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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2] 마르크스와는 경제로 엥겔스와는 사회로 충돌한, 말라테스타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2] 마르크스와는 경제로 엥겔스와는 사회로 충돌한, 말라테스타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3.14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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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엥겔스
가이 알드레드
찰스 말라토

 

말라테스타는 마르크스의 경저적 결정론을 비판했고 권위 없이 사람을 조직할 수 없다는 엥겔스의 주장에도 반대했다. 사진=위키미디어

말라테스타의 사상을 집약한 <아나키>(Anarchy)는 1891년에 나왔다. 바쿠닌의 “인간 연대의 자연적, 사회적 법칙”과 “나의 자유는 만인의 자유”라는 인식의 필요성에 대한 말을 인용한 말라테스타는, “혁명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며 국가가 사회의 경제 구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론을 비판했다. 또한, 크로포트킨처럼 인간 복지의 발전은 상호협력을 통해 달성된다고 보면서도 상호협력을 “동료의 존재, 발전 및 복지에 적대적인 모든 자연적 요인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설명한 점에서 서로 달랐다. 

말라테스타에게 아나키는 정부가 없는 사회를 의미했다. 정부는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그 본성상 약탈적이고 억압적이며 그것은 또한 ‘재산 소유자’의 헌병으로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정부 폐지는 사유 재산의 폐지를 포함한다고 주장한 그는 정부 대신에 자발적인 결사에 대한 공감과 관심으로 단결된 개인의 자발적 집단화를 요구했다. 

삶은 자유로운 주도, 자유로운 계약 및 자발적인 협력에 기초하여 관리될 것이고 실제 존재는 개인이며 사회 또는 집단은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 그는 개인의 자유가 자발적인 연대와 이익 공동체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는 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에서 갈등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조화로운 사회, 정부와 재산이 없는 사회에서의 각자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원한다’는 격언을 “원하는 대로 하라”라고 선언했다. 

 

민중이 스스로 해방되도록 도와주는 당을 꿈꾸다

말라테스타. 사진=위키미디어
말라테스타. 사진=위키미디어

1890년대에 아나키스트 사회에서는 욕망과 의무 사이에 충돌이 없을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혁명적 행동으로 사회적 부를 짓밟는 것’뿐이었다. 1890년대 초기에 유럽을 널리 여행한 그는 1892년에 터진 헤레스(Jerez) 농민 봉기 당시 스페인에 있었고 '형용사 없는 아나키즘'을 주장함으로써 집단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려고 노력했다. 벨기에에서는 찰스 말라토(Charles Malato, 1857~1938)와 함께 1892-3년에 보통선거를 위한 총파업을 목격하고 그 한계를 인식했다. 그동안 그는 이탈리아에 간헐적으로 머물면서 접촉을 유지하고 새로운 노동조합주의를 옹호했다. 그런 다음 1896년에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추방된 제2인터내셔널 런던 대회를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

그가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이탈리아에서는 흉작과 물가 상승으로 많은 농민 반란이 일어나, 혁명을 일으키기에 무르익은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1897년 비밀리에 안코나(Ancona) 항구로 돌아와 <선동>(L'Agitazione)지를 편집하기 시작했다. 아나키스트, 생디칼리스트, 사회주의자들의 광범위한 전선 형성을 요구한 <선동>은, 그가 편집한 많은 출판물 중 가장 중요했다. 아나키란 “권위 없이 조직된 사회, 자신의 의지를 부과하는 권력이 없는 사회를 의미한다”라고 본 그는, 사회는 정부의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질서하거나 혼란스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엥겔스가 권위 없이 조직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말라테스타는 권위를 창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조직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혼자서는 무력한 사람이 자신의 활동과 주도권을 표현하는 수단을 찾는 것은 ‘동료들과의 협력’에서다. 또한, 그는 계급이 사라지면 국가는 존재 이유가 없으며 스스로를 인간에 대한 정부에서, 사물의 행정부로 변형시킨다는 엥겔스의 주장에 반박했다. 그러면서 생산을 지배하는 자가 생산자도 지배하고, 소비를 결정하는 자가 소비자의 주인이라고 했다. 중요한 문제는 법률이 아니라 이해 당사자 간의 자유로운 합의에 따라 관리하는 것이라고 본 그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의회 밖에서 일하는 아나키스트 ‘당’의 창설을 제안했다. 그 임무는 민중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해방되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체포와 투옥 영국에서는 추방의 위협

말라테스타는 추방의 위협을 받았지만, 노동자 조직과 급진적 언론을 가이 알드레드(Guy Aldred)가 조직하고 여러 하원의원이 참석한 트라팔가 광장에서의 대규모 시위 때 벌인 격렬한 캠페인 후 위협이 사라졌다. 사진=위키미디어
말라테스타는 추방의 위협을 받았지만, 노동자 조직과 급진적 언론을 가이 알드레드(Guy Aldred)가 조직하고 여러 하원의원이 참석한 트라팔가 광장에서의 대규모 시위 때 벌인 격렬한 캠페인 후 위협이 사라졌다. 사진=위키미디어

