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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속 ‘멜론’으로 갈증 달래며 도착한 그곳 … 오, 역사의 황량함이여!
폭염 속 ‘멜론’으로 갈증 달래며 도착한 그곳 … 오, 역사의 황량함이여!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4.07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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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_9. 李太白의 고향 碎葉城, 악베심 유허(2)


▲ 악베심(쇄엽성) 유허 앞의 필자. 사진 이정국

토크목 남서 약 8km 지점에 이태백의 고향 쇄엽성터가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현지어로는 악베심(Ak-Beshim)이라 했다. 케밥으로 잔뜩 배를 불린 일행들은 차에 오르며 이미 반은 졸고 있었다. 아무리 졸려도 안 가볼 수 없었다. 물 좋은 멜론으로 정신을 차리고 악베심을 찾아 떠났다.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고난은 결혼이다.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은 망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해 사랑에 빠진다.”
때는 1938년의 어느 날 밤.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시켁(당시는 Frunze라 부름) 남방 ‘큰 바위(big rock)’라는 뜻을 가진 추 주(Chui Province)의 작은 마을 총 타시(Chong Tash). 여기에 소련의 비밀경찰 NKVD(후일의 KGB)가 들이닥쳤다. 대숙청의 일환으로 키르기즈스탄의 정치인, 교사, 과학자, 지식인 137명을 몰래 비시켁 교도소로부터 끌고 와 비밀리에 처형했다. 당시 키르기즈스탄은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었다. 시신은 마을 근처 산악 지역에 있던 벽돌 가마 속에 버렸다.

이것이 중앙아시아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스탈린의 악독한 탄압 행위 가운데 하나다. 스탈린, 이 나쁜 남자가 바로 같은 시기 연해주에 정착해 살고 있던 우리 동포 고려인들을 강제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태워 중앙아시아 불모의 땅에 이주시킨 장본인이다.


비밀 살해 사실이 알려진 건 1991년 구 소련으로부터 키르기즈스탄의 독립 직후. 사건 당시 그곳의 관리인이었던 남자가 죽음에 임해 딸에게 감춰졌던 진상을 밝히면서다. 기막힌 사실을 확인한 키르기즈스탄 정부는 시신을 발굴해 아타 베이트(Ata-Beyit: ‘우리 아버지들의 무덤(The Grave of Our Fathers)’)라 불리는 마을 교외에 재매장하고 이들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했다.

사정은 똑 같지 않지만, 유사한 일이 21세기에 또 다시 러시아에 의해 벌어졌다. 남의 이목이 있으니 사람을 죽이는 일은 삼가고 있지만, 주민 투표에 의한 민주적 절차라는 설득력 없는 자기들만의 명분과 무력을 앞세워 크림반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탈취한 것이다. 나쁜 자국이기주의인 민족주의 앞에 양심은 없다. 과거 키르기즈스탄은 물론 카자흐스탄을 포함한 전 중앙아시아 지역을 강제 병합했던 것도 무력을 빌린 소련의 야욕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런 과정 중에 초원의 용맹한 전사 코삭인들(Cossacks)을 차출해 크림반도의 타타르인들을 비롯한 몽골제국의 후예들을 죽이고 몰아냈다. 코삭인들의 땅은 선심 쓰듯 제멋대로 국경을 획정하고 Kazakhstan(카자흐의 땅)이라 불렀다. 코삭, 즉 카자흐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역사를 알면 슬프다.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런 판에 여름철 중앙아시아는 무덥고 건조하다. 키르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서 투르케스탄 지역에서나 그 동편, 돈황 하미 투르판을 거쳐 카시가르로 이어지는 천산 남변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간식으로 하미과라 불리는 현지 참외를 먹지 않는다면 돈 들여 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놓치게 된다. 고로 멜론 먹기는 필수다. 그것도 때마다. 둘이 먹다 상대가 어디로 사라져도 모를 만큼 달고 맛있는 이 멜론을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바로 이 맛이야!”라는 탄사가 절로 나온다. 절대 과장이 아니다.


