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0:10 (토)
스마트폰의 역습, 데이터 바이러스에 격리된 세계
스마트폰의 역습, 데이터 바이러스에 격리된 세계
  • 김흥현
  • 승인 2023.09.22 1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으로 책 너머를 읽다_『정보의 지배: 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한병철 지음 |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106쪽

‘인포크라시’ 데이터 시대 관계론적 인간의 회복
인간 위기의 극복·진실을 향한 용기의 실천 요청

책의 전제, 앤데믹과 인포크라시의 공격 시대 

전염병의 시대다. 코로나 19에 이어진 앤데믹(endemic)과 인포데믹(Infodemic)의 세계다. 앤데믹이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면 인포데믹은 ‘데이타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대이다. 앤데믹은 보이는 유해 질병이 잠입한 것인 반면, 인포데믹은 보이지 않게 삶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두 바이러스는 모두 생활세계를 전방위적으로 침식한다. 삶을 안팎에서 총체적(holistic)으로 위협한다. 

그런데 이 치명적 전염병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대조적이다. 앤데믹은 누구에게나 혐오, 배척, 탈출의 대상이다. 거리 두기와 비대면, 마스크 쓰기라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그것을 참아냈다. 그러나 정보 바이러스에 의한 인포데믹은 남녀노소 누구나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 친밀감을 느끼고, 경계하지 않으며, 더 많은 소유를 희망한다. 데이터는 바이러스라기보다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유익한 재료다. 데이터가 만들어주는 이미지의 가상현실 속에서 평안함을 만끽한다.  

실제로 지난 3년간 이 세계는 이 대조적 세계를 직접 경험해왔다. 지금도 앤데믹은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세계의 생명에 치명상을 입힐 위험성은 여전하다. 완전히 퇴멸시켜야 한다는 공론이 들끓고 퇴치할 수 있는 신약개발에 열을 올렸지만 쉽지 않다. 반면에 인포데믹은 삶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임에도 불구하고 약 30년 간 인류에게 생명을 고양하는 치명적 즐거움을 공급했다는 데 의의가 없다.

갈수록 더욱 누려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진다. 데이터 바이러스는 많을수록 행복하고, 할 수 있다면 무한으로 소유해야 한다는 욕구가 오히려 자랑스럽다. 이렇게 세계는 앤데믹엔 철저히 냉정하나 인포데믹엔 완전히 온화하다. 앤데믹은 박멸, 응징하는 시대이면서 인포데믹은 수용, 환호한다. 어쩌면 모순의 시대다. 

책의 서술 특징, 데이터 지배 사회 진단서이자 인간보고서 

재독한인철학자 한병철(철학, 전 독일 베를린예술대학)은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데이타(정보) 지배 사회’를 사회철학적으로 분석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 시대의 통치 제왕은 스마트폰이다. 그것은 인간 사회를 통치하는 제왕 바이러스이며, 시민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보이지 않는 무력이다. 한병철은 이런 시대를 ‘인포크라시(Infokratie)’라는 자신의 신조어로 명명한다.

이 용어는 이 세계가 데이터 바이러스에 감염된 시대이며, 합리성 부재의 세계라는 것을 함의한다. 또한 인포크라시는 정보체제에 의해 생활세계의 디지털화가 정치 분야에 영향을 미쳐 형성된 민주주의(27쪽)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그의 주장은 데이터 바리러스에 의해 인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순간에 고유한 자유를 소실한 채, 정보 감옥의 시대에 스스로 갇혔다는 것이다.

이 책은 2021년 독일에서 먼저 출판된 후 2023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다(전병호 역). 번역본의 제목은 『정보의 지배-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다. 그런데 이 제목은 오히려 원서가 지향하는 방향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즉 인간 사회에 ‘과도하게 스며있는 디지털 문명, 그 정보의 지배 아래서 민주주의가 위기를 겪는다’는 한국 정치 정황을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특히 번역본의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에서 암시하듯 이 책은 인포크라시의 구체적 현상과 그것에 의한 민주주의 정치사회의 위기를 주목한다.

