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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알프스’, 高原의 나라에 새겨진 민족의 흔적들
‘중앙아시아의 알프스’, 高原의 나라에 새겨진 민족의 흔적들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1.2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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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_ 3.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시켁, 나린과 石城 타시라밧?

 

▲ 이식쿨 호수 서단을 지나 남쪽으로 나린을 향해 가는 도중 어느 고개 위에서 바라본 풍경. 한 여름에도 눈덮힌 천산 봉우리가 보인다. 옛사람들은 멀고 가파른 이 고갯길을 넘어 장사를 떠나고 유목생활을 했다. 때론 혼인을 위해 넘나들기도 했을 것이다. 사진 이정국

그들은 왜 이렇게 이 길을 왔을까? 고향으로부터 수 천리 머나먼 길이다. 나는 그들의 대이동 모습을 상상하면서 나린 초원의 모습을 그려봤다. 치렌산을 떠나 천산을 거쳐 강이 흐르고 초원이 있는 일리 분지에 일시 거주하던 월지가 또다시 길을 떠나야 했던 사연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어떤 정보로 왜 나린을 목적지로 삼게 됐을까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인간에 대해 관찰하면 할수록 내가 기르는 개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파스칼

1926년 볼셰비키 군지도자 미하일 프룬제(Mikhail Frunze)의 이름을 따서 얼마 전까지 푸른제(Frunje)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시켁(Bishkek). 구소련 치하에서 Pishpek으로 바뀌었다가 1991년 독립과 함께 키르기즈 의회가 이 도시의 역사적 이름을 복원했다. 천산의 연장 키르기즈 알라투 산맥의 북쪽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이 도시의 고도는 해발 800m. 건강에 가장 적합한 행복 고도다. 알라투(Ala Too)라는 명칭의 문자적 의미는 ‘얼룩산(ala ‘알록달록한’, too ‘산’). 우리말 ‘얼룩소’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얼룩배기 황소처럼 산의 무늬가 두드러진 걸까. 비시켁 시내에 있는 광장 이름도 ‘알라투’다.


비쉬켁은 고대에는 코칸드(Khokand)를 포함, 페르가나(Ferghana: 중국 사서의 大宛)라 불리던 지역에 속한다. 코칸드는 무엇이고 페르가나는 또 무엇인가. 무릇 모든 이름에는 의미가 있고 사연이 있거늘…… 이 낯선 이름들의 의미나 어원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순차적으로 얘기할 것이다.


비시켁이라 불리기 전 이곳은 아마도 천산을 통하는 실크로드 대상들에게 음식과 잠자리, 각종 여행정보 등을 제공하는 일개 부락에 불과했을 것이다. 주민들은 대부분 소그드인(Sogdians). 뭔가 당시의 이름이 있었을 것이나 누구도 그에 대해서는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러다가 이곳은 1825년 ‘Bishkek’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으며 당시 코칸드를 통치하던 우즈벡 칸에 의해 키르기즈 코칸드(Khokand)의 요새(진흙 성채였다)로 새롭게 건설된다. 신도시의 탄생이다. 그리고 다시 1862년 구소련이 중앙아시아를 강제 병합하면서 러시아식 발음 ‘Pishpek’으로 개명 아닌 개명을 한다. 코칸드 칸 가문은 정확히는 우즈벡족의 한 지파인 밍 부족 출신으로 이 시기의 지배자는 무함마드 알리 칸이었다.


‘Bishkek’이라는 명칭은 키르기즈인들의 국민 음료 쿠미스(kumis)를 만드는 교유기(攪乳器, churn: 대개 말가죽으로 만들어 유르트 안쪽에 걸어둠)를 가리키는 키르기즈 말에서 파생됐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요람’이라는 뜻의 투르크어 ‘비시크’에서 비롯됐다고 믿는다. 이 말은 사람 이름에도 쓰인다. 무슬림 사료에서 16세기 중반 코칸드 칸국의 건설자로 간주되는 우즈벡의 한 지파인 밍 부족 알툰 비시크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Altun Bishik’ (Altun Beshik, Altin Bishik, Altin Beshik)은 ‘황금 요람’이라는 의미다. 참 재미있는 사람 이름이다. 하기는 ‘늑대와 함께 춤을(Dance with a wolf)’,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따위의 이름도 있는 판이다.


