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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니혼진’, 왜 ‘조선인 없는 조선 연구’ 했나
경성제국대학 ‘니혼진’, 왜 ‘조선인 없는 조선 연구’ 했나
  • 정준영
  • 승인 2022.10.04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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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사학을 비판한다 ⑥ 경성제국대학

올해로 광복 77주년을 맞이했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식민지 근대화론과 좌우 대립 등 이념 갈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과연 한국인은 당파 싸움만 하며 전통만 고수하다가 나라를 빼앗겼을까. 이번에 출간된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시리즈는 그동안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던 일제 식민사학의 실체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대학·언론·박물관·철도주식회사·조선총독부 등은 과연 어떤 식으로 식민사학을 개발해왔는지 알아본다. 

여섯 번째는 경성제국대학이다. 정준영 서울대 교수는 경성제국대학의 일본인 교수들이 조선을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는 걸 인식했으며, 추사 김정희, 퇴계 이황 등 조선의 지적 거인들을 부각시켰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인 교수들은 조선이 이런 거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폐쇄적인 사회였다는 비판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심희찬 연세대 HK교수는 식민주의 역사학의 앞선 단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준영 교수의 연구가 경성제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분석 시기 또한 식민지기에 집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심 교수는 일본으로 돌아간 경성제대의 연구자들이 어떤 모순과 역설에 놓였는지 ‘포스트 경성제대’의 문제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조선 연구란 일본학과 중국학 사이에서 궁극적으로는 해체되어 제국적인 ‘동양문화 연구’ 내부로 수렴되어야 할 매개 고리였다. 청대 고증학을 둘러싼 한중일 지식인의 교류가 분석되었고, 조선 성리학을 매개로 하는 일본 송학 연구의 지적 계보가 추적됐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경성제국대학(이하 경성제대)을 설립했다. 제국대학으로서는 여섯 번째, 식민지에서는 처음이었다. 일제는 경성제대를 식민통치의 문명성을 과시하는 체제선전의 도구로 활용했으나 실상은 확연히 달랐다. 교원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본토의 일본인과 조선 거주 일본인도 조선인만큼 뽑았다. 조선인 학생의 비율은 전체 3분의 1을 넘지 못했다. 

 

경성제대 조선어학·조선문학 강좌의 교수와 학생들. 앞줄 왼쪽이 조선어학의 오구라 신페이 교수, 오른쪽이 조선문학의 다카하시 도루 교수이다. 사진=사회평론아카데미

식민지 사회는 강점 이래 ‘학(學)의 독립’을 줄기차게 지향했다. 이를 위해 외국인 선교사들에의 협조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고, 경성제대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근대 대학의 경험이 되고 말았다. 해방 직후 경성제대는 적의 재산, 즉 적산(敵産)으로 전면 부정되었다. 우리로서는 그만큼 정신적 종속의 폐해가 컸다고 하겠다. 그런데 패전 이후 일본도 경성제대가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잊고 싶은 패전을 상기시키는 아픈 이름이었다. 이렇게 한동안 경성제대는 현해탄 양편에서 잊힌 존재로 남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10년 사이 외면받던 경성제대의 존재 의미 및 그 유산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다행스럽다. 

경성제대가 일본이 식민통치에 활용한 문화적 장치였다는 점은 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그 장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했으며 해방 이후 어떤 식으로 잔존하여 후과를 미쳤는지를 파악하려면 단죄해서 구축(驅逐)해버리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먼저 그것과 정면에서 마주해야 한다. 경성제대의 설립 과정이 새삼 검토 대상으로 부상하고, 이 과정에서 식민당국이 표방한 이념과 정책적 의도가 면밀하게 따져지며, 이 학교에서 배운 제국대학의 ‘조센진’들이 식민지와 해방공간에서 무엇을 고민하고 실천했는지를 추적하는, 경성제대와 관련한 최근 연구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 일제강점기의 지식과 교육을 따져보는 작업을 넘어서, 지금 한국사회의 학술조건과 대학형성을 계보학적으로 추적하는 지적인 디딤돌로도 의미가 있다.