나아가 사회적 정의와 거짓이 판단 불가한 시대 상황에 ‘던져진’ 인간에 유의한다. 이처럼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우리 생활세계에 창궐하면서도 철저히 은폐되어 있던 데이터 바이러스를 표적으로 삼는다. 민주주의를 숙주 삼아 숨어있던 바이러스의 정체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배하는 왜곡된, 가상의 정치체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그리하여 이 은닉된 바이러스가 창출해낸 세계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는지를 비판한다.

이 책의 서술 특징은 바로 이 바이러스에 의한 세계의 전개 양상을 비판적으로 관찰한다. 우선 스마트 족의 등장이다. 그는 이 신인류의 정체성을 파악한다. 이 신인간류는 인간이면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또한 소속되고 싶어 하는 갈망의 대상이다. 저자는 그 이유도 제시한다. 인간은 이 발전된 문명에 자발적으로 순응하여 그 혜택을 최대한 하사받아 누리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석과 함께 저자는 고발하듯 비판한다. 그 데이터 바이러스는 결국 삶의 활력 비타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치명적 전염병의 병원균으로 잠복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바이러스에 의해 세계 양상은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전개된다. 즉 인간은 그 바이러스를 인지하면서도 자기 욕망 때문에 데이터 사회를 너그럽게 허용한다. 그 결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정치적 장치가 소실되어버렸다. 가짜가 ‘진실스럽게’ 펼쳐지는 왜곡된 사회가 된 것이다. 저자의 특장(特長)은 바로 이 점을 적확하게 ‘진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정치사회 질병 진단서이다. 또한, 이 질병 사회에서 삶의 자리가 변질한 것을 버려둔 채 그저 적응해가려는 ‘인간의 변질’에 대한 관찰 보고서라 할 수 있다.

책의 서술기법과 주요 논지

책은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저자가 대주제를 다섯 개의 소단락으로 나눠 전개하는 방식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가면 저자의 주장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의 신개념인 ‘인포크라시’와 그의 정치사회 철학을 중심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제2장 인포크라시와 제5장 진실의 위기를 집중해서 읽는 것도 충분히 도움이 된다. 

이 책은 저자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 분랑이 길지 않다. 그의 대표적인 책들은 지난 2012년 한국에서 번역되어 소개된 『피로사회』(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4년 『투명사회』(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등이다. 하지만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이고 거시적인 ‘담론’을 효과적으로 담아 낸다. 이런 서술이 가능한 것은 저자가 문학적 기법을 적절하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글을 서술하면서 사이사이에 개념을 정제하여 정리한다. 그와 함께 앞선 내용을 함축하고 갈무리하면서 다음 문단으로 이어가는 수사학적 배치를 애용한다.

이와 함께 그가 시도하는 대표적인 서술 기법은 다음과 같다. 즉, 개념의 대조, 대상의 상호 대구, 은유, 언어의 응축, 전환접속사의 생략(한편, 그런데, 이런 점에서 등등), 주제어의 반복 등이다. 특히 이것은 그의 책들이 그의 기본적인 철학에 공통으로 기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책과 책 사이에서도 동일 주장이 빈번하다. 

이처럼 문학적 기법에 근거한 함축적 서술과 단순화는 이 책의 장점이다. 그가 거시적 담론을 제시한다해도 독자는 그의 주장을 어렵지 않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이 점은 어떤 경우에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비록 책을 가볍게 펼친다해도 이 단순한 전개 속에 무수히 창출되는 새로운 개념들과 또 다른 개념들이 계속 연관되기 때문이다. 자칫 그 개념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놓쳐버릴 수가 있다.

그러나 당황할 필요는 없다. 그럴수록 천천히, 느릿하게 두 번 읽을 각오로 곱씹어 읽는다면 차츰 그의 개념과 주장이 명료화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속된 개념들의 관계를 메모하면서 읽는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헥 이어지는 다음 개념을 따라 축적하듯 읽어가는 것이 적절하다. 이렇게 그의 책은 느리게 읽을 때 유익하다. 

