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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이렇게 춤췄다!
니체는 이렇게 춤췄다!
  • 이승건
  • 승인 2021.05.0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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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하다_『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전집 13) 정동호 옮김 | 책세상 | 571쪽

무용미학자로서 니체

서양 철학자들 가운데 예술의 한 장르로서 무용을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등의 이론에 비추어 보면서 그것의 심오한 의미를 사색한 인물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외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아마도 플라톤과 그로부터 23세기 후의 니체만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무용(orchesis)을 뮤즈 여신들(mousai)에 의해 이루어지는 뮤즈적 예술(mousikē)을 구성하는 중요한 일부분으로 보아(『법률』, Ⅱ, 653d), 음악(odē)과 합쳐진 합창가무(choreia)(『법률』, Ⅱ, 654b)로 젊은이들을 교육(paideia)함에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겼으며(『법률』, Ⅱ, 672d~673a) 선한 시민을 양성하고 정당한 사회를 이루는데, 즉 선(agathon)과 정의(orthotes)의 실현을 위해 무용이 꼭 필요함을 강조(『법률』, Ⅶ, 814b~817e) 했기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무용을, 플라톤처럼, 윤리적(도덕적)이며 교육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지는 않는다. 즉, 그에게 무용예술이란 오롯이 심미적 평가의 척도가 되는 것으로, 마치 〈백조의 호수〉처럼 무용수에 의해 시간을 통해 공간 속에서 정체성을 획득해가는 예술적 대상이었다. 따라서 니체가, 플라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오늘날 공연예술이라고 불리는 무용의 유형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면에서, 그를 현대적인 무용의 미학자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적 산문으로 적어 내려간 책

이번 서평의 대상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가 서거한 지 백 년이 되는 지난 2000년에 맞춰 시작된 『니체전집』(전21권, 2005년 완간) 중 한 권이다. 특히 『니체전집』의 정본으로 공인된 독일 발터 데 그루이터(Walter de Gruyter) 출판사의 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KGW) 판본을 채택하고, 전문가 집단의 감수를 거치면서, 각권마다 니체의 해석을 담은 깊이 있는 해설이 책읽기의 기쁨을 한층 더 북돋는다. 

이 『니체전집』 번역서 중, 열 세번째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1883~1885)는 무용과 관련된 미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철학적 산문시’라고 평가받을 만큼 시적으로 쓰인 이 저작은 비유와 상징, 그리고 패러디를 동원해서 서술하고 있기에 니체사상 전체의 이해가 있어야 읽을 수 있는 난해한 책 ―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부제에서 엿 볼 수 있듯이 ― 이다. 이와 같은 독특한 문체의 서술방식은 니체 자신의 획기적인 철학적 전달방식의 도입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는 개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사유와 사변이 전개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추상적 표상 안에서의 연역적 서술방식 대신에 그때그때 움터 오르는 것을 직접 표현하는 방식을 보이고 있으며, 이론가의 담론 대신에 예언가와 시인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기 때문이다.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일관된 주제로 전개되고 있지는 않다. 주목할 것은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통해 춤추는 디오니소스에 의한 영원 회귀(ewige Wiederkunft)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점인 바, 니체 자신의 감정이입 대상인 이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맨쉬(Übermensch)와도 연관 지을 수 있겠다. 그것은 인간을 넘어 저쪽에 존재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표현될 수 있는 운명애(amor fati)의 태도, 즉 차라투스트라의 무용에 의해 상징화되는 그런 태도를 엿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차라투스트라는 한낱 무용수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테르프시코레

그런데 왜? 차라투스트라일까? 니체는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의 명칭을 따서 자신의 책 제목에 차라투스트를 사용하고 있다. 더욱이 니체 자신이 절대적 선, 도덕규범을 강조하는 종교와는 정반대의 길에 서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종교성이 짙은 명칭으로부터 한 인물의 성명을 작명했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라는 기존의 전통적 도덕을 수립한 사람으로서 그와 같은 내용 또한 잘 알고 있는, 그래서 전통적인 이분법이 허구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는 인물이며, 앞으로 새로운 도덕을 설파하려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특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인물을 통해 호메로스에서 본 것과 같은 반신(半神)으로서의 예술가의 모습, 즉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읽고 있다. 몸짓의 언어로서 무용은 가장 인위적인 예술이다. 예를 들어 발끝으로 서서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것과 같은 모습의 발레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대지에 입맞춤을 하며 대지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존재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무용은 이러한 대지의 품에 대해 중력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중력의 악령에 대하여’에서 중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 무엇보다도 저 무거운 중력의 악령에 적의를 품고 있는데, 그것만 보아도 새의 천성임이 분명하다. 나 진정 중력의 악령에 대해 불구대천의 적의와 최대의 적의 그리고 뿌리 깊은 적의를 품고 있으니! 나의 적의가 일찍이 날아보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며 날아 헤매어보지 않은 곳이 어디 있던가!”

