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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0] 나는 누구와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나는 개념이 아니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90] 나는 누구와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나는 개념이 아니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5.16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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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티르너의 철학
사진=픽사베이
슈티르너는 독특한 개성의 에고를 찬양하지만, 형이상학적으로 그를 유아론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에 의하면 에고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그것이 되어가는 ‘창조적 무(無)’인데 그 고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에고는 창조적일 뿐만 아니라 특유한 것이다. 사진=픽사베이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은 지금까지 철학적 또는 정치적 논쟁에서 부정적인 것으로 비판되었다. 슈티르너의 에고이즘은 규범적이지 않다. 그는 새로운 주의로 그 용어를 선택하지 않았다. 슈티르너의 철학은 구체적인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슈티르너의 철학적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은 ‘고유한’, ‘개인’, ‘유일한 것’을 의미하는 유일자(Der Einzige)이다.

슈티르너는 독특한 개성의 에고를 찬양하지만, 형이상학적으로 그를 유아론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에 의하면 에고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그것이 되어가는 ‘창조적 무(無)’인데 그 고정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에고는 창조적일 뿐만 아니라 특유한 것이다. 즉, 각 개인은 완전히 독자적이고 비길 데 없는 존재다. “내 육체는 그들의 육체가 아니고, 내 마음은 그들의 마음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루소처럼 인간이 원래 독립적이었다고 주장하지는 않고 사회는 인간의 본래 상태이고 우리의 자연상태로 본다. 

슈티르너는 각 개인이 독특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나는 그 누구와도 같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구체적으로 다른 개인들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인간이지만, ‘인간’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공통점을 나타내는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공유하는 것이 우리의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본질’은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개념의 특성이다. 내가 다른 것과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이 공통점이 나의 본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슈티르너의 통찰에 대한 미래연구의 답

이것은 간단한 일상의 관찰이다. 그러나 이 작은 일격이 거대한 철학적 떡갈나무를 쓰러뜨리는 것을 보게 된다. 고유한 존재처럼 우리의 관심도 고유하고 고유한 관심을 표현한다. 슈티르너가 에고이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독특한 사람의 독특한 관심이다. 에고이즘은 신, 인간, 조국과 같은 이상에 대한 관심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에게만 관련되는 것에 대한 관심이다. 또한, 슈티르너는 만일 우리가 이상을 위한 투쟁과 우리의 관심사를 동일시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에고이즘에 기초하여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그것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슈티르너는 아이들이 스스로 학습을 선택할 수 있고 아이들의 교육은 그들 자신의 관심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그렇게 하면 전가된 사실과 이론의 무거운 부담이 아니라 지식은 어린이의 소유가 된다. 사진=픽사베이

그의 작품 전반에 걸쳐 슈티르너는 나에게 주입된 생각 및 감정과 내 안에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결정적으로 구분한다. 『우리 교육의 잘못된 원칙』에서 그는 교육의 가장 중대한 원칙을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어린이의 머리에 지식을 채우는 것으로 보는 이론을 공격한다. 슈티르너에 의하면 교육자들은 교육의 수단에 대해서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지만, 교육의 목표가 아이들의 머리에 지식을 채우는 데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이에 반대하여 슈티르너는 아이들이 스스로 학습을 선택할 수 있고 아이들의 교육은 그들 자신의 관심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그렇게 하면 전가된 사실과 이론의 무거운 부담이 아니라 지식은 어린이의 소유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슈티르너 이후 150년 후의 뇌 연구에서 흥미로운 관찰 결과는 학습자가 관심을 가지고 학습할 때 학습의 화학적 성질이 가장 잘 작동한다는 것이다.

학습과 같이 무언가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는 개념은 슈티르너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필수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가 접촉하는 모든 것은 그의 소유다. 법적인 의미가 아니라 고유한 존재로서 그가 접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또한 다른 사람이나 이상 등에 의해 규정된 조건이 아니라 그 자신의 조건에 따라 직면하게 된다는 의미에서이다.