본서에서 주장하는 저자의 핵심 논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정보지배 시대가 무의식적으로 인간을 내적, 외적으로 위협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인간답게 자유로울 수 있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에게 밀려온 상황에 대해 비판적 생각하기만으로도 충분히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인식’과 ‘자유’다. 이 두 단어에 근거하면, 그의 주장은 ‘인식’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힘으로 작동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 점은 책 출간 후 출판사 「김영사」와 나눈 인터뷰(2023. 3. 9)에 그의 이 주장에서 좀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Q. 디지털 시대에 이를 뚫고 인류는 어떻게 진보할까요.

A. 생각해야 합니다. 정보는 삶을 파편화하고, 모든 것을 순간 속에 사라지게 합니다. 정보는 무의식중에 우리 삶을, 지각을, 인식 형태를 바꿉니다. 의식하지 못한 채 변화 속에 빨려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해방시키는 자유를 향한 첫 단계입니다. 인식하면 해방이고, 인식하면 교정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냉철한 철학적 인식이 있을 때, 인간을 무의식적 바이러스로부터 해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이터는 인간에게 득인가, 독인가? 이미지=픽사베이


책의 서사적 전진과 핵심 주제로서 인포크라시의 시대를 살아가는 철학의 용기 

본서를 구성하는 다섯 장에서는 일관된 서사적 전진도 엿보인다. 먼저 오늘날을 정보체제 시대 즉 인포크라시로 규정한다(1장). 이 체제에서는 ‘투명성’을 강조한다. 투명하다는 것은 정보 앞에 모든 것이 노출되었다는 의미다. 중요한 것은 투명성이 새로운 감시체제라는 것이다. 이 정보가 주도하는 시대는 ‘인포크라시’라는 정치체제를 파생한다.

이 인포크라시는 ‘정보에 의한 생활세계의 디지털화가 정치 분야에 영향을 미쳐 형성된 민주주의’(27쪽)다. 이 체제에서는 ‘밈(Meme, 모방 가능한 문화요소)’이 핵심 역할을 한다. 모방으로부터 ‘인터넷 바이러스’가 생성되고 확산한다. 이 바이러스는 담론과 진실과 무관하다. 파편화된 지식과 가짜진실로 인간의 삶에 파고든다. 인포데믹(Infodemic)이 창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인포데믹의 특징이다. 대표적인 것은 소통 행위가 왜곡되는 것이다(2장). 디지털 실시간 민주주의(Digital realtime Democracy)가 초래하는 당연한 폐해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실상이 아니라 환상이다. 민주주의가 현실로부터 이탈되어 탈정치화되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이런 탈정치시대로 대중 참여를 끌어들이는 기제다. 또한, 스마트폰 정치는 알고리즘에 의해서만 주도된다. 스마트폰 정치에서는 담론이 설 자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로써 ‘함께’ 존재해야 하는 태초의 인간 이해와 대립한다.

또한, 이 새로운 종족은 정보체제의 보호 아래서 자기 세계를 배타적으로 영원히 구축하려는데 몰두한다. 그리하여 유한한 인간, 필연적으로 죽음에 직면할 인간의 본질을 스스로 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소통의 핵심은 ‘타자의 존재’다. 그 ‘타자 있음’으로 정치는 담론을 형성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담론은 나와 ‘타자’가 소통하여 창출해낸 긍정적인 결과에서 파생한다.

다음으로 소통적 합리성이 사라지는 현상이 일어난다. 민주주의 담론의 특징은 소통적 합리성이다(3장). 하지만 인포데믹에서는 담론 형성이 불가능해진다. 타자를 배척하기 때문이다. 자기 정보에만 의존하는 스마트종족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종족의 탄생은 사회가 파열되는 근원을 제공한다. 그들은 서로 화해할 수 없는, 타자성 없는 정체성들로만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담론 대신 정체성 전쟁에 몰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상이기에 결국 ‘생활세계’를 와해하고, 공통감각을 잃는다. 이 상실은 ‘경청’의 부재로 이어진다. 이 경청은 하나의 담론을 확립하는 민주주의의 기본태도다. 민주주의는 경청자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없는 소통은 경청의 정치를 파괴한다. 따라서 저자는 스마트 종족에게는 경청 대신 디지털 합리성만이 존재한다고 분석한다. 

