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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남진론에 희생된 조선인…‘피식민자’이자 ‘제국주의 대행자’
일제 남진론에 희생된 조선인…‘피식민자’이자 ‘제국주의 대행자’
  • 허영란
  • 승인 2022.09.01 09: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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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학을 비판한다 ③ 일제의 남진론

올해로 광복 77주년을 맞이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식민지 근대화론과 좌우 대립 등 이념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연 한국인은 당파 싸움만 하며 전통만 고수하다가 나라를 빼앗겼을까. 이번에 출간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시리즈는 그동안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던 일제 식민사학의 실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대학·언론·박물관·철도주식회사·조선총독부 등은 과연 어떤 식으로 식민사학을 개발해왔는지 알아본다. 
세 번째는 『남양과 식민주의』를 쓴 허영란 울산대 교수(역사문화학과)의 글이다. 허 교수는 청일·러일전쟁으로 드러난 일제의 북진론과 더불어 남양군도와 동남아시아로 팽창한 남진론 역시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허 교수는 일제의 남진론에서 동원된 조선인이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자 대행자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한반도를 일제의 여타 식민지 및 침략 지역과 구별하여 특권화하는 것을 그만두고, 
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가해진 일제의 침략 과정과 해당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활용했던 식민주의 담론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자발적으로든 강제적으로든 많은 한국인이 일본과 만주, 남양군도와 동남아시아 일대에 이르는 ‘일본제국’을 활동 무대로 삼았다. 하지만 36년의 피식민 기간보다 훨씬 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런 역사는 잊히고 그 의미 또한 묻지 않게 되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식민통치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경험의 운반자’들이 자연수명을 다하면서 식민지 경험도 어느덧 간접적이고 상징적인 기억문화의 범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동남아시아에 주둔한 일본군. 사진=사회평론아카데미

그런 와중에 한일 양국의 극우 세력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노동자 문제를 민족 모순이나 피해자를 위한 정의와 분리시켜 극우 정치의 도구로 활용하는 현실은 의미심장하다. 공동체의 역사적 정체성을 심대하게 왜곡하는 식민주의 기억문화를 비판하고 오늘의 시대 정의에 부합하는 탈식민주의 담론을 구성하고 실천하는 것이 당면 과제가 되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만을 응시하는 단선적인 ‘반일 민족주의’를 상대화하는 데서 출발해, 일본제국주의와 아울러 유럽제국주의를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탈식민주의 인식으로 전환해가야 한다. 무엇보다 한반도를 일제의 여타 식민지 및 침략 지역과 구별하여 특권화하는 것을 그만두고, 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가해진 일제의 침략 과정과 해당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활용했던 식민주의 담론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기반 위에 비로소 탈식민주의를 지향하는 피식민지 아시아의 연대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 역사학계는 한반도-만주-중국으로 연결되는 일본의 대륙 침략 담론과 국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비판해왔다. 실제로 메이지유신 이래 일본의 대외정책은 조선과 만주 등 대륙 침략을 우선했다. 그들의 북진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현실화됐으며, 조선문제의 해결이 만주문제를 낳고 그것이 다시 화북문제를 거쳐 중일전쟁으로 연결되는 식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섬 제국론’을 내세우며 일본의 남방 해양인 남양군도와 동남아시아 일대로 팽창해갈 것을 주장하는 남진론 역시 북진론과 경합하거나 병행했던 일제 식민주의 담론의 또 다른 축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태평양 일대의 섬들을 위임통치하게 되면서 일본은 국가적 세력 팽창의 대상지로 남양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게 되었고 남북병진론의 형태로 국책을 재구성했다.

 

일제의 ‘남양·‘남방’ 침공과 모순적인 아시아 인식

근대 일본은 세계의 중심을 의미했던 ‘중국(中國)’을 타자화하면서 자국이 세력을 펼칠 새로운 ‘동양’을 상상했으며, 그것이 메이지 시기 이래 일본이 침공해간 북진의 공간이었다. 1910년대 중반 이후 확보하게 된 남양군도에서 출발해 태평양전쟁을 통해 획기적으로 확장된 남진의 공간은 ‘남양’ 또는 ‘남방’으로 표상되었다. 남양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대응 개념과 구별되는 제3의 일본적 지역 개념이었으며, 남진론이 힘을 얻는 것에 비례해서 서양이나 동양과는 다른 남양·남방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제국 일본의 팽창 대상으로 가시화되었다. 이후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전면화되자 일본은 인구와 식량 문제, 시장 확보와 원자재 부족 등을 일거에 해결하기 위해 북방과 남방을 포괄하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구축을 내걸고 군사적 패권의 장악까지 모색하게 된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표현이 공식 석상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40년 8월 1일 일본 외무대신과 외무성 담당 기자단의 기자회견에서였지만, 태평양전쟁의 광기 속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아시아에 대한 타자화와 차별을 핵심으로 하는 ‘탈아론’과 서구 열강에 대항해 아시아 연대를 강조하는 ‘아시아주의’를 모순적으로 결합시킨 이데올로기로,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특수 이익을 주장하며 군국주의적으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뿌리를 내리고 성장했다. ‘황국 일본’을 맹주로 하여 ‘아시아인의 아시아’를 건설하자는 이른바 ‘팔굉일우(八紘一宇)’ 선전이 본격화되면서, 남양 또는 남방을 대륙과 분리해 독자의 해양 지역으로 파악하는 인식 또한 소멸되었다.

일본의 아시아 인식은 침략의 대상이자 연대의 대상이라는 충돌하는 논리에 의해 변주된다. 오늘날 아시아 침략의 역사적 과오를 외면하는 일본의 내면을 이해하려면 전통적인 북진론만이 아니라 서구 열강에 대한 일본의 열등감과 아시아에 대한 모순된 인식이 응축되어 있는 남진론을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동남아시아를 지배하는 ‘영미귀축(英米鬼畜)의 압제에서 아시아를 해방시켜 자애로운 일본제국의 천황이 통치하는 대동아를 건설하기 위한 성스러운 결단이자 자기희생’으로 미화했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건 대동아공영권 이데올로기는 일본이 내면화하고 있는 아시아 인식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대동아공영권 기획 완수에 동원된 신민

오늘날 한국 사람에게 남양이나 남방이라는 공간 개념은 낯설다. 하지만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조선인’에게 남양 또는 남방은 ‘새로운 제국의 영토’를 가리키는 일상의 개념이었고, 태평양전쟁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이 남양군도와 동남아시아 각지로 동원되었다. 조선인에게는 남양 또는 남방을 무대로 대동아공영권 기획을 완수하는 신민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졌다. 일본 ‘내지’에 소속되어 있던 그들은 제국주의에 강제동원된 피해자인 동시에 제국주의의 의지를 대행하는 가해자였다. 동남아시아로 동원되었던 포로감시원들이 전후에 감당해야 했던 강제 수용과 전범 재판은 그런 모순적인 위치가 빚어낸 가혹한 현실이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남양군도와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매우 부족했고 연구도 취약했다. 역사적 피해자로서 한국은 가해자인 일제를 비판하는 데만 전력을 다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당시 조선인이 처했던 피식민자이자 제국주의 대행자라는 모순된 위치를 이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탐색하면서, 세계와 연대할 수 있는 탈식민주의 기억문화를 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일제의 남진론과 남양군도 및 동남아시아에 대한 침략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로 석·박사를 했다. 한국구술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울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제시기 장시 연구』, 『동해포구사』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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