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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부엌은 여성을 위한 디자인이었을까?
[디자인 파노라마] 부엌은 여성을 위한 디자인이었을까?
  • 조혜영
  • 승인 2022.04.15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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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⑬_조혜영 건국대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초빙교수·홍익대 대학원 외래교수
크리스틴 프레데릭의 부엌 공간의 동선 연구. 부엌일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합리성과 효율성 위주의 작업대와 시설들이 배치된 모델이다. 이러한 과학적 방법론은 유럽의 신주택단지의 부엌 모델에도 영향을 주었다. 사진=『The New Housekeeping』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 사상가들이 성차별에 대해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을 때, 핵심적인 문제는 여성의 일터가 가정이라는 점이었다. 후기산업사회가 도래해도 여성들은 여전히 가족을 돌보는 일 때문에 가정에 머물러 있었는데, 여성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공모한 사회가 여성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당시 가정은 기혼 여성들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가장 역할을 하는 남편에게 쉼터이면서 자녀들에게는 교육과 놀이터이기도 해야 하는 ‘다목적’ 공간이었다. 이러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엄마·아내는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확산되면서 남성이 공적·생산·직장에서, 여성이 사적·재생산·가정의 영역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가정에 속하게 된 여성들의 노동과 역할은 자본주의·공적공간에서 보이지 않게 됨으로써 경제활동에서 제외되고 순수한 사랑과 봉사라는 이름의 사용가치로서 신화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디자인이 ‘모던 키친’이다. 현재 우리가 ‘싱크대’로 알고 있는 개수대와 작업대, 가열대가 일체형으로 디자인된 모델이 모던 키친이다.

부엌일은 손이 많이 가고 복잡해 근대 초기까지 하인 또는 하녀의 일이라 여겨졌었다. 따라서 20세기 초까지 부엌은 요리할 때 발생하는 연기와 냄새, 상하수 시설과 식재료 보관·처리와 같은 일의 번잡스러움을 은폐하기 위해 건물의 뒤쪽이나 지하에 배치되었다. 그런 부엌 공간이 집안에 거실과 동등하게 배치되어 가전제품을 이용하는 과학적인 공간으로 변하면서 ‘모던 키친’이 되었다.

 

마가레테 리호츠키가 설계한 프랑크푸르트 키친. 사진=조혜영

부엌 디자인의 새로운 지평 연 ‘프랑크푸르트 키친’

여성을 위한 공간인 가정, 그리고 그 중심에 부엌을 두고 가전제품과 조리도구 등의 기계하인들을 거느린 주부는 행복해야 할 테지만, 페미니즘 관점에서 보면 계층 사회 내 하인의 일을 ‘가정주부’라는 명칭의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넘겨받는 순간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공간이 공적인 일을 수행하던 폴리스의 영역과 사적인 일이 이루어진 오이코스의 영역으로 나뉘었었다고 한다. 이때 오이코스의 영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성별도 부엌일에 대한 구분도 없었다. 그저 ‘사적이고 생활을 위한 일들’이었다. 이러한 개념에서 집안일이란 본래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남편과 아내 중심의 가족 형태로 일터와 가정이 분리되면서 여성들은 험하고 경쟁적인 바깥일로부터 안전한 ‘가정’을 점유하면서 이 일을 “혼자서” 좀 더 잘하기 위해 새로운 부엌 디자인을 요구했다.

여성들의 요구에 사회는 즉각적으로 호응했는데, 1913년 미국의 가정경제학자 크리스틴 프레데릭(Christine Frederick)이 공장노동자들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고안된 테일러리즘을 부엌에 적용해 ‘새로운 가정관리법’을 소개했다. 여기에 소개된 새로운 부엌은 넓은 공간에 수납장과 작업대, 개수대, 오븐 시설을 설치하고, 위생과 합리성을 위해 화이트로 칠한 인테리어 때문에 과학 실험실과 같은 디자인으로 일하고 있는 주부의 모습도 과학자에 가까웠다. 이로써, 여성들은 집안일을 과학자와 같은 환경과 패션으로 ‘홀로’ 할 수 있게 됐다.

한편 이 책에 감명을 받았던 오스트리아 건축가 마가레테 리호츠키는 1926년 프랑크푸르트 주택단지 건설에 미국식 과학적 관리 방식을 적용한 ‘프랑크푸르트 부엌’을 선보이게 되었다. 당시 유럽은 산업화로 여성노동자들이 공장으로 진출하자, 집안일을 하던 하녀를 구하기 어려워졌던 주부들은 직접 집안일을 해야 했기에, 새로운 부엌 디자인에 관심이 높아졌다. 모던 키친의 모델로도 평가되는 프랑크푸르트 키친은 과학의 합리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공간 분할과 간단명료한 도구들로 부엌일이 복잡하고 번잡스럽다는 생각을 잊게 할 만큼 말끔하고 은은한 파스텔 톤의 푸른색 페인트로 도색되어 있다.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부통령과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한 주택 모델 전시장에서 ‘부엌 논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AP

페미니즘이 바꾼 현대 부엌 디자인

부엌이 여성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점을 전 세계적으로 홍보했던 사건이 있었다. 냉전 시기였던 1959년 소련의 모스크바 박람회에 참여했던 미국 부통령 리처드 닉슨은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와 미국기업들이 참여한 새로운 주택 모델 전시장에서 ‘부엌 논쟁(Kitchen Debate)’을 했다. 두 정치적 리더는 핵무기와 이념이 아니라 자국 여성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방식에서 어느 쪽이 더 우월한 부엌디자인을 보여주는지를 두고 논쟁한 것이다.

닉슨은 과학적 가전제품과 싱크대의 대량생산으로 자본주의의 기술경제적 우월성을, 흐루쇼프는 여성을 부엌에 가두려하지 않고 사회적 참여를 권장하는 사회주의의 이념적 우월성을 논했다. 부엌 논쟁은 닉슨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면서 마무리하게 된다. “여성을 위한 마음은 다 같은 것 같습니다. 가정주부들의 삶을 더 편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소련의 주부들은 미국의 주부들과 소련의 남성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엌 사용자인 여성이 부재한 부엌 논쟁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국가와 남성이 원하는 여성은 집안일이 힘들어도 화내지 않고, 쉬워지는 것에 행복해하는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이었던 것이다.

20세기 부엌은 가정주부의 공간과 디자인이 되었다. 이것은 페미니즘이 비판했던 성별화된 영역을 뛰어넘지 못한 채 여성이 스스로 가정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인정한 결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자본주의의 논리를 전시하는 전시장으로 이용하는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부엌이 단순히 음식 마련을 위한 노동을 하는 곳이라면 기능적 가전으로 가득 채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주부의 경제적 능력을 전시하는 지위재가 되어 물질과 기술에 대한 여성들의 소유욕을 대체하는 디자인이 된다.

그런데 현재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부엌 디자인은 노동 경감을 위한 기능적 측면뿐만 아니라 감성적이고 미적인 측면이 상호작용하면서 사용자 경험에 따라 재구성되거나 맞춤형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것은 페미니즘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분법적인 우열의 가치 매김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부엌 디자인의 변화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 그리고 비인간과 자연에 대한 성찰로 그 주제를 옮겨가고 있다.

 

조혜영 건국대 커뮤니케이션디자인학과 초빙교수·홍익대 대학원 외래교수

예술학과 미술사 전공 후 한국디자인사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한국문화·대중문화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서 인문학적으로 디자인을 생각한다. 공저로 『이야기와 이야기』, 『신유목민의 디자인』이 있고,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한국 부엌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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