이제 다음 단계는 디지털 합리성이 도래한다. 이것은 소통 없이, 담론 없이 존속하는 인터넷상의 합리성이다(4장).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담론적 기능을 담당하는 장으로 등장한다. 이들은 소통과 공론을 기능적으로 대체하는 것들이다. 이제 담론은 ‘데이터’로 대체된다. 또한,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더 잘 경청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는 인공지능의 경청이 계산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논증의 자리에 알고리즘이 들어선다.

우리가 알듯이, 민주주의 논증은 타인과 담론을 형성하고 서로 소통하는 비판 과정을 거쳐 개선된다. 하지만 알고리즘에 의한 논증은 기계적 과정을 거치며 자기 개선 정도에 그친다. 기계 학습이 논증과 검증을 대체한 것이다. 따라서 데이터주의(data-ism) 세계에는 합리적으로 행위를 하는 개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타당성을 제기하고 논증으로 옹호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담론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지막 단계는 디지털 합리성이 초래한 ‘진실의 위기’ 현상이다(5장). 새로운 허무주의다. 정보사회의 병적 현상이다. 또한 진실의 뒤틀림으로서 허무주의다. 이 새로운 허무주의는 진실과 거짓말의 구별 자체가 모호해지고 심하면 제거된 상황에서 파생한다. 신조어 ‘진실스러움’(truthiness. 2005년)은 객관성, 사실적인 것의 확고함을 완전히 결여한 상황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느껴진 진실’이다. 진실은 완고함과 끈질김이 특징이다.

하지만, 디지털 질서에서는 그 진실에 담긴 사실성을 제거하여 존재의 굳건함과 끈질김을 해체한다. 이제 정보는 ‘공허한 투명함’으로 전락한다. 반면에 진실은 약속이다. ‘나는 길이요, 진실이요 생명이다(참고. 신약성경 요 14:6)’라는 명제와 같다. 진실은 이야기로 드러난다. 하지만 정보사회에서 이야기는 정보들로 파멸하고 파편화된다. 데이터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새로운 허무주의는 프리드리히 W.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의 가치 허무주의와도 다르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진실은 인간의 공동생활에 실존적 토대를 제공한다. ‘진실을 향한 추동은 실재 세계와 거짓 세계의 치밀한 관찰에서 비롯된다. 진실과 거짓 사이가 얼마나 상반되는지 주목하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관습적 진실이 무조건 유효하지 않을 때, 인간 삶의 모든 것이 불확실할 때, 그것을 정치하게 관찰하는 것에서 진실을 향한 열정은 시작된다. 언어를 사용하여 비(非)실재에 대하여 논증한다. 이처럼 진실은 사회의 전면적 분열을 막는 가치를 창출한다. 온전한 사회는 진실을 향한 충동을 발전시킨다. 진실은 사회적 규제, 사회의 규제적 이념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참된 민주주의는 ‘파레시아(parrhesia, 미셀 푸코의 용어)’를 유지한다. 이것은 ‘참되게 말하기’이고, 진실을 말하는 용기이며, 자유로서 공동체 실현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감한 파레시아는 탁월한 정치적 행위다. 플라톤(Plato)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자유와 솔직함으로 가득 찬 국가다. 그런 점에서 한병철의 관점에서 철학은 참되게 말하기이고, 철학자는 오늘의 진실을 참되게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진실을 위한 염려로서 오늘을 위한 염려는 결국 미래를 향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체주의 국가에서 참되게 말하기는 혁명 활동이다. 따라서 파레시아를 실행하는 사람의 핵심은 진실을 말할 용기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에 진실은 파열하여 정보 먼지가 되고, 그 먼지는 디지털 바람에 날려 흩어진다. 

