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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문명의 오해 넘어서 인식 지평 넓힐 수 있는 ‘경계’가 있었다!
그곳에 문명의 오해 넘어서 인식 지평 넓힐 수 있는 ‘경계’가 있었다!
  • 연호택 관동대·영어과
  • 승인 2013.12.3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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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연재를 시작하며


▲ 키르키즈의 장엄한 한 풍경이 시선을 압도하고 있다. 시시때때로 급변하는 초원의 경계 끝에 거기 인간이 점처럼 서 있다. 사진제공 이정국

10회까지의 연재 목차
01. 流浪의 시작, 月支의 西遷(1)
02. 流浪의 시작, 月支의 西遷(2)
03. 유목민 塞種의 요람 이식쿨 호수와 烏孫의 赤谷城(1)
04. 유목민 塞種의 요람 이식쿨 호수와 烏孫의 赤谷城(2)
05.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시켁, 나린과 石城 타시 라바트(1)
06.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시켁, 나린과 石城 타시 라바트(2)
07. 李太白의 고향 碎葉城, 악베심 유허
08. 동서 문명 교류의 시발, 탈라스 전투
09. 키르기즈인의 민족 서사시, 마나스
10. 이오니아인이 세운 나라 大宛, 페르가나


중앙아시아 기행이 흥미로운 것은 동서 문명의 교류 외에도 인간의 다채로운 습성 혹은 습속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고 그를 통해 인간을, 人文(사람살이의 발자취)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人文은 인류의 문화/인물과 문물/인륜의 질서를 통섭하는 개념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고 있다. 그 원인은 전쟁, 교역, 자연재해 등 다양하다. 사람의 이동은 언어, 문화의 접촉을 야기한다. 고대로부터 동양과 서양은 중간지대인 중앙아시아를 통해 서로 접촉 내지 충돌하는 과정 속에서 갈등을 빚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융합하며 자신의 문명을 전파하고 각자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동방과 서방 간의 문명 교류와 충돌은 주로 전쟁을 통해 발생했다. 전쟁은 길 위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이 길을 실크로드라 부른다.


중앙아시아는 東西의 중간지대가 아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서양문물에 경도돼 있고, 동양문명이라면 중국과 일본 위주로 알고 있다. 지리적으로도 멀지 않을뿐더러, 역사 문화적으로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중앙아시아를 너무 모른다. 중앙아시아 나라 이름의 어미인 ‘-stan’이 우리말 ‘땅’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기황후」라는 역사 드라마에서 황후가 되기 전 그녀는 ‘승냥이’로 불린다. 이것이 史實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건 貢女 출신의 고려 여인이 원나라 황제의 카툰(皇妃)이 되면서 얻은 이름이다. ‘솔롱고 올제이 쿠툭 카툰’이 그것이다. 흔히들 ‘솔롱고’를 ‘무지개의 나라’ 고려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알고 있지만, 기실 黃鼠狼(누런 족제비, solon)을 잡아 모피를 내다 팔아 생계를 꾸리는 종족을 가리킨다. 이들은 지금 북만주, 시베리아 일대에서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다. 그렇다면 기황후는 솔론족 출신의 고려국 여인인 셈이다.

한편 『契丹國志』에 “거란어는 索倫語를 本으로 한다”고 했다. 索倫語는 솔론족의 말이다. 과연 어찌 된 일인가? 거란족은 10세기에 흥기했다가 12세기 초 여진족이 중심이 돼 세운 금나라에 패망하고 그 한 갈래가 서천해 중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면서 카라키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종족이다. 요나라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침입한 소손녕이 서희와의 담판에서 자신들 거란족이 신라 박씨의 후손이라 한 건 또 무슨 연유인가? 양천 이씨의 조상이 色目人, 즉 돌궐인이라는 사실은 놀랍지 않은가? 우리 민족의 기원과 갈래를 알기 위해서라도 북방, 달리 말해 중앙아시아 초원의 역사와 문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일까. 시인 白石은 이런 시를 썼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 중략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북방에서」 중에서)


<교수신문>의 지면을 빌려 앞으로 40회 분량으로 매달 3회씩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을 떠나보고자 한다. 독자제현의 많은 질정을 부탁드린다.
중앙아시아는 광활한 지역이다. 또한 이곳의 역사는 온통 미스터리로 점철돼 있다. 필자는 중앙아시아의 역사(시간)를 날줄로, 인문지리(공간)를 씨줄로 삼아 때론 촘촘히 때론 엉성하게 엮어낸 바탕(옷감) 위에 문화, 풍습, 예술, 종교 등의 다양한 무늬를 짜 넣어 아름다운 인문학 기행이라는 한 벌의 완성된 의상을 만들고자 한다.


