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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선의 답변에 대한 답변, 학문과 사회적 금기에 대하여
윤지선의 답변에 대한 답변, 학문과 사회적 금기에 대하여
  • 이충진
  • 승인 2021.06.21 09:3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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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충’의 발생학」 논란, 이충진 교수 재반박

논문 「’관음충’의 발생학」(『철학연구 127집』, 2019) 논란에 대해 <교수신문>은 두 편의 기고글을 내보였다. 첫 번째는 지난 달 4일 공개된 이충진 한성대 교수(철학)의 「‘윤지선 논문’ 논란, 철학연구회는 무엇을 놓쳤나」다. 해당 논문의 논증 방식과 용어 선택, 철학연구회의 대처를 비판한 글이다. 이어 지난 7일에는 당사자인 윤지선 세종대 초빙교수(철학)의 반론 「'남혐'이 아니라 성착취 범죄 시스템 저지가 연구 목적이다」를 실었다. 명예훼손, 남성혐오 지적에 대해 해명하면서 “연구의 공익적 목적을 봐달라”고 강조한 글이다. 이에 이충진 교수가 다시 반박문을 보내왔다. 이 교수는 “논문의 이해와 평가를 위해 연구 목적에 주목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올바른 학자의 태도가 아니다”라고 비판하며 사회가 합의한 금기와 학술 사이 관계설정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논쟁을 이어가며 이 교수의 글을 공개한다.

 

 

교수신문은 지난 7일 1069호 신문을 통해 윤지선 세종대 초빙교수의 해명과 반박을 담은 기고 글을 실었다.
교수신문은 지난 7일 1069호 신문을 통해 윤지선 세종대 초빙교수의 해명과 반박을 담은 기고 글을 공개했다.

 

지난주 발표된 윤지선의 글은 한 달 전의 내 글을 염두에 둔 것이 분명하다. 글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된 이름이 내 이름 하나뿐이니 말이다. 이 사안에 대해 또다시 글을 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 내 생각을 윤지선의 ‘답변’에 이어보도록 하겠다.

 

‘보이루’ 사과할 근거 없다? 동의하지 않는다

 

‘보이루’와 관련된 각주는 2021년 3월 수정되었다. 철학연구회는 수정의 이유를 “사실관계가 보다 분명하게 표현되도록 [만들기 위해]”라고 말했다. 이것은 ‘<수정 전>이 독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라는 점을 철학연구회가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수정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러한 오해 가능성은 특정 개인에게 피해를 초래할 가능성을 수반한다’라는 것을 철학연구회가 인정한 셈이기도 하다. 그러니 철학연구회는 자신의 불철저함과 비의도적∙가능적 가해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수정 전>과 관련되어 이야기할 만한 것은 이 정도이다.

<수정 후>에 관한 나의 생각을 윤지선은 논리적 오류라고 평가한다. 지난번 내 글에서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두 명제(① ‘보이루’는 보겸이 만들었다. 그리고/그런데 ② ‘보이루’는 여성혐오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로부터 세 번째 명제(그러므로 ③ 보겸은 여성혐오용어를 만들었다)로 진행하는 것이 사유의 자연스러운 진행이[다].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경험적 의미 이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①과 ②에서 ③을 결론으로 도출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그것은 전문 용어(“진정한 원인으로 잘못 추측하는 오류”)를 들이대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한 것은 논리적 사유가 아니라 일상적 사유였다. 가령 ‘보이루는 나쁜 말인데 그걸(=보이루) 보겸이 처음 만들었어’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보겸이 나쁜 말을 만들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자연적-일상적 사유 진행 아닌가?

중요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비논리적이되 실제로 일어나는 사유 진행이 보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또는 그런 피해가 실제로 일어난다면 청자(일반 대중)의 비논리성을 핑계 삼아 화자(철학연구회)의 불철저함이 면책될 수 없다.

“철학연구회가 공식적으로 유튜버 보겸에게 사과할 그 어떠한 근거나 이유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라는 윤지선의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보겸이 (‘보이루’가 아니라!) 나쁜 말을 만들었다’라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는 한 보겸이 입는(입을) 피해는 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윤지선은 보겸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아무 관심이 없다.

