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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초연결․초지능 시대…기술의 자기조직화와 발생예술
[디자인 파노라마] 초연결․초지능 시대…기술의 자기조직화와 발생예술
  • 유원준
  • 승인 2022.03.10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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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⑧_유원준 영남대 디자인미술대학 교수

‘초연결‧초지능’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예술가들은 과학기술을 활용한 새로운 형식의 작품들을 창작하면서도 디자인계만의 ‘초과(hyper)’라는 기준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있다. 디자인계에서 바라보는 ‘초연결’과 ‘초지능’은 무엇인가. 이번 주 ‘디자인 파노라마’에는 뉴미디어 디자인 전문가인 유원준 영남대 교수가 다양한 매체가 융합된 디자인을 이야기한다.

모든 것이 연결되고 지능화되는 완벽한 사회,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에 의해 탄생한 두 작품, 『1984』와 『멋진 신세계』가 제시하는 미래상은 외견상 완벽함으로 인식되는 사회 구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그들이 그려낸 미래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설 속 텔레스크린, 마이크로폰 등과 같은 기술 매개체는 현대판 판옵티콘 구조를 구현하는 장치로 남용되며 연결은 감시 시스템으로, 지능은 통제 권력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기술의 주체가 결국 인간이라는 점을 상기해볼 때 이러한 시스템은 분명 보완이 가능한 정치적이고 기술적인 가능성을 갖는다. 오웰이 전망한 1984년이 도래했을 때, 백남준이 인공위성을 연결한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유토피아적 미래상을 선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의 주체에 따라 서로를 단속하고 고발하는 암울한 미래는 얼마든지 서로에 대한 그리움으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진정한 ‘멋진 신세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키트 갤로웨이·쉐리 레비노츠, 「공간의 구멍(Hole in Space)」. LA와 맨해튼을 연결해 각 도시의 시민들이 서로의 모습을 마주보게 만들었다.  사진=키트 갤로웨이·쉐리 레비노츠
키트 갤로웨이·쉐리 레비노츠, 「공간의 구멍(Hole in Space)」. LA와 맨해튼을 연결해 각 도시의 시민들이 서로의 모습을 마주보게 만들었다. 사진=키트 갤로웨이·쉐리 레비노츠

과거로부터 우리는 과학기술이 발달한 미래를 동경하고 동시에 두려워했다. 예술은 이러한 모습을 반영해왔는데, 특히 기술이 제공하는 새로운 ‘연결성’과 ‘지능화’의 모습은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 예견되어왔다. 가령, 키트 갤로웨이(Kit Galloway)와 쉐리 레비노츠(Sherrie Rabinowitz)의 1980년 작, 「공간의 구멍(Hole in Space)」은 LA와 맨해튼을 연결해 각 도시의 시민들이 서로의 모습을 마주보게 만들었다. 단지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의 사람들이 서로 마주하게 만드는 것이 작품의 주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당시 꽤나 신선한 것이어서 관객들에게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상호소통하는 미래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원격현전(Telepresence)’으로 명명되는 이러한 형식의 작품은 백남준의 시도와 내용적으로 그 궤를 같이하며 ‘연결’ 그 자체가 제공하는 기술적 상상력을 우리에게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는 현재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금 이러한 ‘연결’과 ‘지능’의 개념을 다시 소환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 ‘초과(hyper)’라는 수식어구가 붙게 되었다. 이는 이전보다 비약적으로 발달된 기술의 다른 이름이자 상징으로 사용되는 형용어구지만 예술은 여전히 ‘초연결‧초지능’이란 화려한 수식 뒤에 감추어진 이면을 파고든다.

 

인간-기계 이분법적 구도가 해체된 예술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이 ‘초연결‧초지능’에 관하여 제기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과연 무엇이 ‘초과’되고 있는가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연결의 개념은 그 자체로 주체와 객체, ‘상호’를 전제한다. 과거 기술적 맥락에서 이러한 상호는 결국 인간 중심주의적인 주체/객체 개념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초연결’은 이와 같은 인간 주체 개념을 상회한다. 이제 연결은 인간 사이의 혹은 인간 주체를 전제한 주체-타자와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전까지 비생명체로 간주하던 사물이 주체의 자리를 꿰차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환경이, 때로는 기계가 그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른바 인간(주체)과 기계(대상)의 이분법적 구도가 해체되고 있는 셈이다. 기술철학자 질베르트 시몽동(Gilbert Simondon)은 기술의 자기-조직화 개념을 주장하며 기술적 대상의 진화를 언급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견지되어온 자연적 대상인 인간과 기술적 대상인 인공물의 구분을 비판하며 양자가 서로 상호변환(transduction)의 과정을 통해 일종의 연합환경을 구축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d.N.A(double Negative Architecture), 「Corpora in Si(gh)te」 사진=YCAM
d.N.A(double Negative Architecture), 「Corpora in Si(gh)te」 사진=YCAM