어른 머리통 두세 개는 됨직한 멜론 하나의 값은? 놀라지 마시라. 2001년에는 20숨(1 sum은 당시 환율로 우리 돈 15원). 싸도 너무 쌌다. 오죽하면 몇 개 사 가지고 오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값이 오르더니 10년 후인 2011년에는 값이 20배 정도 뛰어 있었다. 경제 현실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도 한 덩어리 자르면 열 명이 두세 조각씩 물 뚝뚝 흐르는 이 과일을 흡족하게 먹을 수 있으니 절대 비싼 건 아니다. 중앙아시아를 몇 차례 여행하며 나는 멜론 먹는 재미에 푹 빠졌다. 올 여름에도 이걸 맛보러 중앙아시아나 실크로드로 떠날까? 생각만으로도 흥분된다.

아무리 이태백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 의미 있다 해도 날 더운데 멜론 몇 조각은 먹어줘야 여행이 여행답다. 그래서 미리 사둔 멜론을 망설임 없이 잘랐다. 현지 여인들의 금이빨에 대해 궁금해 하는 최 고문의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주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도대체 여기 여자들은 왜 금이빨을 한다요? 연 교수, 그 까닭을 몰라요?” 이태백의 시 「戰城南」을 잘난 체 읊조려보려던 찰나 최 고문이 분위기를 깬다. 날도 더운데. 여럿이 여행하면서는 사소한 일로 열 받으면 안 된다. “오시(Osh) 가서 맘먹고 설명 드릴게요.” 나는 또 답을 미루고 멜론을 내밀었다. 오늘은 Osh가 중국 사서에는 郁成城으로 기록된 도시라는 점만 알면 충분하다. 이백을 만나보자.

戰城南

지난해에는 상건하(桑乾河) 상류에서,
올해는 타림강(蔥嶺河)을 건너 전투를 벌였네.

조지 호수 일렁이는 물결에 병기를 씻고,
天山 눈 덮힌 초원에 말을 풀어 풀을 뜯긴다.

만리 머나먼 원정길에
삼군의 장병 모두 지치고 늙어가네.

흉노는 사람 죽이기를 밭가는 것쯤으로 여겨,
예부터 보이는 것은 누런 모래밭에 드러난 백골뿐.

秦나라는 만리장성 쌓아 오랑캐를 막았건만,
우리 당나라는 전쟁 알리는 봉화(烽火)만 피어 올리는구나.

봉화가 꺼지지 않으니,
원정 나가는 전쟁이 그칠 새가 없음이라.

병사는 야전에서 격투 중에 전사하고,
주인 잃은 말은 하늘 향해 슬피 우네.

까마귀와 소리개가 죽은 사람의 창자를 쪼아대더니,
부리에 물고 날아올라, 죽은 나뭇가지에 걸어놓는구나.

병사는 죽어 잡초 위에 버려졌으니,
장군이 공연한 짓을 하였구나.

이제 알겠노니 전쟁이 얼마나 흉악한지
성인은 부득이한 경우에만 전쟁을 벌인다는 것을.

이름 하여 ‘戰城南 (성남에서의 전투)’이라는 제목의 시가다. 당시 長城 남쪽에서 툭하면 당나라와 이민족과의 싸움이 벌여졌던 모양이다. 전쟁 자체는 잔인한 것이지만, 이 목가적이고도 슬픈 전쟁시를 읽다보면 이태백의 출신이 여기 서역 어디일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이역의 지리를 잘 아는 것으로 보아 전쟁에 직접 참여했을 수도 있다 여겨진다. 앞에서 그의 고향을 碎葉城이라 했다.

▲ 너무 맛 있어 여행의 피로와 고향 생각을 잊게 하는 멜론.


그렇다면 이태백의 고향이라고 추정되는 쇄엽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리고 중국인들은 왜 碎葉이라고 했을까. ‘물 [강]가의 (도시)’라는 뜻의 페르시아어(혹은 당시 현지 언어인 소그드어) Suy-ab의 음차자의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皇城 혹은 軍營 (ordu)의 도시 (kent)’ 라는 의미의 Ordukent라고도 불렸다는 점을 살펴 알았다. 『新唐書』 西域前에 쇄엽성의 위치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쇄엽이란 강이 있으니 安西(도호부) 서북 천리 되는 곳에서 흘러나와, 베델고개(Bedel Ashuu, 勃達嶺)까지 이르러, 남으로 중국에 다다르고, 북으로 돌기시의 남쪽 변방에 이르며, 서남으로 곧장 총령까지 2천리를 흘러간다. 남으로 흐르는 물은 중국을 지나 호수(롭 노르)로 흘러들며, 북으로 흘러서는 호(胡, 돌궐)를 지나 호수(발하시호)로 들어간다. 북으로 3일을 가면 雪海를 건너는데 봄여름 항상 비와 눈이 온다. 베델고개를 지나 북으로 천리를 가면 細葉川에 이른다.

