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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인간으로 함께 살다
시(詩)인간으로 함께 살다
  • 김흥현 숭실대 대학원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 승인 2017.04.26 2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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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학술에세이 우수상(요약)

“공존은 개인의 존재 근거가 되는 타자를 위한 환대와 배려이다. 이것은 경계와 상관없는 공간에서 공감을 토대로 실현된다. 이 공존을 통해 공동체성은 견고하게 성취된다. 공존의 명시적 행동이 공재다.”     

공간은 살아있다.  

공간은 움직인다. 시선이 소통되고, 감각이 공유되며, 의식이 자유롭게 변형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경계로 옛 공간은 멈춰버려도 변형한다. 그 옛 공간이 어느 날 나를 소환하면 낡은 서랍 속에 담긴 시선을 꺼내서 그 추억같은 사건 속을 응시하며 걸을 것이다.  

광장에는 사람이 산다.

나는 길을 걷는다. 이내, 시나브로 사방이 열려있는 곳, 광장으로 빨려 들어간다. 광장은 비어있음(空)이자, 사이(間)다. 광장은 비어있기에 위협적이며, 사이를 두고 있기에 낯설다. 그 곳에는 은닉된 긴장과 두려움이 있다. 동시에 타자(사물)사이에 삶을 호환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렇게 광장은 함께있음(共)이며 같이있음(存)이다. 

무엇보다도 광장에는 바람이 분다. 오늘 그 바람에게서 거칠고 뭉특한 냄새가 물씬하다.  애써 밀어내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바람이 가는 길을 따라 걸어보고 싶다. 바람이 앞서고 나는 뒤따른다. 그 바람 틈에 시인 유하가 남긴 시가 있다. 그는 콘크리트같고 기계같은 도시를 보여주었다. 도시는 웃음이 소비되지만 유일한 생산은 공허다. 거기서 바람은 전진하지 못한다. 나도 따라 멈춘다. 나는 출구를 찾았지만 길은 막혔다. 바람은 하릴없이 맴돈다. 그 거리 끝에 천막들이 위태롭게 서있다. 파란 하늘 아래 노란 천들과 모서리가 찢긴 하얀 막들이 일렬로 나부낀다. 바람에 슬픔과 아픔에 절인 시큼한 향이 일어난다. 폴 발레리의 시가 천막 사이에 새겨져있다: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이 시인은 생존방식으로 시를 택했다. 시는 선언이며, 잔인한 계절을 추념하는 타종이며 애가였다. 그 노래는 천개나 되는 바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 그렇게 노래는 별꽃이 된다. 그 꽃은 폐허가 된 숲에서도 낮은 땅 바닥에서 여린 몸으로 살아서 스스로 꽃바람이 되어 어둡고 높은 밤하늘에 올라 별처럼 수놓는 야생화다. 별꽃같은 노래가 이 삭막한 거리를 감싸고 있다. 따뜻하다.  

시(詩)인간은 공존한다.

광장 끝에 사람들이 산다. 그들은 이방인들이며 나그네다. 바다를 앞둔 땅 끝에서부터 걸어온 순례자들이다.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마음이 산산이 부서진 이’들이다. 

바람이 일어난다. 나도 뒤따른다. 무심한 광장을 지나 바람이 길을 건넌다. 그 곳에 고궁이 호젓하다. 궁은 존엄한 공간이다. 궁궐에서 건물들은 모두 의도적으로 배열된다. 그것들은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지만 긴밀한 동선 아래 연결돼 있다. 궁을 걸어본다. 옛 왕이 한적하게 가배를 마셨다는 고택 앞에 선다. 나는 그 날 향긋하게 피어올랐을 가배와 홍매화를 생각한다. 그리고 시인 마종기가 그려낸 「우화의 강」을 떠올린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서로 물길이 튼다.”(『마종기 시전집』, 문학과 지성사, 1999) 

애환이 서린 옛 집을 돌아 투박해진 작은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시인이 왜 「우화의 강」이라는 제목을 달았을까를 나에게 묻는다. 문득 이 시가 자기경험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는 나그네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오랜 세월 그는 고립된 영역에서 살았다. 랭던 길키가 남긴 『산둥수용소』가 겹쳐진다. 폐쇄공간에서 그 몸 안팎이 심각한 호흡곤란을 겪는다면, 그는 타자를 수용해야 하는 인간 본질을 상실하는 것이다.  

시간이 맴돌았던 궁을 빠져나왔다. 나는 다시 바람을 따라 걷는다. 가판대 위 아래에 모방된 표구로 정갈하게 진열된 시들이 있다. 문득 궁과 시는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담으로 둘러싸인 궁이 문을 통해 타인의 공간에 자유롭게 드나들 때 비로소 시처럼 살아있는 광장이 된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시는 태생적으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모방과 재현은 이데아를 현혹시킬 뿐이라고 시를 변방으로 밀어냈다. 하지만 시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오히려 이상이 담긴 현실이다. 도시에는 이 시가 필요하다. 도시는 시여야 한다. 시는 규칙을 가진 불확정성이다. 그러나 시는 다른 언어들이 공존하는 언어조형물이다. 

시(詩)인간은 공존재로 살아가다.  