요약하면, 한병철이 이 책에서 논의한 핵심 주제는 두 가지다. 첫째, 진실의 투명성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투명성은 치열한 담론 끝에 도달한다. 투명한 세계는 거친 토론과 이야기의 축적으로 함께 도달하는 공통 세계라는 것이다. 둘째, 인포크라시 시대의 인간 이해다. 이 세계에서 ‘나(我)’는 ‘타자 있음’으로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구축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타자의 배제와 경청하지 않음은 결국 ‘나’라는 인간의 존재감을 상실하는 치명적 바이러스다. 스마트종족의 출현은 ‘타자 있음’을 배척한 세계를 대변한다. 이는 ‘함께’ 존재함으로써 인간의 가치를 구현하는 태초의 인간 이해와 대립한다. 이처럼 역설적이지만 스마트 족은 유한한 인간, 필연적으로 죽음에 직면하는 인간의 본질을 스스로 망각한 상태에서 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병철의 주장은 오늘날 민주주의가 진실과 거짓이 뒤섞였다는 현실 인식을 반영하며 동시에 이 시대에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특히, 신을 따르는 인간)은 고착된 진리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는 인간 이해를 천착한다. 이러한 뒤엉킨 현실에서 인간은 진실을 분별하고 타인과 함께 그 진실을 철학 하며 실행하는 용기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그것이 가능할지 반복질문한다. 

스마트폰은 인류를 구원할 것인가, 지배할 것인가. 이미지=픽사베이

책의 성과,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인간성의 반성과 회복

이 책은 한병철의 이전 글들, 즉 『피로사회』, 『투명사회』, 『권력이란 무엇인가』(김남시 역, 문학과 지성사, 2011) 등과 대체로 비슷한 주제가 연동된다. 그의 공통된 주장은 인간에 대한 우리 시대에 ‘인간’에 대한 관점을 재조명하려는 것이다. 그의 인간 이해는 성과 중심과 정보지배라는 힘에 먼지처럼 쓸어간 ‘인간성’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인간성 중에서 특히 ‘진실추구 용기’가 두드러진다. 이것이 인간성의 초핵심이다. 오늘날 인포크라시에서 인간은 ‘진실스러움’에 스스로 투항함으로써 이 용기를 소멸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참과 거짓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며 진리를 향해 전진하는 태초의 본모습을 상실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책은 인포크라시 시대에 태초의 인간성 회복과 유지를 위한 분투를 권고한다. 개별적이고 구체적 실천 대안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긴 했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에서만이라도 그 용기가 발현되길 희구한다. 또한, 인간의 생활세계 안에서 형성된 정교한 교리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한 신념을 타인 앞에 담론으로 내어놓고 상호비판적으로 철학 해 보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수없이 쏟아내는 말과 글들을 통해 우리 시대 인간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함께 토론하고 논의하는 맥락에 잘 놓아보자고 권유한다. 

그런데 한병철이 진실과 거짓이 뒤엉킨 현실 속에서 타인과 공존하는 인간 이해를 주장한 것은 비단 앤데믹 이후에만 드러난 새로운 철학적 사고는 아니다.  문학에서도 이런 주장은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소설가 구효서의 『악당 임꺽정』(서울:해냄, 2000)도 이런 사회의식을 충분히 반영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의적으로 이미지가 굳어진 임꺽정을 의도적으로 탈색시킨다. 그는 의적이 아니라 악당이라고 비판하며 해체한다. 소설의 에필로그는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옳고 그름이 세상을 어지럽게는 할 수 있을망정 사람의 마음까지는 마침내 속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시비 공론은 한때의 이런저런 사정에 따라 막힐 수는 있겠지만 하늘의 이치는 결코 명멸하지 않는 법. 현란한 시비는 반드시 후세를 기다려 정해지고 두절된 공론은 반드시 후세를 기다려 행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로부터 간흉의 극악함이 세도를 잡고 살륙의 위엄을 빌려서 천하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충성되고 어진 자들을 대악으로 몰아 마침내 불측한 화를 빚어왔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해 비록 당장에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옳고 그름이 판가름 나고 공평한 논의가 크게 일어나는 법이다. 섣부르게 속지 말라는 것이다. 앞날에 대한 허망한 꾐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이쪽의 것이든, 저쪽의 것이든, 기만적인 대의명분 따위에는 속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행악이 가능하게끔 비겁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나의 불행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2권, 284쪽)

