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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7] '게르니카'에 배어있는 아나키즘의 흔적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7] '게르니카'에 배어있는 아나키즘의 흔적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2.0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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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파블로 피카소. 사진=위키미디어
파블로 피카소. 사진=위키미디어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는 20세기 최고, 최대의 화가라고 한다. 세계 어디서든지 웬만한 이름의 미술관에서라면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피카소를 알려면 그의 고향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피카소미술관을 방문해야 한다. 아니 바르셀로나를 찾아야 한다. 고야가 숨 쉬는 마드리드의 삭막한 스페인과 달리 바르셀로나는 짙푸른 지중해에 위치한 자유로운 카탈루냐의 수도다.

프랑코의 독재하에서 자치권은 빼앗겼으나 자유로운 사상과 전위적인 예술이 언제나 옹호된 곳이었다. 스페인 최초의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아나키스트의 테러로 불안한 나날을 지센 곳도 바르셀로나였다. 피카소와 미로 그리고 가우디는 바로 그곳의 자유 속에서 자랐다. 바르셀로나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13-14세기에 건설된 고딕 지구의 좁은 골목 안에 고풍스런 피카소미술관이 숨어 있다. 피카소는 미술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14세에 이곳에 와서 파리로 떠나기 전까지 10년을 살았다. 피카소가 살았던 당시의 그곳은 전형적인 빈민굴과 매춘굴 지대였다. 

앞에서 본 페레의 현대학교는 19세기 후반 카탈루냐에서 행해진 많은 실험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당시 안달루시아 지방 곳곳에서는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교육이 행해졌고, 예술에서도 많은 실험이 행해졌다. 피카소는 1901년 아나키즘 경향의 <젊은 예술>(Arte Jovan) 지의 미술담당자로 일했다. 그 후 파리를 여행하면서 시인인 막스 자콥이나 기욤 아폴리네르나 알프레드 자리 그리고 화가인 블라맹크나 반 동겐을 비롯한 많은 아나키스트들과 친분을 쌓았다.

피카소가 파리에서 받아들인 아나키즘은 바쿠닌과 같은 창조적 파괴의 충동이었다. 피카소는 1909년의 스페인 혁명과 같은 위대한 혁명이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봤다.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피카소의 파괴적인 시각혁명인 큐비즘은 나타났다. 그것은 르네상스 때와 같이 전통미술에 대한 거부였다. 즉 외부세계와 현실을 닮게 그리는 모방적 요소를 없애버림으로써 그 전통을 파괴했다.     

 

그림을 태워 몽마르뜨의 겨울을 났던 피카소, 사회악을 고발하다

피카소는 몽마르뜨의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그림을 태워 몸을 녹였다. <늙은 기타리스트>를 통해서는 사회악을 고발했다. 사진=위키미디어

우리가 사는 20세기는 흔히 피카소 미술로 상징된다. ‘한 시대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미술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는 파놉스키의 말은 실로 20세기와 피카소의 관계를 웅변해준다. 역사의 시각화가 미술이다. 피카소의 엄청난 변화와 실험정신은 20세기 미술사의 큰 궤적 중 하나다. 20세기 미술에는 다양한 실험들이 있었다. 새로운 실험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19세기적인 야수파도 있었고 주제를 아예 해체시켜 다른 양식으로 조합한 입체파도 있었다. 표현파는 주관적 감각에 따라 왜곡된 형상을 그렸으며, 칸딘스키는 아예 인식 가능한 주제들을 추상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들은 결코 전통과의 단절 위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어느 것이나 시대와 무관하게 현실과 절연된 실험실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다. 미술의 어떤 실험도 그 시대 상황의 반영이다.

피카소는 난해 미술의 상징이다.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그림을 보면 피카소 같다고 한다. 피카소는 현대미술 그 자체이다. 실험으로서의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피카소의 입체파(큐비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전시대를 볼 필요가 있다. 피카소는 큐비즘의 대가로 불리지만 그의 화풍은 다양하게 변모했다. 피카소의 실험은 청색시대, 장미색시대 그리고 입체파시대로 구분된다. 그의 ‘청색시대’는 걸인이나 광인의 초상, ‘장미색시대’는 타락한 사람들, 혐오되고 배척된 사람들, 뿌리 없는 잡초와 같은 사람들을 강렬한 감정이입으로 그린 걸작들을 남기고 있다. 당시의 피카소는 극도의 가난에 허덕였다.

