작가의 상상력의 독자성을 강조함으로써, 작가의 전기적인 상황을 넘어서서 작품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비평적 태도로 기억한다. 

더욱이 이 테마 비평의 이론적 토대에 과학 철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몽상가로 알려진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예술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아니 놀라며 미술에 관한 그의 저서를 찾아 손에 넣어 읽어 보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꿈꿀 권리』(이가림 옮김, 열화당, 1980)였다. 

 

예술가 특유의 물질적 상상력을 몽상하다

원래 이 책은 바슐라르가 1944년부터 타계한 해인 1962년까지 이곳저곳에다 실은 단편 글들을 편집자가 한데 모아 사후에 단행본(Le droit de rêver,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1970)으로 엮은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열화당의 번역서는 총3부(제1부 미술, 제2부 문학, 제3부 몽상)로 구성된 프랑스어 원서 중 맨 앞의 것만을 떼어내어 우리말로 옮겨 ‘바슐라르의 진귀한 미술론’(이가림 옮김, 역자의 말, 3쪽)으로 소개하며 출간(도판 69점 소록, 총 169쪽 분량)했다. 이와 같은 편집은 미술에만 집중시키는 장점도 있었지만, 원서 전체에서 뿜어내는 이야기를 온전히 파악하는 데는 원초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듯, 원서의 3부 모두를 옮긴 번역서(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8)를 통해 바슐라르를 다시 만난 것은 근 30년 만에 일이다.   

먼저, 이 책의 제1부 미술 편(11~138쪽)은 인상파의 거장 모네(Claude Nonet, 1840~1926)와 초현실주의 화가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을 비롯하여 조각가 바로키에(Henry de Waroquier, 1881~1970)와 독일 태생 판화가 플로꽁(Albert Flocon, 1909~1994)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러시아 태생 화가 세갈(Simon Segal, 1898~1969), 스페인 출신 조각가 칠리다(Eduardo Chilida, 1924~2002), 폴란드 출신 화가 마르쿠시스(Louis Marcoussis, 1878~1941), 여기에 그 유명한 코르티 출판사 설립자 코르티(José Corti, 1895~1984)에 이르기까지 모더니즘 시대의 한복판에서 예술과 문화를 풍미한 미술가들을 바슐라르 자신만의 몽상적 사유로 접근한다. 특히,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 원초적인 철학적 몽상을 촉발시킨 물(모네, 수련 혹은 여름날 새벽의 놀라움, 11~17쪽), 불(바로키에, 인간과 그 운명, 56~62쪽), 흙(플로콩, 환상의 성, 118쪽~138쪽), 공기(샤갈, 빛의 근원, 40~45쪽) 등 4원소의 물질(archē)에 대해, 과학자로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을 통해 꿈꾸며 상상하는 당대의 미술가들에게서 몽상가로서 작가마다 특유의 ‘물질적 상상력’을 읽어 낸다. 이와 같은 바슐라르의 미술 비평의 안목은 이미 『불의 정신분석』(1938), 『물과 꿈: 물질에 대한 상상력 시론』(1942), 『공기와 꿈: 움직임에 대한 상상력 시론』(1943), 『대지와 의지의 몽상: 힘에 대한 상상력 시론』, 『대지와 휴식의 몽상: 내면성의 이미지에 대한 시론』(1948)에서 선보인 바 있다. 

 

예술작품의 형이상학적 순간을 음미하다

이어지는 제2부 문학 편(141~213쪽)에서는 ‘몽상의 역동적 변증법’으로 소개한 말라르메(Stéphane Mallarmé, 1842~1898)(174~180쪽)를 비롯하여 1834년 발표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라피타』의 저자 발자크(Honoré de Balzac, 1799~1850)를 조명(141~150쪽)하면서 영혼의 역동적 경험을 노래한 문필가 8명과 몽상을 이어간다. 마침내 제3부 몽상 편(217~266쪽)에서는 ‘꿈의 공간’(217~222쪽)으로부터 몽상의 보금자리를 더듬더니만, 이어서 작품을 통해 우주에 대한 하나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 하나의 존재와 사물들, 이 모든 것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으로서 예술이 품는 형이상학적 성격(‘시적 순간과 형이상학적 순간’, 245쪽~253쪽)을 음미하기에 이른다.  

과학의 영역에서도 예술의 지대에서도 여전히 바슐라르의 반향은 목격된다. 예를 들어, 푸코(M. Foucault, 1926~1984)에 대한 관심이 두터워지면서 바슐라르, 캉키엠(G. Canguihem, 1904~1995), 알튀세르(L. Althusser, 1918~1990), 푸코로 이어지는 계보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깊어져, 이들에게 인식론적 영향을 끼친 바슐라르의 과학철학 역시 첨예한 관심의 대상이 된 바 있다. 또한 문학 비평에서 상상력 비평 혹은 이미지 비평을 창시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는 뒤랑(Gilbert Durand, 1921~2012)은 신화적 상징연구를 통해 바슐라르의 뒤를 이어 상상력 이론을 확립했다고 평가받는 점 등에서 그러하다고 하겠다.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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