이 주장은 임꺽정의 충복이었으나 변절한 서림의 입을 빌려 작가가 재구성한 진술이다. 서림의 이 마지막 고백을 통해 구효서는 벽초 홍명희에 의해 독자들의 상상 속에 교리처럼 굳어진 의적 이미지가 거짓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이 서술의 ‘진실스러움’도 부정할 수 없다. 작가가 재구성한 ‘임꺽정’과 홍명희의 ‘임꺽정’은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 존재여야만 하는지 진중하게 토론하지 않기 때문이다. 임꺽정에 대해 옳고 그름의 판단은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임꺽정에 대한 사건 정보의 투명함, 인물에 대한 사실성에 대한 정치한 관찰이 더욱 필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가 나타나게 된 사회와 정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의 배경에 대한 투명함도 요구되기 때문이다. 한병철의 주장에 근거한다면, 그가 의로운 도적이라는 것이 소설이나 현실에서 진실이 되려면, 민중들의 집요한 토론과 관찰이 수반되어 사회적, 정치적 담론이 되어야만 한다. 그 담론에 의한 소통이 상호 작용할 때 그가 의적인지, 악당인지 판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과 악이 뒤섞인 세계에서 진실 판단은 진실을 향한 열정을 가진 독자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따라서 이 책의 성과는 다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앤데믹과 인공지능의 시대에 대해 기계 문명적, 기술적 접근이 아니라 철학적, 사회 관계적 인간 이해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둘째, 스마트 족이라는 신인류의 정체성을 비판적으로 재인식하여 진실과 가짜를 구별해야 할 책임이 모든 인간에게 있음을 경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성과는 진실을 말하는 용기와 인간성의 반성과 회복으로 수렴한다.

실천적 대안, 인포크라시를 살아가는 진리에 의한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로서 진리 말하기와 타인 경청하기 

이런 맥락에서 이 책에 대한 실천적 대안의 한 예는 오늘날 ‘교회’라는 공동체에 되물을 수 있다. 사회적 기구로서 교회는 철저한 자기 부인(否認)을 통해 삶의 방식, 생활세계를 각성하는 것을 윤리적 행동방식으로 수용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교회 역시 경제와 정보의 지배에 갇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불행히도 교회 안에서 ‘진리’는 그 기능을 점차 상실해가는 중이다.

그러나 그 상실은 완전한 소멸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는 그 태생적 본성상 어딘가에 진리의 씨앗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맹아는 교리화된, 보수화된 ‘교회 종족’을 교회 스스로 해체 시킬 때 땅을 뚫고 발아할 것이다. 사회 관계적 공동체성에 의한 교회의 자기 정체성이 회복될 때 교회의 생존 담론은 활성화될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에 정치사회 영역도 마찬가지다. 이 영역은 옳은 ‘말’을 생명으로 삼는다. 그 말이 놓인 생활세계 맥락이 옳아야만 그 말들은 빛을 발한다. ‘자유’와 ‘공정’을 주창하는 정치가는 스스로 자신의 자유와 공정을 되묻고 그 선악을 판단 받아야 한다. 언론가와 종교가와 문학가도 마찬가지다. 가짜 뉴스로 점철된 정보지배로부터 군중을 안전하게 보호할 책임을 각성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이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유다. 온전한 민주주의에서 진리는 ‘타자 있음’을 인식하는 ‘관계성’이야말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전거이기 때문이다. 관계는 타인의 소리를 경청하는 개방과 수용의 삶의 방식이다. ‘가짜’라면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 

결론적으로 저자의 주장은 인포데믹의 시대에 이 말과 글에 근거한 지도자들의 삶의 방식을 반추하게 한다. 진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모든 이들을 위한 ‘타자 있음’의 열린 세계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고대 사회에서 보수와 비판의 지혜자로 등장했던 코헬렛(Qoheleth)처럼 총체적 삶으로 ‘나’의 시대를 반성한다. 무의식 중에 ‘정보의 지배’에 갇혀 스스로 감시를 받는 것도 모른 체 자신은 자유로운 듯 군중을 호도하지 않았는지 말이다.

 

 

김흥현 
한국성서학연구소 연구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