말라테스타는 1898년 초 안코나에서의 공개 시위 중에 다시 체포되었기에 그가 진행하던 활동은 곧 축소되고 그 또한, 범죄조직 혐의로 기소되었다. 과거 아나키스트들은 조직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혐의를 부인했지만 말라테스타와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이 조직이라고 선언하고 공동의 목적을 가진 연합이라는 의미의 '정당'을 조직할 권리를 요구했다. 그와 그의 동지들은 그 재판을 시민의 자유를 위한 캠페인으로 바꾸었지만, 그는 5년간 람페두사(Lampedusa) 섬에 수감되었다. 이후 그곳을 탈출해 미국으로 도망쳐 뉴저지에 머물다가 아나키스트 모임에서 과열된 토론을 하던 중 그는 다리에 총을 맞았다. 쿠바를 방문한 후 '아나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열흘 동안 머물며 여러 회의에서 연설을 했다. 

1900년에 런던으로 돌아온 후 말라테스타는 13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주로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언론을 위한 기사와 팸플릿을 썼지만 크로포트킨과 <자유>지를 중심으로 한 영국의 아나키스트 운동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크로포트킨과 공개 논쟁을 벌여 그의 명성을 훼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용히 기계공과 전기기사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1910년 시드니 거리(Sidney Street) 포위 사건이 터졌을 때, 전기기사였던 그는 갱단 중 한 명에게 휘발유 한 병을 공급했다는 이유로 사건에 연루됐다. 당시 루돌프 로커(Rudolf Rocker, 1873~1958)는 이탈리아 경찰 스파이로 불렸던 동료 이탈리아인이 제기한 명예 훼손 혐의로 3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말라테스타는 추방의 위협을 받았지만, 노동자 조직과 급진적 언론을 가이 알드레드(Guy Aldred)가 조직하고 여러 하원의원이 참석한 트라팔가 광장에서의 대규모 시위 때 벌인 격렬한 캠페인 후 위협이 사라졌다. 

새로운 생디칼리슴 운동이 노동계급을 통합하기보다 분열시킬 것을 우려한 말라테스타는 생디칼리슴은 가장 억압받는 계층이라 할지라도 한 계급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아나키스트 혁명은 인류 전체의 완전한 해방을 목표로 삼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파업은 ‘순수한 유토피아’라고 하면서 “비폭력혁명의 위대한 무기가 되기는커녕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모두가 일을 그만둔다면 창고에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만큼의 식량과 필수 물품이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부르주아지를 굶주리게 하는 것보다 총파업을 굶주리게 하는 첫 번째 사람은 노동자 자신일 것이다. 따라서 대답은 도구를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공장과 토지를 점유해 몰수하고, 가능한 한 빨리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총파업이 봉기를 대신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이 '공개된 힘에 의한 생산의 열매'를 소유하려고 하자마자, 그들은 군인, 경찰, 아마도 부르주아지의 반대를 받을 것이고, 그다음 문제는 총알과 폭탄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반란이 일어나면 승리는 가장 강한 자에게 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탈리아로의 귀환

이탈리아의 아코나. 사진=위키미디어
이탈리아의 아코나. 사진=위키미디어

1차 세계 대전 직전, 말라테스타는 1913년 런던을 떠나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안코나에 정착하고 투쟁에 나섰다. 비밀 결사에 매료된 바쿠닌과 달리 말라테스타는 아나키스트가 자신의 활동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홍보하면서 1914년 안코나에서 경찰에 의해 비무장 반군사주의 시위대가 살해된 후 급속히 확산 된 총파업에 연루되었다.

 그 후 군주제는 거의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혁명적인 생디칼리슴 연합(Unione Sindacale)이 조직되고 노동자들은 사회생활을 새로운 기반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노동조합을 통제하는 온건한 노동총연맹(General Confederation of Labour)에 의해 파업이 무너져 그는 다시 망명해야 했다. 

그 후 런던에서 1차 세계 대전의 나머지 기간을 보낸 그는 아나키스트 운동을 분열시킬 수 있는 어떠한 공개 논쟁에도 참여하기를 꺼렸지만, 연합군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지지를 공개적으로 공격했고 그들의 반군국주의에 흔들리는 소수의 아나키스트들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말라테스타는 절대적인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모든 인간 사이의 평화와 형제애의 승리'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종종 공격을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좋은 수단으로 여겼다. 그는 해방과 혁명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믿었지만 1차 세계대전에서 해방의 요소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전쟁 동안 군국주의와 호전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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