물론 필자의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와 조선 연구』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일본인 교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차별화되는 특징이겠다. 실은 기존 연구가 외면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경성제대의 교수와 조교수는 거의 전원이 일본인이었다. 학생 이상으로 교수진은 일본인 일색으로, 철저하게 ‘그네들’의 기관이었던 셈이다. 연구중심을 표방했던 제국대학이 국가의 비호 아래에서 학계를 독점했던 사정을 고려한다면, 이는 식민지와 관련된 학술생산이 철저하게 일본인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음을 뜻한다. 게다가 경성제대는 설립 초기부터 엄격한 실증적 연구와 정책 지향적인 지식을 생산하고 있었다. ‘조선을 잘 아는 게 중요하지 않다. 제대로 아는 게 중요하다.’ 조선 연구를 표방했던 경성제대에서 정작 조선인을 배제하는 논리가 여기서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조선인 없는 조선 연구’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으며, 이는 또 어떻게 학문적으로 정당화되고 제도적으로 보장되었을까? 

 

조선 연구, 침체에 빠진 일본 동양학의 돌파구

필자가 법문학부에 재직했던 몇 사람의 일본인 교수들을 단서로 삼아 풀어보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런 수수께끼였다. 그들은 왜 조선이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경성제대의 교수가 되어 식민지로 건너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리고 제국대학의 교수로서 그들의 조선학이 도달했던 지점은 어디였을까. 이 책을 통해, 이들 경성제대의 ‘니혼진들’에게 식민지의 제국대학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묻고 싶었다. 

가령 초대 총장인 핫토리 우노키치에게 경성제대란 침체에 빠진 일본 동양학의 돌파구였다. 조선 연구란 일본학과 중국학 사이에서 궁극적으로는 해체되어 제국적인 ‘동양문화 연구’ 내부로 수렴되어야 할 매개 고리였다. 핫토리의 제자인 후지쓰카 지카시와 아베 요시오에게 경성제대란 스승의 기획이 충실하게 구현되는 지적인 무대였다. 청대 고증학을 둘러싼 한중일 지식인의 교류가 분석되었고, 조선 성리학을 매개로 하는 일본 송학 연구의 지적 계보가 추적됐다. 일본 본토에서는 불가능한 직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추사 김정희, 퇴계 이황 등 조선의 지적 거인들이 부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단순한 찬사는 아니었다. 이런 거인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폐쇄적인 조선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배후에 도사리기 때문이다. 

 

경성제대 설립 이전부터 조선사 연구에 종사했던 오다 쇼고와 이마니시 류에게 경성제대란 하나의 학문으로써 식민주의 역사학이 일본의 관학 아카데미즘 안에 제도화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후 경성제대는 학문적 권위와 학문적 인력 양성을 독점함으로써 식민주의 역사학을 지탱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마지막으로 식민지에 건너와서 더는 식민정책을 말하지 못하게 된 식민정책학자 이즈미 아키라에게 경성제대란 이곳이 역시 식민지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증거였다. 학문을 표방하고 실증성과 객관성을 가장했지만, 경성제대란 결국에는 식민통치라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 그의 침묵을 통해 드러난다.

능력의 한계로 이 책은 법문학부의 교수로 다루는 범위를 좁혔다. 하지만 ‘조선인 없는 조선 연구’가 직면한 아포리아는 의학부도 이공학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문지식의 외피를 쓰고 인종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으로 수행되었던 다양한 분과의 조선 연구들은 충분히 검토되어 성찰하지 못한 채 한국학을 위한 선행 연구로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졌다. 짧은 역사에 불과했지만 경성제대가 남긴 지적 상흔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진지하게 따져볼 가치가 있다. 

 

 

정준영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공은 역사사회학과 지식사회사이다. 교토대 교육학연구과 외국인 공동연구자,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연구교수를 역임했으며, 『식민권력과 근대지식』, 『팬데믹 너머 대학의 미래를 묻다』 등을 공동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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