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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5] 유령의 통치를 거부한 아나키스트, 렌조 노바토레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5] 유령의 통치를 거부한 아나키스트, 렌조 노바토레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4.04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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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레 리지에리 페라리
루이지 갈레아니
바쿠닌
빅토르 세르주
갈레아니가 1919년 6월 미국에서 추방된 뒤, 그의 추종자들은 월스트리트 폭파 사건을 일으켜 38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진=위키미디어

19세기말 이탈리아 아나키즘은 테러리즘으로 기울어졌고 많은 테러리스트들이 나타났다. 이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남부에서는 바쿠닌의 영향이 강했던 탓이다. 중앙 집행적 틀에서 인터내셔널에 대한 지지 기반을 구축한 마르크스와는 달리, 바쿠닌은 남부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자율적인 반란을 기반으로 한 행동에 대한 지지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1901년에서 1919년 사이에 미국에서 활동한 루이지 갈레아니(Luigi Galleani, 1861~1931)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은 아나키즘을 테러리즘으로 오해하게 했다. 1914년에서 1932년 사이 미국에서 갈레아니스트라 불리는 그의 추종자들은 계급의 적이라고 간주되는 기관과 고위 인물에 대해 암살과 연쇄 폭탄 공격을 감행했다. 갈레아니가 1919년 6월 미국에서 추방된 뒤, 그의 추종자들은 월스트리트 폭파 사건을 일으켜 38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들에 대해 더 이상 상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으나, 이탈리아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를 대표하는 렌조 노바토레(Renzo Novatore, 1890~1922)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이면서 혁명적인 아나키스트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미국에서 발흥하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는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에, 그러한 경향에 대항하기 위해 노바토레가 소환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이지 갈레아니. 사진=위키미디어
루이지 갈레아니. 사진=위키미디어

본명이 아벨레 리지에리 페라리(Abele Rizieri Ferrari)의 필명인 노바토레는 일리걸리스트이며 반파시즘 운동가, 시인, 철학자이자 투사였다. 일리걸리스트란 불법주의자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번역하면 그 본래의 뜻을 충분히 전하기 어렵다. 1900년대 초기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스위스 등을 중심으로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서 파생된 철학이자 전술인 일리걸리스트들은 절도, 강도, 밀수, 위조 등이 대규모 봉기를 자극하여 혁명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자본가들이 사회에 대한 착취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수용은 개인적 수복(individual reclamation)으로서 정당하다고 주장한 라바콜 등이 취한 입장과는 다른 것 이었다. 이들은 윤리적 정당화 없이 아나키적 생활방식으로 절도 등을 자행했다. 노바토레가 시에서 “내 영혼은 신성모독 사원/ 죄와 범죄의 종소리/ 관능적이고 변태적이며/ 큰 소리로 반란과 절망을 외쳐라”라는 구절은 일리걸리즘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1890~1918,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서 헌병대에 사살될 때까지

노1922년 노바토레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일리걸리스트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헌병대에게 사살되었다. 사진-=위키미디어

이탈리아 시골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노바토레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억압적이라고 느낀 학교를 떠나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자주 도망가서 과일과 닭을 훔쳐 팔아 산 책을 숲속의 나무 아래에서 읽고 주변 마을의 아나키스트 활동을 접했다. 18세가 된 1908년부터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면서 1910년에 지역 교회의 방화 혐의로 기소되어 3개월형을 살았으나 방화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년 뒤 경찰이 절도와 강도 혐의로 그를 체포하려고 했기 때문에 몇 달을 도망 다니다가 체포되었다.

1912년에 징병 당했으나 1914년 1차 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탈영한 뒤, 아나키스트 신문을 발행하고 미래주의 좌파 집단에 참여하였고, 파시즘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도하면서 엔조 마르투치(Enzo Martucci)와 브루노 필리피(Bruno Filippi)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슈티르너주의자이자 일리걸리스트인 젊은 브루노 필리피와 함께 <이코노클라스탈>(Iconoclastal)이라는 아나키스트 저널을 간행하기도 하면서 노동을 거부하고 생존을 위해 필요하면 부자들의 재산을 수용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1918년 탈영과 반역죄로 군사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도주하여 군대 탈영과 국가에 대항하는 무장봉기를 호소하는 선전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듬해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으나, 몇 달 사면되었다. 1922년에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일리걸리스트 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1922년 헌병대에게 사살되었다. 