여기서 공간적 중앙아시아란 몽골 초원에서 알타이 산맥과 타림분지, 파미르 고원, 천산 산맥을 지나 광활하게 펼쳐진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를 거쳐 카스피해, 마침내 코카서스 산맥과 흑해에까지 이르는 지역을 포괄한다. 흔히 실크로드라 말하는 지역을 포함함은 물론이다. 시간적 중앙아시아는 기원전 8세기 경 유목민 스키타이가 無邊의 초원을 누비고 다니던 시절부터 파미르 고원과 天山山脈을 경계로 (사실 경계는 없다) 以西의 粟特 (소그드), 大宛, 康居 등의 집단과 以東의 塞種, 월지, 오손, 흉노가 서로 (혹은 정주문명 세력과) 교류하고 때론 쟁투하던 기원 전후의 시기를 거쳐, 선비와 돌궐, 거란, 몽골, 만주족이 잇따라 제국을 건설했다 스러진 근세까지의 시기를 아우른다.

역사의 아이러니와 숨겨진 이야기, 그 아픔을 넘어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고대의 스키타이 (혹은 페르시아에 의해 사카라고도 불린) 종족이 현재의 사하족으로 외롭게 존재하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물론 사하족 자신은 남들이 자신들을 야쿠트족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포함한 몇 가지 단편적 정보 외에 자신들의 뿌리와 이동의 역사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글에서는 이런 류의 역사적 아이러니와 허구,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를 종족과 문명 간 전쟁에 따른 이동, 접촉, 혼합의 결과를 바탕으로 폭넓게 보여줄 것이다.


지중해 시칠리아 섬 동남단 시라쿠사(Siracusa) 거리에 동상이 하나 서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한데 뒷머리는 민둥산, 발에는 날개가 달려있고 손에는 긴 채찍이 들려있다. 그리고 동상 아래 이런 글귀가 새겨져있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보았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가 없는 이유는 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는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며, 긴 채찍을 들고 있는 이유는 그래도 매달리는 놈들이 있다면 그들을 후려치기 위함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다.”


그렇다. 개인으로서건, 집단으로서건 삶의 길에는 기회가 있다. 이 기회는 쏜살같이 왔다 사라지는 것이기에 아무 곳에나 있지 않지만(no where), 바로 지금 여기(now here) 있기도 하다. 기회는 사람에게 미련을 두지 않는다. 영원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기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자는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는 자는 패배한다. 여기 중앙아시아 초원과 천산산맥, 몽골초원과 황토고원 등을 무대로 살아가던 유수한 유목 집단이 있다. 어떤 이는 호숫가에 살고, 어떤 이는 산중에 살고, 어떤 이는 황량한 초원에 살고, 또 어떤 이는 바람과 모래를 맞으며 사막에 살았다. 황량한 고원에 사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역사적 부침은 자못 슬프고 자못 흥미롭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시대를 풍미한 집단이 있는가 하면, 기회를 잡지 못해 굴종의 삶을 산 집단이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싸웠다. 인간의 속성, 특히 남성성은 싸움으로 존재의 이유를 찾았다. 알렉산더가 동방원정을 감행한 것도 싸움의 본능에 따른 것이다. 페르시아와 아테네가 서로를 용인하지 못하고 전쟁을 벌인 것도 싸움의 본능이 시킨 때문이다. 사람들은 심지어 한 집단 내에서도 싸움을 벌인다. 아버지가 자식을, 삼촌이 조카를, 아들이 죽은 아버지의 새 부인을 죽이는가 하면, 형제끼리도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씨족이나 부족들끼리도 걸핏하면 싸웠다. 싸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서였다. 싸움의 결과는 양측 모두에게 살상의 피해를 입혔다. 그럼에도 싸움이 끊이지 않은 것은 살상을 희생하고 얻게 되는 권력과 財貨 때문이었다. 부녀의 겁탈과 납치는 부수적 소득이었다.


기후가 불리해지고 생존이 위협받게 되면 초원의 유목종족은 농경을 위주로 살아가는 정주문명세력에게 시비를 걸고 때론 다짜고짜 쳐들어왔다. 한마디로 약탈을 위해서였다. 말을 이용한 기동력이 이들의 최대 강점이었다. 대개 정주세력이 속수무책 당했다. 이들에겐 바람 같은 말도 없었고, 귀신같은 활솜씨도 없었고,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난폭함 내지 저돌성이 없었다. 그렇다고 유목집단이 꼭 잔인하거나 반문명적이라는 애기는 아니다. 다만 힘센 자가, 혹은 기회를 노린 자가 득세하면 뭔가 노림수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흉노는 비단을 만들 줄 몰랐다. 비단을 짤 재료도 환경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경험상 비단이 좋다는 걸 알았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방법은 뺏는 길이 최선이었다. 뺏고도 모자라 더 내어노라 겁박하고 약조를 받았다. 중국에 비단이 귀해진 반면 흉노 지배세력에게는 비단이 남아돌았다. 잉여품은 다른 필수품과 교환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렇게 해서 교역의 역사는 시작됐다. 흉노에 의해, 한족에 의해, 또 다른 이민족에 의해, 더 이전에는 스키타이와 희랍에 의해, 로마와 중국 간에 교역이 이뤄졌다.