동으로 熱海(이식쿨)가 있으니 땅은 차도 얼지 않는다. 서쪽에 쇄엽성이 있으니 천보 7년(748년) 北庭節度使 王正見이 안서를 정벌할 때 그곳을 격파했다. 세엽천의 길이는 천리로 이곳에서 異姓 突厥兵 수만 명이 있으며, 농사짓는 이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서로 약탈을 일삼아 노비를 삼는다. 서쪽은 탈라스성에 속해 있으며, 石國이 항상 그곳에 병사들을 나누어 주둔시키고 있다. 이곳으로부터 물이 흘러 西海(아랄해)에 도달한다. 3월에서 9월까지 비가 오는 법이 없어 눈 녹은 물(雪水)로 밭에 물을 댄다(참고: 北庭은 투르판 북방의 베시발릭(Beshbaliq, ‘首都’라는 뜻)).”


이로 보아 쇄엽성은 細葉川 동쪽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細葉川은 오늘날의 악베심 근처를 흐르는 추강(the Chuy River)이다. 길이가 천리가 된다는 기록처럼 북으로 흘러 다른 여덟 개의 강들과 함께 카자흐스탄 발하시 호수로 흘러들어간다. 이 일대에 서돌궐의 맹주 돌기시(Turgish)가 자리 잡고 있었다.


위 기사에서의 安西는 당나라의 수도인 長安의 서쪽, 즉 西域을 관장하는 안서도호부를 가리킨다. 안서는 한나라 이후 西域으로 불렸던 지역이다. 참고로 安南은 장안의 남쪽 지방으로 인도차이나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이 바로 安南米다. ‘알랑방귀’라는 말은 안남미로 밥을 해 먹으면 소화가 금세 되고 방귀가 쉽게 나오는 때문에 생겨났다. 지금처럼 찰지고 좋은 쌀 나오기 전 안남미 먹고 이 나라 백성들은 알랑방귀 깨나 뀌었다. 보리밥 먹고는 보리방귀를 푸지게 꿔댔다.


안서도호부는 당 태종 즉위 15년 되던 해인 貞觀 14년(640년)에 侯君集이 麴씨의 나라 高昌國(오늘날의 투르판 동남 高昌 廢址)을 평정한 다음 설치됐다. 처음 治所는 西州(고창)에 있었다. 그 후 태종의 뒤를 이은 현종 치세 顯慶 3년(658년)에 치소가 龜玆(오늘날 중국 신강성 위구르 자치구 高車 동쪽 교외 皮朗 舊城)로 옮겨졌다. 관할구역은 알타이산맥 已西와 咸海(이식쿨) 已東, 아무다리야 유역과 파미르 고원의 동쪽과 서쪽, 타림 분지의 대부분 지역이었다. 그후 고종 22년인 咸亨 元年(670년)에 龜玆가 吐蕃에 점령되자 치소는 碎葉鎭으로, 長壽 2년(693년)에는 다시 龜玆鎭으로 옮겨간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貞觀 22년(649년) 안서도호부 소관의 安西四鎭이 설치됐는데, 구자, 疏勒(현 카시가르), 于(현 호탄), 焉耆(현 카라샤르)가 여기 해당한다. 咸亨 元年(670년)에 이 일대를 토번에게 빼앗기자 언기를 버리고 쇄엽을 4鎭의 하나로 삼고 그곳을 치소로 정한다. 그러다 長壽 2년(693년)에 토번을 격파하면서 다시 구자를 치소로 삼은 것이다. 改元 7년(719년)에는 쇄엽성을 서돌궐의 十姓可汗에게 내어주고 언기를 4鎭의 하나로 되삼았으나 安史의 난 이후 토번에게 이 지역을 다시 뺏기면서 안서도호부는 완전히 폐지됐다.

