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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파노라마]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 작가주의 디자이너
[디자인 파노라마]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 작가주의 디자이너
  • 오창섭
  • 승인 2022.03.31 08: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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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디자인 파노라마 ⑪_오창섭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2021년 서울아트북페어에서 열린 UE100(Unlimited Edition 100)의 풍경이다. 전시나 페어는 작가주의 디자이너들의 중요한 활동무대로 자리하고 있다. 사진=오창섭
2021년 서울아트북페어에서 열린 UE100(Unlimited Edition 100)의 풍경이다. 전시나 페어는 작가주의 디자이너들의 중요한 활동무대로 자리하고 있다. 사진=오창섭

“작가가 되고 싶은데요.” 진로에 관해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종종 듣는 말이다. 작가라고 해서 글을 쓰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맥락상 그들이 말하는 작가란 디자인 작가를 의미한다. 디자인 작가? 사실 익숙한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사진작가, 극작가, 웹툰 작가처럼 작가라는 표현을 사용해 해당 영역의 창작자를 의미하는 표현이 없는 게 아니니 디자인 작가라는 표현도 가능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디자인 영역의 창작자를 가리키는 ‘디자이너’라는 표현이 이미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굳이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일까? 디자이너는 작가가 아니라는 말인가? 무엇인가를 창작하는 사람을 작가라고 한다면 디자이너는 기본적으로 작가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데도 디자이너가 아니라 작가라고 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일까?

 

산업화로 다각화된 디자이너 정체성

디자인은 디자이너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활동이다. 지금까지 디자이너는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아왔다. 이는 인 하우스 디자이너는 물론이고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아 운영되는 디자인 전문회사의 디자이너, 심지어 프리랜서 디자이너 경우도 다르지 않다. ‘작가주의 디자이너’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희망과 의지를 담고 있는 표현이다. 전통적인 디자이너가 걸었던 길, 다시 말해 의뢰자의 요구를 따르는 디자인이 아닌 제3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자이너가 스스로 자신이 수행할 디자인의 의뢰자가 된다는 말이다. 쉽게 말해 자신이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하겠다는 것이고, 바로 이런 맥락에서 ‘작가주의’라는 표현이 ‘디자이너’의 수식어로 사용됐다.

역사적으로 볼 때 디자인 작가는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디자인이 미술의 맥락에서 정의되던 초기만 하더라도 디자인을 공부한 이들 대부분은 작가로 활동했다. 그들은 작품을 만들어 공모전에 출품하거나 전시를 통해 발표했다. 그들의 작품이 양산(量産)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 희미했던 것도 이유였겠지만, 무엇보다 산업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한국은 196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했다. 이후 산업화의 진전은 기능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에서 제품의 존재 방식을 고민하는 디자이너를 필요로 했다. 시장이 확대되면서 판매를 위한 광고 디자이너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변화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가 아니라 제품 생산에 역할 하는 근대적 의미의 디자이너들을 등장시켰다. 실제로 기업에서 이런 디자이너를 채용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70·80년대를 지나면서는 디자이너의 탈작가적 직업 정체성이 분명한 것이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디자인 작가가 사라진 건 아니다. 그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든 디자인 분야에서 작품을 만들고 전시하는 작가적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당연히 어떤 필요가 이를 지탱하고 있었다. 작품을 발언의 매체로 이해하는 이들의 필요는 말할 것도 없고, 존재를 드러내거나 상징자본을 획득하는 유용한 방편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필요도 빼놓을 수 없다. 대학의 연구실적평가 제도와 같이 그것을 여전히 존재하게 하는 제도들의 요구도 무시할 수 없다. 이래저래 작가적 맥락에서의 활동은 사라질 수 없는 구조였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직업 정체성이 분명한 것으로 자리하면서 그런 움직임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다. 이전 시대의 흔적기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말이다.

 

새로운 작가주의 디자이너의 등장

2000년대 중반 무렵,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새로운 작가주의 디자이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술을 그리워하는 올드 보이들의 관성적 몸짓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이전 시대가 디자인 작가를 등장시켰던 것과는 다른 배경이 있었다는 말이다.

2000년대 중반 무렵에 본격화된 작가주의 디자이너 현상은 변해버린 사회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시작은 1997년 말 IMF 사태였다. IMF 사태는 이념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낙관적 분위기로 충만했던 90년대의 종말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IMF 사태를 계기로 한국 사회는 소위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체제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현실에서 자각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사회는 이전과 다른 세계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지만, 이전 시대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따르려는 몸짓들 역시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발을 딛고 있는 바닥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바닥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에서 달리는 (사실은 허우적거리는) 디즈니 만화 속 슬픈 캐릭터의 몸짓과 유사한 것이었다. 하지만 오인에 기반한 그런 버둥거림의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사회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인식을 뚜렷하게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비판적 움직임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작가주의 디자이너가 하나의 현상으로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취업을 하려고 해도 취업이 쉽지 않았고, 설령 취업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살아남기 위해 버둥거려야 했으며, 그것도 박봉의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아 디자이너들의 직업적 만족도는 그 어느 때보다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그들이 하는 디자인 업무도 더욱 강화된 자본의 논리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이 작가주의 디자이너를 하나의 대안으로 바라보게 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디자인미술관 등을 중심으로 다수의 디자인 관련 전시들이 열렸는데, 이 역시 그런 시각을 만들어내는 데 역할을 했다. ‘그래? 그렇다면 차라리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다’라는 냉소적이면서도 비판적인 태도는 이전의 디자인 작가들과 구별되는 이 시기 작가주의 디자이너들이 공유하던 마음의 상태였다.

작가주의 디자이너들은 고유한 관점과 해석, 자신의 관심과 취향을 중심에 두고 작업했다. 그들은 예술가처럼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자신의 취향과 해석이 담긴 고유한 디자인 산물을 만들어 팔겠다는 디자이너적 의지도 강했다. 그렇다고 일반적 상품 세계의 소비자인 다수의 대중을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비록 소수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관점과 취향에 공감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자신의 작업을 알아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작업했다. 이것은 타인의 취향과 욕구를 수동적으로 맞추려고 했던 이전 시대의 디자인과 분명 구별되는 것이었다.

작가주의 디자이너는 전통적 의미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기획과 생산, 유통 모두를 책임져야 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작가주의 디자이너 현상은 그래픽디자인처럼 그것들이 어느 정도 수월한 분야에서 처음 나타났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작가주의 디자이너의 활동 범위는 확대되고 있다. 메이커 문화와 연결되어 간단한 소품은 물론이고 조명이나 가구, 심지어는 디지털이나 영상 분야에서 활동하는 작가주의 디자이너들도 많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디자인계의 새로운 희망의 징후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어쩌면 이 업계가 그만큼 어렵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오창섭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디자인연구자로 한국디자인학회 최우수 논문상(2013)을 수상했으며,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안녕, 낯선 사람> 전시(2017)와 DDP디자인뮤지엄의 <행복의 기호들> 전시(2020)를 기획했다. 저서로 『내 곁의 키치』,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 메타디자인을 찾아서』, 『인공낙원을 거닐다』,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 『근대의 역습』, 『우리는 너희가 아니며, 너희는 우리가 아니다』 등이 있다. 현재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타디자인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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