 

철학 연구의 특성에 대한 이해

 

나는 윤지선 논문의 결과(“디지털 성착취”, 지난번 글에서 이것을 나는 “성차별적 성인으로의 성장”이라고 표현했다)가 한국 남자 또는 한국 사회에 고유한 특성(“한국남성성”)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나의 생각을 윤지선은 “합당하지 않다”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은 개념론에서 시작하며, 그곳에서 다루는 주제 중의 하나는 종차(種差)이다. 하나의 유(類)개념에는 다수의 종(種)개념이 포함되며, 종차는 종개념들 사이의 상이성을 지칭한다(종차는 유개념과 종개념 사이의 관계에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종차는 하나의 종개념을 다른 모든 종개념과 구별되도록 만드는 기준이며 동시에 바로 그런 방식으로 하나의 종개념의 자기동일성을 구성한다.

이런 간단명료한 논리를 윤지선의 논의에 적용해보자. ‘남자’는 유개념이며 ‘한국 남자’, ‘미국 남자’, ‘일본 남자’ 등은 이 유개념에 속하는 상이한 종개념이다. 한국 남자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종차는 한국 남자와 비(非)-한국남자를 구분하는 기준이며 동시에 한국 남자의 고유성을 구성∙지칭한다.

윤지선의 논문에서 종차의 위상을 가진 것은 한국남성성이며 그 내용은 디지털 성착취이다. 따라서 디지털 성착취는 모든 남자에게 등장하는 것은 아니어야 하며 동시에 비-한국남자에게서 등장하는 것도 아니어야 한다. 이러한 점은 (전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입증되어야 할 사안이며,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비교 연구(① ‘디지털 성착취는 한국남자에서 발견되며 동시에 ② 모든/대부분 비-한국남자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연구)뿐이다. 윤지선의 논문에선 그런 연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윤지선은 특정한 집단(한국 남성)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했으므로 연구의 결과(디지털 성착취) 역시 특정함(특수성, 고유성)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경험과학적 연구라면 몰라도 철학적 연구에는 어울릴 수 없는 생각이다. 철학자에겐 그런 편리함이 허용되지 않는다.

철학과 1학년 학생은 누구나 논리학 강의를 듣는다. 훌륭한 논리적 사고력을 가진 학생이어도 반드시 논리학을 수강하게 되어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철학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논리적 사고 능력 이상의 것, 즉 인간 사유의 본성(논리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전문 철학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혐오 용어에 대한 판별은 이론이 아닌 사회의 몫

 

지난번 글에서 나는 ‘윤지선의 논문은 혐오 논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윤지선은 여러 이유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논문은 “한국남성[성] 전체에 관한 남성혐오 논문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주장은 ‘자신의 논문은 그녀가 ‘관음충’ 또는 ‘한남충’이라 부르는 일부 한국남자에 관한 혐오 논문이다’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윤지선은 성착취 가해자를 ‘벌레’로 명명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일기장이나 술집에서라면 모를까 학술논문이나 신문 지상에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공적인 언어로서의 ‘벌레’를 우리는 누구에게도 붙여선 안 된다.

혐오 문제와 관련해선 중요한 부분은 따로 있다. 지난번 글에서 내가 가장 주목했던 것이기도 하다. 이 마지막 사안을 이야기하도록 하자.

‘한남유충’, ‘한남충’, ‘관음충’ 등은 혐오 용어이다. 그건 윤지선 자신도 인정하고 있으며 법원의 판단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혐오 용어를 학술논문에서 사용하는 것이 허용되는 특수한 조건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이다. 이에 대한 윤지선의 대답은 대략 개념적 도구, 전략적 효과, 유효한 방식 등이다.

이와 관련된 서술을 윤지선은 자신의 논문을 ‘복붙’(CtrlC+CtrlV)하여 작성했으니, 나 역시 수고로움을 피해 가도 괜찮을 듯하다. 지난번 글에서 내가 한 말은 아래와 같다.

 

모든 사회는 명시적-비명시적 금기를 가지고 있으며, 이 금기를 넘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학문적으로도 금지되[어 있다]. (...) 그[윤지선]의 용어 사용과 그의 전제 선택과 그의 논의 과정 및 결론은 ‘지금 여기’ 사회의 금기를 한참 벗어난다.

 

 

'지금 여기'의 많은 사람들은 윤지선 및 3인의 심사위원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윤지선의 논문은 혐오 논문이며 학술지에 발표되어서는 안 되는 논문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 한국 학술지에서 혐오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허용되는가? 이 물음에 답하는 방법은 (한국 학자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경험적 조사뿐이다. 찾아야 할 대답은 이론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적 판단의 대상이란 말이다.

