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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정체성·전통 위기 직면한 중동, 변화는 시작됐다
[글로컬 오디세이] 정체성·전통 위기 직면한 중동, 변화는 시작됐다
  • 정진한
  • 승인 2024.03.19 16: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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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정진한 한국외대 아랍어과 강사

한국이 인류사에 전례 없는 저출생 위기와 이민자 수용 확대 문제로 고민에 빠진 오늘날, 의외로 한국 못지않게 인구 문제로 진퇴양난에 빠진 지역이 바로 중동 최고 부자 나라들의 모임, GCC(걸프협력기구)이다. 일부다처제와 높은 출산율·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등에 힘입어 이 고민에서 가장 멀 것 같은 이곳은 사실 민주주의와 국가 정체성의 유지·민족과 종교 문제가 인구 관리와 직접 얽혀 있기에 실질적으로는 한국보다 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사실 일부다처 가정은 거의 희박하고 인구 기여도 역시 극히 낮다. 또한, 반세기 전 거의 8명에 이르던 출산율 역시 최근 국가별 편차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거의 자연 감소 수준으로 수렴 중이다.

이곳에서 인구 감소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인구 비율로 인한 정체성의 위기이다. 걸프 지역은 이미 총인구의 절반 이하만 자국민이며,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의 경우에는 인구의 무려 90% 가량이 외국인이다. 심지어 이들 대부분은 아랍인이 아닌 남아시아 계통이기에 걸프인은 커녕 아랍인 전체를 합쳐도 소수에 불과하다. 때문에 이곳을 외국인들은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 전반에서 좋게 말하면 코즈모폴리탄이라는 모호한 실체를 절감한다.

두바이의 랜드마크인 828미터의 고층빌딩인 부르즈 할리파에서 두 명의 남아시아 블루칼라 노동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사 이래 최전성기를 맞고 있는 걸프국가는 국가 정체성의 희석과 전통 사회의 반발이라는 문제를 겪고 있다.  이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응전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위키피디아
두바이의 랜드마크인 828미터의 고층빌딩인 부르즈 할리파에서 두 명의 남아시아 블루칼라 노동자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유사 이래 최전성기를 맞고 있는 걸프국가는 국가 정체성의 희석과 전통 사회의 반발이라는 문제를 겪고 있다. 이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응전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사진=위키피디아

이 독특한 인구구조는 어쩌면 필요불가결한 두 가지 조치, 이주민에 대한 체류 자격 제한과 민주주의의 제약을 파생시켰다. 걸프 국가들은 가급적 이주민들이 정해진 기간 동안 노동을 한 후에는 자국으로 돌아가도록 제도화했고 임금은 자국민 보다 극히 낮지만 각종 복지에서 제외하는 정책을 써왔다. 대표적으로 결혼만 하면 자국민에게 무상이나 장기 저리로 주택을 제공하는 혜택을 외국인과 결혼한 가정은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점차 이런 경향이 변하고 있다. 과거 원유를 캐고 도시와 인프라를 건설하는데 집중하던 시기에는 저임금 노동자를 유치하고 이를 관리할 소수의 외국인 엘리트를 고용하는 것만으로 국가의 노동수요를 충족할 수 있었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걸프 국가들은 이제 탈석유 산업으로 구조를 개편하면서 최첨단 산업을 개발하고 이를 운용할 세계적 인재들을 유치해야 한다. 때문에 관광·금융·의료·유통·물류와 같이 거의 동일한 산업 분야를 놓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이웃의 경쟁국보다 더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해 외국 출신 고급 인재를 모시기 위해 기존의 관례와 제약들을 풀어야만 하는 어려움에 빠졌다.

이 과정은 국가 정체성의 희석과 전통 사회의 반발이라는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두바이를 배우자는 열풍이 한국에서도 불 정도로 규제 혁파의 대명사가 된 두바이와 이를 벤치마킹 중인 걸프 국가들은 점차 아랍과 이슬람이라는 기존의 익숙한 가치를 유연화하고 있다. 두바이를 비롯한 7개의 토후국으로 구성된 아랍에미리트 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토후국들에 속하는 라스 알 카이마는 이슬람에서 엄금하기에 두바이조차도 여태 시도하지 못한 카지노의 개설을 최근 준비 중이다.

이슬람 금주의 대명사 사우디는 올해 술의 반입과 음주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겠다고 선언해 세계를 놀래켰다. 이런 파격은 당연히 전통 가치를 존중하는 현지인들의 분노와 우려를 자극해 이 지역 최고의 경쟁력 중 하나인 정치적 안정성을 위해를 가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더 과제는 민주화의 점진적 실현이다. 기형적 인구구조에도 불구하고 걸프 국가들이 급성장을 달성한 비결에는 역설적이게도 제한적 민주주의가 있다. 아랍에미리트 정부 홈페이지에는 연간 계획부터 2천117년까지 국가 발전의 청사진이 게시돼 있다. 이처럼 장기 계획 설립과 안정적 추진을 통해 효율적이고 견고한 산업화와 중진화를 견인한 리더는 헌법으로 보장된 세습 왕들이다. 하지만 아랍에미리트 전임 국왕의 고문인 압둘 칼리끄 교수를 위시한 다수의 걸프 지역 브레인은 대한민국과 같은 선진화의 완성에 산업화를 후속하는 민주주의의 도입이 필요하고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부작용의 최소화이다. 장차 민주 사회를 경험한 자국민이 늘어나고 체류 자격의 향상과 함께 발언권이 올라간 외국인들이 가세하면 이곳에서도 민주화의 추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일부 걸프국이 의회를 비롯한 몇몇 민주주의 장치를 도입한 사례가 있지만 아직 왕실의 입김에 취약한 부분적 실험 단계를 맴돈다. 애초에 민주주의를 헌법에 담고 출발한 대한민국과 달리 이들 왕정국가들이 유럽처럼 입헌 군주국으로 가는 길은 고통을 동반할 우려가 더 크다.

제정일치 사회의 종신 통치자 칼리파를 이상적 모델로 삼는 이슬람과, 부족들의 연맹체를 구성하는 각 부족 수장에게 전권을 수여하는 아랍의 전통을 긍정하는 국민들에게 민주정은 거북할 수 있다. 유사 이래 최전성기를 맞고 있는 걸프 국가가 이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응전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다.

 

정진한 한국외대 아랍어과 강사

요르단대와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대학(SOAS)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문명교류사와 중동학을 전공했고 한국외대와 서울대 등에서 관련 강의를 했다. 「이슬람 세계관 속 신라의 역사: 알 마스우디의 창세기부터 각 민족의 기원을 중심으로」 등 논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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