노바테레는 저서인 <창조적 무를 향하여>(Verso il Nullo Creatore) 등을 통하여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도덕과 관습을 넘어선 “반집단주의와 개인의 영웅적인 아름다움의 창조성”을 주장했다. 슈티르너와 같이 사회에 순응하는 삶을 “유령의 통치하에서의 삶"이라고 비판하면서 "세계는 모든 사람이 숭배하는 우상과 자신을 희생할 제단이 있는 탐욕스럽고 칙칙한 전염병 같은 교회"라고 비판했다. 나아가 진보, 문명, 종교 그리고 관념은 가장 무시무시한 환영이 지배하는 필멸의 굴레에 속박된 삶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폭력적으로 타도하고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혁명은 의지의 불꽃과 마음의 고독을 필요로 하는 자유로운 귀족의 의무로서 새로운 윤리적 가치와 미적 가치를 만들기 위해 물질적 부는 공유화하고, 정신적 부는 개별화는 것으로 오직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부만이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진정한 재산이다. 

그는 허버트 스펜서의 개인주의를 비판하며 그가 국가에 대항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사실 국가가 그의 의도대로 작동하기 않기 때문이고 스펜서는 반항적인 개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또한 다양하고 특수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다윈, 콩트, 마르크스 등은 보편성의 제단에 인간이 희생되길 원했다고 비판했다. 대신 그는 슈티르너, 말라테스타, 크로포트킨, 니체, 입센, 와일드, 졸라, 베를렌, 말라르메와 같은 예술과 사상의 아나키스트들의 친구라고 했다. 그중에서 슈티르너가 <유일자와 그 소유>에서 말한 바를 읽어보자.  

혁명과 반역은 결코 동의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전자(혁명)는 국가와 사회의 기존 조건 안에서의 단순한 지위의 전복이며,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행위이다. 반면 후자(반역)는 참으로 불가피한 결과로서 상황의 변화를 초래하지만, 이는 그것을 위한 목적이 아닌 개인의 불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무장봉기가 아니라, 그것이 초래할 제도를 고려하지 않는 개인의 반역이다. 혁명은 새로운 제도를 목표로 하지만, 반역은 우리를 더 이상 지배 받지 않을 길로 이끌며, 단지 우리 자신과 약속하게 만든다. 또한, 더 이상 제도에 의존하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반역은 확립된 것과의 싸움이 아니다. 왜냐하면 반역이 성공한다면, 확립된 것은 스스로 무너지기 때문이다. 반역은 오직 확립된 것에서 나를 끌어내는 것일 뿐이다. 내가 기성적인 것을 떠나면 기성적인 것은 죽어 썩어질 것이다. 이제 나의 목적은 기성 질서의 전복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자신을 고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목적과 행위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나 자신과 나의 고유성만을 향한, 에고이스트적인 목적과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아나키는 사회적 형태 아닌 개인화의 방법

빅토르 세르주
빅토르 세르주는 자서전인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Memoirs of a Revolutionary)'에서 일리걸리즘을 ‘집단적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 사진=위키미디어

노바토레에 의하면 아나키는 사회적 형태가 아니라 개인화의 방법이다. 그 어떤 사회도 구성원 각자에게 부여하는 제한된 자유와 행복 이상을 개인에게 양보하지 않는데, 자신은 스스로 정복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원한다고 주장한다. 사회는 개인에게 허용되는 것과 금지되는 것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려고 하지만 그는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금지되지 않고 모든 것이 힘과 용기를 가진 자에게 허용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영적, 물질적 통치자의 가증스러운 멍에에서 해방된 개인의 자연적 자유인 아나키는 새롭고 숨 막히는 사회의 건설이 아니라 기독교,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모든 사회에 대한 결정적인 투쟁이라고 한다.

일리걸리즘은 개인에 의한 반란 행위보다 노동투쟁을 중시하는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은 물론이고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니힐리즘이라고 비판되었다. 한때 열렬한 일리걸리즘의 옹호자이자 갱단을 숨겨준 죄로 체포되어 5년간 수감된 적이 있던 빅토르 세르주는 자서전인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Memoirs of a Revolutionary)'에서 일리걸리즘을 ‘집단적 자살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일리걸리즘은 보다 조직적이고 치밀한 폭동과 파괴를 이끄는 반란적 아나키즘(Insurrectionary anarchism)으로 진화하였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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