그러나 로마는 유감스럽게도 중국과 직교역을 할 수 없었다. 중개 이익을 뻔히 알고 있는 페르시아가 장삿길을 순순히 내어줄 리가 없었다. 결국 두 세력 간의 싸움은 필연이었다. 어디 여기, 이 시점뿐이랴. 사라센에 막힌 중세 유럽이 탈출구를 찾아 움직인 것이 대항해시대를 열지 않았는가? 풍운아 콜럼버스가 풍요의 아시아, 금이 넘쳐나는 땅 인도를 동경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품에 끼고 떠난 여정이 신대륙 발견의 결과를 낳았다. 물론 원주민과의 싸움은 피치 못할 일이었다. 이 싸움에서 외부의 침입자가 이기고,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졌다. 원치 않은 전쟁으로 대부분이 죽고, 더러운 유럽인들이 들여온 질병에 감염돼 나머지가 죽었다. 신대륙에는 은이 많았다. 노동력이 절대 부족하자 아프리카에서 ‘검은 짐승’(유럽 가톨릭교도들에게 有色의 이교도는 사람이 아니었다)을 들여왔다. 노예의 탄생이다.

미지의 지역 그리고 숨겨진 진실을 찾아서
채륜에 의해 발명된 제지술이 서방에 전파된 것도 전쟁 때문이다. 이 전쟁은 새롭게 등장 한 중동의 종교 이슬람 세력이 힘자랑을 하느라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발발했다. 빼앗고, 빼앗고, 계속해 뺏는 재미에 맛을 들인 압바시아왕조(Abbasid) 치세의 이슬람이 스스로 멈출 리는 없었다. 다행히(?) 중앙아시아에 진출해 있던 당나라 세력이 있었다. 이 세력이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둘은 붙었다. 이것이 두 세력의 명운을 가르고 역사를 만들었다.


때로 화친도 이뤄졌다. 여자가 매개물이었다. 당태종이 문성공주를 티베트의 송첸감포왕에게 출가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서시, 초선,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꼽히는 왕소군은 야만스런 흉노 호한야 선우(흉노왕의 칭호)에게 팔려가야 했다. 잘난 척하던 한고조 유방도─본래는 찌질남(?)이었다가 기회를 잘 잡아 그리고 운이 좋아 항우를 이기는 바람에─평성 백등산 전투에서 죽을 뻔 했다가 뇌물을 바치고, 공주를 선우의 여자로 바치고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전쟁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신왕조 혹은 새 제국을 창건한 세력은 부단히 전쟁에 골몰했지만 대다수 민중은 제 각각 살아야 했다. 전쟁 이외의 다른 수단에 의거해 생존을 영위해야만 했다. 자급자족에는 한계가 있었고, 일상에는 부족한 것이 너무 많았다. 원시경제의 물물교환이 점차 화폐를 이용한 물자 교역으로 계승됐다. 전문 상인이 탄생하게 됐다. 장사가 돈벌이가 된다는 걸 눈치 챈 국가나 성직자들이 직접 교역에 뛰어들었다. 혹은 각종 세금으로 배를 불렸다. 교회와 국가는 눈이 맞았다. 손발도 척척 맞았다. 거룩한 십자군 전쟁의 이면에는 교황과 황제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궁극적으로 인간사의 기록인 역사의 이면에는 이렇듯 숨겨진 진실이 많고도 많다. 중앙아시아 기행이 흥미로운 것은 동서 문명의 교류 외에도 인간의 다채로운 습성 혹은 습속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고 그를 통해 인간을, 人文(사람살이의 발자취)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人文은 인류의 문화/인물과 문물/인륜의 질서를 통섭하는 개념이다. 나는 책상머리 지식에 더해 제법 오래된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아직까지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미지의 지역인 중앙아시아에 대한 인문학 기행을 시작하려 한다.

 

연호택 관동대·영어과

필자는 충청도 사람이다. 한국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준비중에 있다. 정도전에 따르면, 충청도 사람은‘맑은 바람 밝은 달(淸風明月)’의 특질을 지녔어야 한다. 과연 그럴까? 현재는 ‘岩下老人’과도 같다는 강원도 하고도 대관령 넘어 강릉 땅 관동대에서 30년 가까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30여 년 세상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 차를 즐겨 마시다보니 관심이 생겼고 그로 인해 20여 년 전에는 <중앙일보>에 매주 ‘茶의 故鄕’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이라는 칼럼을 쓰고‘닥터 트래블’, ‘開口 영어’같은 여행 영어 칼럼도 연재했다. 나름 좋은 책이라고 자부하는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등이 있다. 내겐 꿈이 있다. 몽골초원에서 시작해 西로의 여행을 시도하는 것이 그것이다. 누군가는 걸어서, 누군가는 낙타를 타고, 또 누구는 차량을 이용해 이 노정을 답파했다. 나는 말을 타고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이 길을 가고 싶다. 몸이 쇠약해져 마음마저 무력해지기 전 꿈을 실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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