바람이 나를 광장 끝으로 이끈다. 어느새 광장은 투쟁과 저항을 넘어 시인간들이 조물하는 대동세계이며 생명터전이 됐다. 천막 속에 손과 발을 쉼없이 움직여 타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전부터 광장을 메타-토포스로 인식하며 그 삶을 재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먼저 시인이다. 그들은 경계가 사라져도 유의미한 사건들이 남아있는 공간을 언어로써 창출했다. 다음으로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물질을 쟁취하려고 힘으로 경계를 초월하는 정치적 전쟁에 대항했다. 그들은 광장을 관계공간으로 재탄생시켜 그 곳을 타자를 위한 정의와 공의가 물처럼, 바람처럼 흐르는 정치사회공간을 제시했다. 그들은 물질소유가 초래하는 주도권 쟁탈전에 경각심을 가졌다. 
시인과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공감을 토대에 두고 있다. 이것은 마음으로 타자를 온전히 끌어안으려는 행위다. 이 공감이라는 터전에서 타자를 위한 윤리가 실제로 나타난다. 이 공존실현이 공재(共在, Co-Exist)다. 그것은 환대와 배려이며, 상호 프락시스이고, 자신을 반성하는 실천행위이다. 공재는 ‘같이 있다’는 의미다. 공존이 존재라면, 공재는 행동이다. 이 두 개념은 하나로 연관돼 있다. 그래서 공존과 공재는 분리할 수 없는 共存在다. 

시(詩)인간의 공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광장에 어둠이 내린다. 어둠 속에서 나는 공재가 난관에 부딪치는 이유를 생각한다. 그것은 ‘욕망/갈망하는 존재’라는 인간 본성과 ‘개인을 공동체로부터 이격’시키는 세계 본성 때문이다. 이것들은 사람들 사이에 경계를 만들어 그들 사이에 흘러야 할 시를 막아버린다. 그렇게 공존은 파괴된다. 공간 개폐권자들은 공동체성을 탈취한다. 그 결과 개인들은 에고이즘에 자신을 가둔다. 공존이 직면하는 가장 큰 적은 자기 욕구에 함몰된 개인이 광장을 분절시키고 폐쇄하는 것이다. 바람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악이다. 이것은 두 가지 영역에서 일어난다. 하나는 공권력을 개인이 갖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관용이 세계 안에서  자국이익으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스스로 욕망을 절제시키지 않고 타자를 대하는 관용은 오히려 이 세계공동체의 균열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시(詩)인간은 ‘안전 공간’으로 공재를 실현하다.   

세계는 아직 어둔 밤이다. 그러나 이 밤을 뚫고, 함성이 들린다. 그 소리들은 가늘지만 강력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렇게 공동체성은 확산되고 있다. 이제 자기 욕망을 타자를 위해 스스로 내려놓는 하향성을 유지하는 것만이 남았다.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희망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나를 넘어서 저 알 수 없는 세계 그 어느 변방에 사는 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를 자발적 고독으로 안내한다. 이것들은 작지만 큰 정치행위이다. 그리고 ‘안전 공간’(래티 M.러셀, 『공정한 환대』, 대한기독교서회, 2012)을 생각한다. 이곳은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며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는 소도이자 도피성이다. 생존을 위한 메타-토포스다. 그 곳에 내가 살고, 타자가 함께 있다. 공존은 너를 위한 것이지만 결국 나를 위한 배려이며 공재로 되돌아온다. 유의미한 안전지대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환대하기 위해 나를 철학하고 관조하는 여린 샬롬으로도 충분하다. 

 

수상소감

산 밑자락에 자리잡은 서재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습니다. 그 창은 산으로 이어져 창틀에 바깥 풍경이 오롯이 담깁니다. 이 곳은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이 맞물리면 체감이 달라지는 바람이 붑니다. 그러면 저 숲은 바다가 됩니다. 마음먹고 바람을 맞으려 숲 속을 걸을 때는 바다 모랫길에 있는 듯합니다. 波聲은 높고 가늘며 소리들은 어우러져 나무들 사이를 휘젓고 있습니다.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날아듭니다. 그러면 거친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새와 바람과 숲은 멈춰버린 풍경같습니다. 새가 말없이 날아가 빈자리가 되어도 여전합니다. 새가 남긴 흔적 때문입니다.     
바람이 눈에 보이던 날, ‘공존’을 글로 풀어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우연한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우연은 내가 즐겁게 감내할 수 있는 필연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여물게 뱉어내지 못해 수없이 수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내 삶이 올곧게 체득하지 못한 글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해 글을 다듬고 다듬어 미련 없이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은 기다림 끝에 치유같은 즐거운 소식을 받았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정말 좋았습니다. 
글이 기분좋게 되돌아 온 날에도 바다 끝에는 갇혀버린 세월과 광장이 여전히 어둡고, 구부러진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하여 이렇게 먼저 받은 배려와 환대는 이 ‘땅의 사람들’과 공존하는 밝은 세계를 위한 격려이자 위로입니다. 짧은 기간 글을 깨뜨려 다시 세워 준 파람, 영우, 광훈, 현수, 따뜻한 비평자이자 안내자 은숙과 선아선민, 그리고 졸고에 바람을 따라 생명을 불어넣어 좋은 흔적 하나를 돋을새김해 주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안에’서 영원, 평화의 벗으로 함께 하는 야훼에게도.

- 김흥현 숭실대 대학원 기독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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