예술 작품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건축과 미디어, 정보 기술을 넘나드는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일본의 현대 예술 프로젝트팀인 d.N.A(double Negative Architecture)는 「Corpora in Si(gh)te」를 통해 외부 정보들에 의해 생성되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 작품을 선보였다. YCAM(Yamaguchi Center for Arts and Media)의 후원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다수의 센서를 통해 야마구치 센터 주변의 실시간 환경 정보들(기온, 밝기, 습도, 바람의 방향과 소리 등)을 수집한다. 그리고 이렇게 수집된 데이터는 세포들처럼 보이는 ‘Corpora’의 가상 건축물을 구성하는데, 이 가상의 건축물은 실시간 프로세싱을 통해 마치 유기체와 같이 성장하고 섭생한다. 건축물을 구성하는 각각의 노드는 전체 건축물의 구조와는 독립적이면서도 우연적인 발생들을 만들어내는데, 관람객들은 YCAM 각지에 위치하고 있는 증강현실적 건축물들을 관찰하며 살아있는 형식으로서의 건축물의 유기적 특성을 발견한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여러 센서가 하나의 서버로 통합되는 중앙 집중형 네트워킹 방식이 아닌, 센서들 간의 네트워크로서 중간에 센서가 사라져도 남은 센서들 사이에서 다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새로운 센서가 추가되어도 그것을 바로 네트워크에 포함시킬 수 있는 유기적인 방식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작품은 연결의 중심이 인간이 아닌 기술 그 자체로 이동하고 있음을 잘 드러낸다.

 

에드워드 이나토비치, 「센스터(Senster)」 사진=Senster
에드워드 이나토비치, 「센스터(Senster)」 사진=Senster

예술 주체, 인간과 기술이 뒤섞이다

‘초연결’의 개념이 인간 주체의 탈주체화 및 대상(객체)의 주체화로 나타난다면,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작동 기재는 바로 ‘지능’이 될 것이다. 앞서 시몽동의 주장대로 기술적 대상의 자기 진화는 스스로의 변화와 정지의 원리를 내포한다. 이는 기술이 그 자체로 대상의 위치에서 벗어나 주체의 입장으로 침투할 수 있다는 의미인데 인간의 지능과는 다른, 그러나 그 특성이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는 ‘인공지능’의 개념이 여기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일찍이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의 시도를 통해 로봇과 같은 기계-생명체와의 상호작용을 경험해왔다. 에드워드 이나토비치(Edward Ihnatowicz)의 「센스터(Senster)」는 이러한 사이버네틱스의 특성을 보여준 첫 번째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1969년에서 1970년 사이에 제작된 이 작품은 데이터 처리에 의해 행동(선택, 반응, 운동)이 결정되는 최초의 물리적 작품이다.

그것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민감한 마이크로폰과 모션 디텍터가 탑재되어 있어 감각적 데이터의 입력이 가능했고, 필립스의 디지털 미니컴퓨터를 이용해 이를 실시간으로 처리해냈다. 센스터의 상체는 여섯 개의 독립된 전자유압 서보메커니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를 통해 여섯 단계의 자유도를 구현할 수 있었으며 관람객의 반응에 상호작용해 스스로의 판단을 기초로 행동 방식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센스터」가 보여준 행위를 예술 주체로서의 자율성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작품은 그 자체로 자체적인 행동 양식을 지니고 있지만, 본체의 프로그래밍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에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센서에 의해 반응하고 행동하는 「센스터」의 다양한 방식들은 인간 주체의 인식 범위 속으로 제한된다. 다만, 자율성을 기반으로 새로운 요소를 생성시키는 발생적 특성을 갖는 작품과 예술을 판단하고 생산하는 형태의 경우 이전과는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발생예술은 자기-행동양식을 전제로 자기증식환경을 구성하며 작가는 창조주와 마찬가지로 작품의 환경적 요건을 구성할 수 있지만, 작품의 전개 방식 모두를 관장할 수는 없다. 또한, 예술성을 인지하고 이를 발생시키는 프로그램의 경우, 예술 주체로서의 인간의 범주를 상회한다. 이제 예술의 주체는 자연적 인간만이 아닌 혼성적인 특성을 수반한 기술적 대상으로 진화하고 있다. 기술 그 자체로 (자기-조직화의 과정을 거쳐) 과거의 목적-지향적 결과물을 상회하여 감성적 결과물을 내어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 또한 기술적 대상과의 상호 변환 과정을 전제한 새로운 혼성적 주체로서 예술 작품을 창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초연결’ 및 ‘초지능’ 예술이 제기하는 문제의식은 단지 ‘연결’과 ‘지능’의 확장적 차원만을 겨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초월’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초과’되고 있는 무엇인가를 향하여 회귀할 뿐이다.

 

유원준 영남대 디자인미술대학 교수

미술평론가이자 미디어문화예술채널 앨리스온(AliceOn)의 설립자다. 과학·기술 매체와 예술 융합의 다양한 지점에 관해 연구하고 있으며 영화와 게임, 만화와 공연 예술 등 전통적인 미술(시각예술)의 범주를 넘어 문화 예술 콘텐츠 전반에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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