어린 시절 읽은 『손오공』 혹은 『西遊記』는 무한 환상의 무대였다. 말 깨나 안 듣는 손오공, 욕심쟁이 저팔계, 바보 사오정을 다독여 서역으로 구법여행을 떠나는 삼장법사가 나는 안타깝고 부러웠다. 당나라 초기의 고승이자 번역가인 실제 인물 玄三藏(602~664년)의 천축 견문기 『大唐西域記』를 모티브로 하여 명나라 때 吳承恩에 의해 만들어진 소설이 『서유기』다. 현장이라는 법명 뒤의 삼장은 經藏·律藏·論藏에 능한 승려에게 붙이는 별칭이다. 따라서 삼장법사는 한 사람만이 아니다. 현장은 당시의 한문 불교 경전의 내용과 계율에 대한 의문점을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 원전에 의거해 연구하려고 627년(혹은 629년)에 천축(Sindh의 음차자로 印度를 가리킴)을 향해 떠나 645년에 귀국했다. 이 이가 중도에 고창(투르판)과 구자를 거쳐 쇄엽에 당도한다.


▲ 李白(701~762년)은 字가 太白이며, 號는 青蓮居士다. 자칭 祖籍陇西成紀(오늘날의 甘肅省 静宁西南). 隋末에 그의 선조가 서역 쇄엽(碎叶(Suyab): 현 키르기즈스탄 북부 토크마크 부근의 악베심 지역으로 唐나라 때 安西都護府에 속했다)으로 이주해갔다가, 유년시절 아버지와 함께 绵州 昌隆(현 四川省 江油) 青莲鄕에 옮겨와 거주했다. 당시 그곳에서 벌어진 전란을 피해서 그랬을 것이라 짐작된다.
『大唐西域記』에서 현장은 쇄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한다.
“쇄엽(현장은 素葉으로 기록)은 서쪽으로 수십 개의 성이 있는데, 성마다 長을 두었다. 명령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투르크(돌궐)에 예속돼 있다. 쇄엽에서 카산나국(Kasana or Kushane)에 이르기까지 토지는 소그드라 이름하여, 사람은 소그드인이라 한다. 문자, 언어도 그 명칭을 소그드 문자, 소그드어라고 일컫는다.”


여기를 우리는 가려고 하는 것이다. 토크목 남서 약 8km 지점에 이태백의 고향 쇄엽성터가 있다고만 알고 있었다. 현지어로는 악베심(Ak-Beshim)이라 했다. 케밥으로 잔뜩 배를 불린 일행들은 차에 오르며 이미 반은 졸고 있었다. 아무리 졸려도 안 가볼 수 없었다. 물 좋은 멜론으로 정신을 차리고 악베심을 찾아 떠났다. 가이드도 기사도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거길 왜 가는지 고개만 갸우뚱 거렸다. 날은 더운데 밖에 나와 있는 주민들도 없고, 마침 길 옆 펌프에서 물을 받아 머리에 끼얹으며 더위를 식히던 소년이 말귀를 알아듣고 손짓으로 위치를 잡아준다. 막상 도착한 쇄엽성터는 말 그대로 황량했다. 어디 가서 발굴보고서라도 찾아봐야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19세기 악베심 유허는 카라 키타이(西遼)의 수도였던 발라사군(Balasagun)으로 잘못 알려진다. 그러나 1938년 발굴을 시작해 1950년대에 이르러 이곳이 11세기 이래로 폐허였음이 확인됐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악베심이 14세기까지 번성했던 발라사군일 수는 없었다. 쇄엽성 유적지 면적은 30헥타아르 정도. 과거 쇄엽성의 다양하고 활기 넘치던 문화에 대한 증거로 당나라가 구축한 성채, 불교 사원과 네스토리우스 예배당, 조로아스터교 납골당, 돌궐족의 발발, 불상과 석비와 같은 유물 유적이 발굴됐다. 특히 주목할 것은 소그드 문자와 위구르 문자로 기록된 비문. 이러한 사실로 미뤄 당나라가 지배했을 당시 이곳 주민의 대다수는 소그드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장법사 현장도 거론한 소그드인 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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