여기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중력은 영혼에 대한 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중력의 영혼’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2부 ‘춤에 부친 노래'에서 “저들이 ‘세계를 주재하는 자’라고 부르는, 나의 더없이 강력한 악마인 저 중력의 악령에게 바치는 춤노래이자 조롱의 노래를” 요구한다. 따라서 운명에 대한 완벽한 사랑은 이 중력의 영혼을 정복하고 난 승리를 의미한다. 니체는 그 승리를 제3부 ‘일곱 개의 봉인'에서 춤과 비상의 웃음, 노래 등으로써 묘사한다. 즉,

“내가 갖추고 있는 덕이 춤추는 자의 덕이라도 된다면, 그리하여 내가 자주 두 발로 황금과 에메랄드의 환희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았더라면, 나의 악의가 웃음을 잃지 않은 악의이고, 장미의 언덕과 백합의 울타리를 제 집으로 하고 있다면. 웃음 속에 온갖 악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지만 악의 그 자체의 행복을 통하여 신성시되고 죄 사함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무거운 것 모두가 가볍게 되고, 신체 모두가 춤추는 자가 되며, 정신 모두가 새가 되는 것, 그것이 내게 알파요 오메가라면. 진정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알파이자 오메가렷다!”  

이렇게 볼 때, 차라투스트라는 죽지 않는다. 니체의 이러한 사상에서 무용에 대한 형이상학적 의미의 영원불멸성이 강조되곤 한다. 이 의미는 인격적인 영원불멸에 대한 믿음, 인간의 죽음에 대한 도전 등 다양한 형태를 뜻한다. 그리고 만약 무용수가 스스로를 신이라고 느낀다면 이것 또한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죽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사실을 무시하기 위해 춤을 춘다. 이 또한 그들이 죽음을 비난하는 정신력을 성취하는 한 춤추고, 도약하고, 날고, 자신들의 육체를 통제할 수 있는 한 그들은 그런 죽음의 사실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대지는 무용수의 진정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하기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를 중력의 영을 담고 있는 대지 위에 우뚝 세워 웃으며 춤을 추게 한다. 아니 니체 자신이 이제 흥겨운 춤을 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자신만의 강력한 춤을 흥겹게 추고 있다. 

니체, 몸짓의 예술인 무용으로 몸-이성의 사상을 펼치다!

니체의 만년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의 무용에 관한 그의 사색은 서구의 근대가 현대로 진입하는 관문에서 마르크스, 프로이트와 더불어 로고스에 정초한 철학이 탄생한 이래 서구가 구축해온 이성적ㆍ합리적 세계관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 파괴를 주도한 대표적인 사상가들 중 한명으로 인식될 수 있을 만큼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객관적 진리를 주장하지 않는 예술을 통해, 즉 가상의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예술의 힘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모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제1부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몸을 ‘하나의 거대한 이성’으로, 그리고 몸이 곧 ‘나이며 영혼’으로 간주하며 ‘몸-이성’(Leib-Vernunft)의 사상을 펼쳐 보이는 가운데 몸짓의 언어로서 무용에 관한 자신만의 견해를 드러내고 있다. 니체에 있어서 예술은 철학을 능가하는 인간행위의 한 영역으로 부각된다. 그것도 어떤 예술인가? 지금까지 정신의 대척점으로서 홀대받아온 ‘몸’에서 이루어지는 무용예술인 것이다! 이렇듯 니체는 예술을 통해, 그것도 몸짓의 예술인 무용을 통해, 비철학적 철학의 사유를 디오니소스적 충동에서 춤추듯 대지를 지르밟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만의 테르프시코레(Terpsichorē)를 만났던 것이다.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ㆍ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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