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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어떤 벤치에 대하여
[디자인 파노라마] 어떤 벤치에 대하여
  • 오창섭
  • 승인 2022.05.06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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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⑯_오창섭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우리가 쉽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어느 공원의 한 벤치. 사진=오창섭
우리가 쉽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어느 공원의 한 벤치. 사진=오창섭

나무인 척하는 콘크리트 벤치

벤치가 달라졌다. 어디를 가든 아름답고 세련된 벤치들이 우리를 반긴다. 좋은 일이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재료나 모양이 다른 벤치들을 꽤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무인 척하는 콘크리트 벤치도 그중 하나다. 두 개의 짧은 콘크리트 기둥 위에 두꺼운 나무판 모양의 콘크리트 덩어리를 얹혀놓은 벤치 말이다.

나무인 척하는 콘크리트 벤치에 앉을 때면 콘크리트 고유의 서늘함이 느껴지곤 했다. 그렇다고 사용하는 데 불편함이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나무인 척하는 콘크리트 벤치도 벤치로서 기능을 훌륭히 수행했고,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서 기후 변화나 반달리즘에 강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어디서나 쉽게 그 벤치를 볼 수 있었던 건 그런 장점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무인 척하는 콘크리트 벤치는 왜 나무를 흉내 냈을까? 아마도 콘크리트의 차갑고 삭막한 느낌을 익숙하고 따뜻한 나무 이미지로 완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와 유사한 모습을 초창기 전자제품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나무 가구를 흉내 낸 콘솔형 TV가 대표적 사례다. 이 제품이 나무로 된 가구의 외관을 하고 있었던 건 기술의 한계나 제작비용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신기술로 만들어진 제품을 낯설게 느끼지 않도록 하려는 디자인적 조치이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콘크리트 벤치가 나무 모양인 것은 콘크리트라는 재료의 차가움만이 아니라, 자신이 놓일 근대 도시의 삭막함도 의식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벤치는 휴식과 관련된 사물 아닌가? 여러 요소를 고려할 때, 나무인 척하는 콘크리트 벤치가 나무 흉내를 낸 건 나름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언제부턴가 나무인 척하는 콘크리트 벤치를 만나는 게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 벤치가 주위에서 빠르게 사라진 건 2000년대 후반에 불었던 공공디자인 바람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당시 공공디자인에 관여했던 주체가 모두 그런 취향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디자이너들은 반장식적인 조형 취향을 드러내었다. 일부는 그것을 실현하는 게 곧 공공디자인이라고 이해하기도 했다.

그들에게 나무인 척하는 콘크리트 벤치의 키치(kitsch)적인 존재 방식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천박하고 추한 것이며, 기만적인 존재였다. 사실 최근에 등장하는 세련된 벤치들의 조형은 이런 나무인 척하는 콘크리트 벤치의 조형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벤치들은 기하학적이고 구조적이며 추상적이다. 재료를 기만적으로 사용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나무인 척하는 콘크리트든, 콘크리트인 척하는 플라스틱이든 ‘○○인 척’은 있을 수 없다. 

 

세련된 벤치, 하지만

여기 그런 논리로 만들어진 한 벤치가 있다. 사진 속 벤치는 세련되고 아름답다. 주변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게다가 내구성도 뛰어나 보인다. 그런데 이 벤치를 보고 있노라면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하다. 이 아름다운 벤치의 무엇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사물은 자신의 꿈을 몸에 새긴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사물들은 저마다 자신이 기대하는 세계와 삶의 이상적 모습을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는 속도가 지배하는 세계를 꿈꾼다. 빠름에 대한 열망과 느림을 향한 저주를 자동차는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유선형’은 자동차에 어울리는 조형 언어임이 분명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자동차가 우아한 유선형의 옷을 입고 있는 건 아니다. 상대적으로 딱딱하고 중후한 외형을 가진 자동차들도 적지 않다. 이런 자동차는 자신의 일차적 관심이 속도에 있지 않음을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그보다는 사용자의 안전이나 지위를 드러내는 게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진 속 벤치는 어떤 꿈을 몸에 새기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벤치는 자신이 자리하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길 희망하고 있는 것일까? 벤치란 기본적으로 여럿이 함께 앉을 수 있는 긴 의자다. 따라서 벤치를 디자인할 때 디자이너는 그런 요구를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다. 사진 속 벤치도 그런 요구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런데 ‘여럿이 함께 앉을 수 있는 긴 의자’라는 벤치의 정의는 어딘지 모르게 벤치의 기능과 존재 이유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구체성이 떨어진다고나 할까? ‘누가’, ‘어떻게’, 혹은 ‘왜’라는 고민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벤치를 이용하는 사용자는 다양하고, 그에 따라 벤치를 이용하는 이유나 방식도 다양하다. 여럿이 함께 앉을 수도 있지만 혼자 이용할 수도 있다. 앉는 모습도 서로 다르다. 누구는 걸터앉겠지만, 누구는 벤치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쉴 수도 있다. 심지어 잠시 누울 수도 있다. 이것이 시민들이 벤치를 이용하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용 양태다. 이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사진 속 벤치는 시민의 구체적인 사용 습관이나 사용 행태를 잘 반영했다고 할 수 없다.

벤치는 두 개의 살짝 튀어나온 구조물을 통해 3인이 앉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얼핏 그런 조치가 공정하고 친절해 보인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진 속 벤치는 그 구조물을 통해 이용자에게 어떻게 앉으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 이 벤치의 이용자는 정면을 향해 앉을 수밖에 없다. 신발을 벗고 다리를 올려 벤치 방향으로 앉아 휴식을 취하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불편할 수 있다. 그게 불편하다는 건 이 벤치가 그러한 사용을 바람직한 사용 방식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이 벤치에 눕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치 벤치란 앉아서 쉬는 것이지 누워서 쉬는 시설물은 아니라고 외치는 것 같다. 두 개의 살짝 튀어나온 구조물이 철로 되어 있어 그 외침은 단호하고도 강력해 보인다.

사진 속 벤치는 이용자인 시민의 판단 능력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가정하고 있다. 이 벤치에게 사용자인 시민은 가르치고 관리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벤치는 명령한다. 계몽적이고, 강압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앉고, 저렇게는 앉지 말라고 말이다. 이 벤치를 이용하는 이들은 조용히 그 명령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사실 사진 속 벤치가 표현하는 핵심은 ‘눕지 마시오’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벤치는 자신이 정해준 방식대로 앉아서 쉬라는 명령을 넘어, 특정 시민은 자신을 이용할 수 없다고 배제하고 있다. 그 시민은 누구일까? 집 없는 자, 그래서 이 작은 판을 침대 삼아 하룻밤을 보내려는 노숙인일 수 있다. 이 벤치는 공정함의 외관을 취하고 있지만, 나누고, 배제하고, 가르치려 들고 있다. 이 아름다운 벤치를 보면서 내 마음이 불편했던 건 벤치가 꿈꾸는 세상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창섭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디자인연구자로 한국디자인학회 최우수 논문상(2013)을 수상했으며,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안녕, 낯선 사람」 전시(2017)와 DDP디자인뮤지엄의 「행복의 기호들」 전시(2020)를 기획했다. 저서로 『내 곁의 키치』,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 메타디자인을 찾아서』, 『인공낙원을 거닐다』,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 『근대의 역습』, 『우리는 너희가 아니며, 너희는 우리가 아니다』 등이 있다. 현재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타디자인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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