몽마르뜨의 추운 겨울에는 그림을 태워 몸을 덥혀야 했다. 가령 <늙은 기타리스트>를 통해 피카소는 늙고 초췌한 맹인 기타리스트는 삶을 노래한다. 그는 굶주림으로 피폐해진 인간상을 활용해 사회악을 고발한다. 누가 그를 죽이는가? 피카소는 가난을 낳은 사회제도에 뜨겁게 항변한다. 피카소의 초기작품들은 다분히 고전적이고(특히, 엘 그레코의 영향이 있다) 상징주의적이다. 그러나 이는 신비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라 강렬한 사회참여의 정신에서 그려졌다. 당시 피카소는 미술가 대부분 탐닉한 아나키스트였다. 

피카소의 초기작품은 소위 입체파의 그것과 완전히 상이한 것이 아니다. 포비즘은 반 고흐의 격정을 지침으로 삼아 반아카데미즘 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큐비즘(입체파)은 더욱 주지적인 방법론으로 반자연주의 예술을 확립하고자 했다. 포비즘은 방법론적 공통성을 지니지 못하여 합리성을 결여하고 본능주의라고 할 반동적인 후퇴를 보이기도 했다. 반면 큐비즘은 엄격한 지성적 원리에 기초했다. 큐비즘은 다양한 시점을 중복시켜 주제를 구성하고 표면에는 나타나지 않는 다중적인 인상을 창조했으나, 주제를 상실하거나 추상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큐비즘은 포비즘의 현란한 색채 구사와도 대립하여 그 엄격함을 더욱 강조했다. 큐비즘이 사용하는 색채는 지극히 한정되었고, 나아가 유화구가 아닌 일상생활의 신문지 등이 콜라쥬란 형식으로 그림 속에 포함되었다. 이 모든 시도는 전통미술에 대한 완전한 반란이었다.

 

평면상 구조의 문제를 정신의 결합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큐비즘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매춘부들을 종합한 작품이다. 사진=위키미디어

15세기의 르네상스 이래 화가들은 하나의 시점을 중심으로 한 원근법에 의해 2차평면 위에 3차원의 환상을 창조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에서만 채택된 것에 불과했다. 서양의 전통적인 투시도법은 현실을 어떤 하나의 각도에서 파악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다른 사물의 파악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그러한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서양에서도 중세 초기에는 예수를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17세기 스페인의 엘 그레코는 투시화법이 아닌 방식으로 길게 늘어진 인물을 그렸다. 19세기 말에 와서 세잔은 전통적인 투시화법을 부정하고 시점을 분산시킨 형태를 캔버스에 자유롭게 배치했다.

또한, 합리주의, 과학주의에 의한 기하학적 조형방법을 제시하여 부르주아 자연주의와 대립했다. 곧 야수파를 포함하는 시민적 감각주의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러한 방법론은 피카소를 비롯한 20세기의 화가들에게는 계시적인 것이었다. 입체파는 부르주아 미술이 감각에 탐닉한 쾌락의 공급으로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화가는 시민사회의 소비적 향략 수요에 순응하는 광대라고 비판되었다. 인상파는 아카데미즘에 승리했으나 그 감각만능주의는 지성의 결여로 인해 단순한 쾌락주의로 타락했다.

큐비즘은 평면상 구조의 문제를 지각과 정신의 결합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그들은 외면적 감각을 부정하고 내면적 지성을 강조했다. 이는 기계시대의 생산양식을 반영한 것으로서 그들은 엄격한 법칙에 의한 화면구성을 모색했다. 3차원의 자연을 2차원의 화면에 재구성하기 위하여 르네상스 이래 전통적으로 투시화법이 이용되었으나 이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 입체파는, 2차원의 공간 그 자체를 평면에 만들어 내고자 했다. 평면상의 존재는 점, 선과 면뿐이다. 따라서 평면상의 공간은 평면을 분할하는 것이다.