만일 학회구성원들은 허용하는데 사회구성원이 허용하지 않는다면 학자들은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논의 전개의 효율성을 위해 혐오 용어를 사용한 학자는 그것의 사회적 결과와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공적 조직체인 학회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금기를 벗어나는 논문을 학술지에 실은 학회는 그에 대한 (학문적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

나는 ‘윤지선의 논문이 학술지에 발표된 것은 2021년 한국 사회의 금기를 벗어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런 내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철학연구회가 “윤지선의 논문[은] 혐오 논문에 해당하지 않거나 아니면 혐오 논문임에도 학술지에 발표될 수 있다”라고 공식적으로 말하면 될 일이다.

이 사안과 관련해서 윤지선이 하는 이야기를 나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다. 혐오 용어의 사용이 효과적 수단이기 때문에 ‘한남유충’, ‘한남충’, ‘관음충’ 등의 용어 사용이 허용된다고? 그렇다면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허용한다는 말인가? 더욱이 그 목적이 학문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그것의 선함이 입증조차 되지 않았는데도?

 

학문 외적인 목적을 학문적 평가와 연계시키지 말라

 

논문의 목적은 논자가 논문 안에서 명시적으로 표기할 대상이지 독자가 행간을 뒤져서 읽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학술적 목적인 한 그렇다. 모든 학술논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체이며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비학술적 목적이 논문 안에 명기되어 있는 경우 논문 심사자가 그것에 주목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것이 비학술적인 것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논문의 이해와 평가를 위해 연구 목적에 주목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마치 시험을 망친 학생이 밤새워 열심히 공부했으니 좋은 학점을 달라고 조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물며 자신 논문의 “시대적 의미”를 찾을 것을 비판적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학생조차 하지 않는 일이다. 학문의 장(場)을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학문 외적인 목적을 학문적 평가와 연계시키는 것은 학자의 세계에서는 결코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어느 학자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연구 결과를 평가 받으려 하지 않는다.

철학자는 ‘진리의 왕국의 시민’이다. 진리를 찾는 것, 그것이 철학자와 철학회가 ‘철학의 외부’와 관계 맺는 유일한 방식이다. 내가 아는 한 그것만이 철학이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유일한 방식이기도 하다.

 

 

이충진 한성대 교양학부 교수

독일 마부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칸트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행복 철학』(2020), 『세월호는 우리에게 무엇인가』(2015), 『이성과 권리』(2000) 등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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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 2021-07-06 20:35:28
과분하게 좋아요를 많이 받았네요. 오늘자로 행정부발 공문을 통해 해당 논문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현 교육부 장관 임명 전 청문회 녹취를 첨부하여, 주의와 경고의 의미로 배포된 공문이더군요

윤지선씨 철학의 근본은 자기 반성이라고 하는데, 자신이 한 말 부터 되돌아 보십시오. '박사'라며 타인의 비판을 '비전공자'나 '철학 석사'로 깔보고 '철학연구회'나 '프랑스에서 유학', 당시 회장이나 편집위원장인 이남인 정원섭 등의 '학계 원로'가 인정한 논문이라고 권위에 호소하셨죠? 트위터나 SNS, 한국 여성정책연구원의 권위를 이야기하셨죠?

'교육부 장관', '국회의원', '공공기관 공문'의 권위에 권위 운운하던 당신은 왜 납득을 못합니까? 본인이 그렇게 잘났나요?

김인철 2021-06-23 01:32:11
여혐이니 남혐이니 이전에 학술적 가치를 논하기도 부끄러운 학생이 제대로 된 학자에게 이렇게 조언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윤지선 선생이 참으로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드네요. 유럽에서 공부한 쌤들이 도피형 유학이라는 수군거림을 들을때마다 얼마나 속상한지요.

주변에서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당사자에게 이야기하고 짚어주기 힘든게 이런 냉정한 학적 비평이자 평가인데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도 필요한 것이 이충진 선생님과 같은 빨간펜 선생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윤지선씨도 정치적 흑백논리가 아닌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다음에는 논란이 아니라 실력으로 학자로 인정받기를 기대합니다.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라는 말을 되새기고 가는 것이 어떨지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