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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의 근대성, 정말 ‘실증’ 되었나
식민사학의 근대성, 정말 ‘실증’ 되었나
  • 서영희
  • 승인 2022.08.15 09: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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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학을 비판한다 ② 식민사학의 근대성

올해로 광복 77주년을 맞이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식민지 근대화론과 좌우 대립 등 이념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연 한국인은 당파 싸움만 하며 전통만 고수하다가 나라를 빼앗겼을까. 이번에 출간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시리즈는 그동안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던 일제 식민사학의 실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대학·언론·박물관·철도주식회사·조선총독부 등은 과연 어떤 식으로 식민사학을 개발해왔는지 알아본다. 
두 번째는 식민사학의 근대성에 대한 논쟁이다. 서영희 한국공학대 교수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를 통해 사료의 편향성을 토대로 식민사학을 지적했다. 그래서 식민사학이 과연 ‘실증’적인지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서 교수는 식민사학을 제국주의와 연동시킨 근대역사학의 침략적 본성이 과소평가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종준 청주교대 교수는 서 교수의 지적은 기존의 ‘식민사학론’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밝혔다. 즉, 식민사학이 근대적 실증을 내세웠으나 결국 침략적 왜곡에 불과하다는 비판은 줄곧 있어왔다. 따라서 그는 실증을 위한 사료 선별에서의 ‘선험적 역사인식’을 따져봐야 한다고 언급했다. 김 교수는 한국사학이 식민사학을 극복하려면 파시즘적 역사인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준 청주교대 교수의 「식민사학의 침략성과 근대성은 상호배타적인가」 읽기

 

 

식민사학의 근대성. 정말 ‘실증’ 되었나


 

식민사학의 극복은 줄곧 역사학계의 화두로 존재해왔다. 근래 ‘식민주의 역사학’의 개념을 제시한 연구들은 식민사학의 극복을 내걸고 출발한 반(反) 식민사학 역시 식민사학을 비판하면서 민족 혹은 근대 국민국가라는 틀에 갇힌 쌍생아라고 지적한다. 근대역사학의 성립과정을 곧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성립과정으로 보는 이들은 식민사학을 의도적인 왜곡 또는 날조라기보다는 실증주의적 연구방법론에 의거한 근대역사학의 범주에서 바라보며, 식민사학에 참여한 일본인 학자들이 일본 근대역사학을 대표하는 연구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식민사학을 제국주의와 연동된 근대역사학으로 보는 시각은 ‘실증’을 중시하는 ‘근대’역사학이라는 관점에 치우친 나머지 식민사학의 침략적 본성을 과소평가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따라서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식민지에 이른 역사를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것과는 별개로, 식민사학에 의해 병합 정당화의 논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사편찬 과정을 통해 구축되었는지 밝히는 것은 아직도 근대사 학계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식민사학으로서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 중에서도 특히 고종시대사 인식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식민사학에 의해 만들어진 병합 정당화 논리

식민사학의 체계 내에서 근대사에 관한 학술적 저술을 남긴 경우는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가 거의 유일하다. 다보하시는 식민사학이라고 비판받기보다는 실증주의에 입각한 관학 아카데미즘의 전형으로 평가되어왔다. 다보하시가 참여한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최근세편은 수많은 근거 사료들을 제시함으로써 엄정한 고증을 거친 사료편찬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조선사』가 “정말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료편찬”이었는지는 사료 원문을 수록하고 있는 『고본(稿本)조선사』와 일일이 대조한 후에 평가 가능하다. 특히 다보하시가 한·중·일 3국의 외교사료들을 다수 이용했다는 것이 곧 사료의 편향성 논란을 면제해주는 것도 아니다. 대외관계에 편중된 사료편찬은 그 자체로 고종시대상의 왜곡이다. 고종시대사를 주체적으로 보지 않고 열강의 각축 속에 운명이 결정되는 객체로 전락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일제는 역사편찬을 명분으로 조선의 모든 사료들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식민사학 구축에 유리한 사료들만 선별하여 『조선사』를 편찬함으로써, 객관적인 증거처럼 실증적인 방식으로 포장되어 제시되는 사료의 위력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 근대 사료학의 대가라는 도쿄제대 교수 구로이타 가쓰미(黑板勝美)가 진두지휘하고 조선총독부가 모든 역량을 동원한 근대적인 학술사업으로서 『조선사』 편찬은 1894년 6월에서 끝나고 정작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된 대한제국기와 병합사는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이왕직(李王職)에서 총독부 학무국 관료 출신으로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오다 쇼고(小田省吾) 주관하에 『고종순종실록』을 편찬했다. 고종 사망 직후 일본 궁내성 주관으로 아사미 린타로(淺見倫太郞)가 비밀리에 편찬한 『이태왕실록』에서 선구적 모습을 보였듯이, 형식적인 왕실 의례를 부각시킨 ‘왕조의 역사’를 편찬한 것이다. 『조선사』와 같이 사료 근거를 직접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통’의 형식을 빌려 편찬한 실록은 국권침탈 과정의 민감한 사료들을 낱낱이 공개하는 곤혹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편이었다. 결과적으로 ‘전통’의 형식을 취한 『고종순종실록』과 근대 역사학적 방법에 의거했다는 『조선사』 제6편 제4권은 적절히 역할을 분담하며 식민사학의 근대사 인식 틀을 형성했다. 일본 근대역사학의 아카데미즘을 대표하는 관학자들의 학자적 양심이나 학문적 자율성, 혹은 근대 실증주의적 방법론은 적어도 고종시대사 편찬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서영희 한국공학대 교수가 집필한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자료수집과 역사편찬』의 표지. 서 교수는 이 책에서 일제에 의해 편찬된 한국근대사가 일부 사료만 적용돼 실증적이지 않은 식민사학이라고 비판했다. 

 

어떤 과정인지 밝히는 게 근대사 학계의 과제

식민통치에 협력적인 ‘학식과 명망 있는 조선인’들이 식민사학의 가장 근저에서 전통적인 연대기 발췌에 매진하는 동안, 을미사변 연루자인 기쿠치 겐조(菊池謙讓)도 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엄청난 분량의 근대사료들을 수집했다. 하지만 방대한 사료들을 수집한 후에도 그 사료에 즉하여 실록을 편찬한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 사료들만 선별적으로 활용하여 역사를 편찬했다면, 그것을 과연 ‘실증’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해방 후 77년이나 지난 현재까지도 ‘실록’이라는 명칭에 오도(誤導)되어 『고종순종실록』을 기초사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식민사학의 총결이라고 할 수 있는 『고종순종실록』을 대신할, 근대적인 형식의 고종시대사 사료집을 시급히 편찬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비롯하여 일제 식민사학이 구축해놓은 병합 정당화의 논리는 아직도 건재하고,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영희 
한국공학대 지식융합학부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로 석·박사를 했다. 역사도시서울 위원회와 인천시 문화재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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