이것은 소유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부정할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소유란 사용자가 통제하는 ​​것이다. 이 통제를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특정한 개인과 그의 능력에 달려 있다. 슈티르너는 권리로서의 소유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권리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배나 규범적 이상이 없을 때 소유는 개인이 접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상과 권위가 규정된 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관련시킬 때 그것은 소유이다. 그리고 사물에 대한 개인의 통제는 개인의 힘, 즉 그의 능력에 달려 있다.

 

“자유를 공짜로 가질 수는 없다”

막스 슈티르너. 사진=위키미디어
그러나 슈티르너는 ‘자유’보다 ‘소유’를 선호한다. 부재인 자유는 자기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좋아하는 영역에서 존재감을 드러냈을 사람들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유를 공짜로 가질 수는 없다”라는 유명한 문구에 반영된다. 사진=위키미디어

슈티르너의 두 번째 개념은 바로 고유성(Eigenheit)이다. 이 개념은 개인이 자신과 자신의 평가를 그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는 슈티르너의 마지막 개념인 ‘소유Eigner’와 관련된다. 그는 ‘소유’를 ‘자유’와 대조한다. 즉, 자유는 공허한 개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유”를 찾을 때 정확히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원하는가? 단어 자체가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또는, 단순히 자신을 위해 이 자유가 무엇을 포함해야 하는지 결정하고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전혀 원하지 않고 오히려 개인의 자유와 모순되는 다른 종류의 자유를 갈망하는 무리가 아니라,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슈티르너는 ‘자유’보다 ‘소유’를 선호한다. 부재인 자유는 자기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좋아하는 영역에서 존재감을 드러냈을 사람들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유를 공짜로 가질 수는 없다”라는 유명한 문구에 반영된다.

자유와 소유의 차이에 대한 사례는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 아이의 경우에 찾을 수 있다. 불량소년들이 괴롭히는 데 싫증이 나면 괴롭힘은 잠시 없어진다. 그러면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는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 후 그 아이가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하거나 힘센 친구를 사귀게 되면 상황은 다르게 전개된다. 즉 그 아이는 자신의 소유를 사용하여 불량배들과 싸우게 된다. 즉 자신의 의지로 그들에게 저항하는 것이다. 만일 그 전에 불량배들이 다시 괴롭히기로 결정하고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아이가 자신의 자유를 호소했다면 이 헛된 호소는 그저 소원, 즉 괴롭힘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이 소원의 성취는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불량배들에게 달려 있다.

그의 저서 마지막 부분에서 슈티르너는 이상을 매개로 서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한다. 그는 특히 이상을 무너뜨리는 것에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를 보호할 이상이 없다면 우리는 완전히 길을 잃는다! 우리는 악행을 저지를 권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다!” 여기서 슈티르너는 십자가와 마늘과 마찬가지로 “권리”가 어떤 경우에도 보호된 적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당신은 무엇을 뜻하는가? 당신은 저항할 힘이 없는가? 당신에게도 힘과 능력이 있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구체적 사람들에 의해 모든 변화는 실현된다

68년 프랑스에서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을 때 캠퍼스 교실에 적힌 글자.  사진= 위키미디어

슈티르너는 권력과 능력이 크고 건장한 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연합하면 나의 힘은 배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변화는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든 특정한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졌든 간에, 항상 구체적인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기껏해야 구체적인 사람들의 마음에 몰래 타거나 또는 잘라야 할 시든 꽃이었다.

그래서 환상과 이상을 잃는다고 해서 내가 얻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고, 잃어버린 관념이 ‘권리’이고 ‘자유’라 해도 잃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얻은 것을 더 이상 누군가가 나에게 주지 않는다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얻은 것이 더욱 굳건히 세워지게 된다. 즉 괴롭힘을 당한 아이가 가진 ‘자유’는 자유에 대한 탄원보다도 자신의 소유에 더 굳건하게 세워진다. 마찬가지로 나는 주류 판매 면허를 잃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내가 자동으로 음료 판매를 중단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특정 한도를 초과하는 수입이 거부되어 고전적인 정치적 의미에서 나의 “자유”를 제한당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소유로 나는 밀수를 한다.

슈티르너에 의하면 자기 인식, 자기 결단력, 그리고 자유로운 행동을 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슈티르너가 어떤 것을 강조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적 목적의 성취 수단인 에고에 종속된다. 그러므로 그는 자유보다 자기 자신을 중시한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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