1907년에 그려졌으나 9년 뒤에야 비로소 일반인에게 공개된 <아비뇽의 처녀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본 매춘부들을 종합했다. 아비뇽이란 프랑스 지명이 아니라, 피카소가 14살 때 가족과 함께 이사한 바르셀로나에 있는 매춘가 이름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피카소가 붙인 것이 아니라 평론가가 그 그림을 보고 그곳 아가씨들 같다고 농담을 던진 것에서 비롯된다. 피카소 자신은 그 이름을 ‘죄의 대가’로 붙이려고 생각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그 소재가 아니라 순수한 조형상의 문제이다.

우리는 그 형태에서 스페인의 선배 화가인 엘 그레코, 또는 당시의 젊은 피카소가 열광한 흑인 조각의 영향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림은 그 어떤 전통이나 유사함과도 관계없이, 도리어 그 전통의 완전한 파괴로 다가온다. 곧 왜곡된 형태는 평면화되고 앞뒤의 공간이 거의 없어서 보는 이와 작품 사이에 여유가 없이 육박한다. 배경의 청색도 흰색으로 윤곽 지워져 앞으로 튀어나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구성은 세잔을 모방한 것이다. 또한, 잔인하게 왜곡된 얼굴이나 고대화 식의 자세는 전통적 기법을 부정하려는 화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스페인 5백 년 군국주의에 대한 도전, <게르니카>

게르니카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군이 스페인 게르니카 지역 일대를 1937년 4월 26일 24대의 비행기로 폭격하는 참상을 신문으로 보고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그림이다. 사진=위키미디어

1937년에 그려진 <게르니카>는 거대한 그림이다. 세로 3.5미터, 가로 7.8미터나 된다. 그러나 색이 없다. 1937년 독일공군은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하여 수백 명의 시민을 학살했다. 광주민주화항쟁처럼 2천여 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거의 60년이 지난 아직도 사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1975년에 죽은 프랑코 덕분으로 진실은 오랫동안 은폐되었다. 폭격 소식을 파리에서 들은 피카소는, 무너진 공화국 정부가 의뢰한 벽화로 그것을 그렸다. 당시의 피카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페인의 전쟁은 인민과 자유에 대한 반동의 전쟁이다. 나의 모든 예술적 생애는 오직 예술의 죽음과 반동에 대한 싸움뿐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군국주의 5백 년에 대한 도전이다. 그것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의 총살>의 전통이다. 우리는 우리의 예술가들에게 피카소 정신을 재흥하도록 요구한다. 피카소의 사랑과 기행을 모방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정신과 내면을 따르도록 요청한다. 그것은 시대정신에 투철한 반항적 예술정신이다. <게르니카>는 정치적인 어떤 형상도 그리고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저항할 수 없이 죽어가는 자들의 절규로 가득 차 있다. 이 작품은 ‘스페인에 참된 민주주의가 실현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뉴욕 현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되었다가 피카소 사후 8년, 프랑코 사후 6년인 1981년 10월, 프라도미술관에 반환되었으나 최근 다시 그 옆의 국립 레이나 소피아미술관으로 이관되었다.

1944년 공산당에 입당한 피카소는 1951년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우리는 그곳에 표현된 의전적인 군인상이 어느 쪽을 의미하는지 따질 필요는 없으나, 문제는 그것이 게르니카가 보여준 분노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진부한 고전화의 구도에 그쳐 아무런 분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피카소가 그린 대부분의 후기 그림들은 제도화된 양식화로서 그의 유명세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한다. 죤 버져는 피카소가 1차대전 이후 이미 장사꾼으로 변모하여 부자가 되었고 그의 천재성은 평론가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하여 조작한 것이라고 통박한 바 있다.

심지어 그는 피카소가 젊어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온 것부터 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였고 스페인이 비참했기에 원시적인 삶을 이상화하여 곧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피카소의 미술을 동화적인 자연주의를 통속적 형태로 생산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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