馬乳酒인 쿠미스는 누구든지 유르트(yurt 혹은 yurta: 유목민 텐트)를 드나들 때마다 마유를 수시로 휘저어 발효시켜 만드는데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해 시큼 텁텁한데 영양은 최고다. 몽골인들은 이런 마유주를 ‘아이락(ai rag)’이라 부른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는 ‘체게(tsegee)’라 한다. 이로 보아 키르기즈와 몽골은 다른 종족이며, 몽골족 내에도 혈연이 다른 집단이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쿠미스는 분명 오랜 역사를 지닌 음료라 할 수 있다.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헤로도투스는 『역사(Histories)』에서 스키타이인들의 마유 가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짜낸 우유를 속이 깊은 나무통에 쏟아 붓고 눈먼 노예를 근처에 두어 우유를 젓도록 한다. 휘저어 발효시킨 마유의 윗부분이 최상의 것이며, 아래쪽의 것은 별로다.”


13세기 플랑드르 출신의 프란체스코파 선교사로 몽골을 방문한 윌리엄(William of Rubruck, 1220~1293)도 타르타르인들(the Tartars, 몽골인을 말한다)에게 마유주를 대접받고 그 이름을 자신의 여행기에 ‘cosmos’로 소개했다. 언어의 전달과 기록은 이렇듯 불확실하다. 말을 통해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의 애로가 이런 데 있다.


여행자로서의 윌리엄의 관찰이 돋보이는 부분은 마유주의 특성에 대한 기술이다. 그에 의하면, 몽골인들은 마유주가 잘 익어 얼얼한(pungent) 맛이 날 때 마신다고 한다. 아마 한국적 표현으로는 ‘시금떨떨(혹은 시큼털털, sour and puckery)’한 맛에 해당할 것이다. 그는 혀에서 느껴지는 이 독특한 맛을 라뻬 와인(rap´e wine: 醋제조용 포도의 짜고 남은 찌꺼기)과 같다고 했다. 얼마나 시었으면 포도식초의 맛에 빗대었을까. 아마 낯선 음료의 신맛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진저리를 쳤나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다 마시고 나면 마치 아몬드 우유(아몬드를 갈아서 만든 음료)와 같은 (고소한) 뒷맛을 남기고, 사람의 마음을 무척이나 즐겁게 하며, 술이 약한 사람은 취하게 만들고, 오줌을 마렵게 한다고도 했다.

▲ 연호택 교수가 찾아간 비쉬켁의 위치.


윌리엄은 1248년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프랑스 왕 루이 9세를 따라 제7차 십자군전쟁에도 참가했다. 5년 뒤인 1253년 5월 7일 왕명으로 타타르인들(몽골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목적으로 선교여행을 떠나게 된다. 중세 유럽인들의 오만함 내지 순진함이 엿보이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는 이 여행에서 선구자인 헝가리 출신의 수사 줄리안(Julian)이 갔던 노정을 그대로 답습했다. 물론 혼자 간 것은 아니었다. 고세(Gosset)라는 이름의 시종, 윌리엄이 보고서에 오모 데이(Homo Dei, ‘man of God’)라고 기록한 통역(실제로는 아랍인 Abdullah(‘servant of God’)), 그리고 바르톨로메오 다 크레모나(Bartolomeo da Cremona)라는 인물이 동행했다. 얼마나 험난하고 가슴 졸이는 모험여행이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현대를 사는 나는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시켁의 현대적 호텔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말이 아닌 자동차를 타고 길을 떠났다. 실크로드의 역사적 산물 카라반사라이(caravansarai, 隊商 숙소)로 알려진 타시라밧(Tashrabat)을 보러 가기 위해서다. 나린(Naryn)을 경유해야 했다. ‘중앙아시아의 알프스’라 불리는 초원의 나라 키르기즈스탄의 한여름 날씨는 청명하고 하늘은 푸르렀다. 이식쿨 호수 西端을 지나 남동쪽으로 향한다.


2천여 년 전 월지가 민족대이동을 감행한 길을 거꾸로 가는 것이다. 그들은 왜 어떻게 이 길을 왔을까? 고향으로부터 수 천리 머나먼 길이다. 한두 달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소수의 인원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사람만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유목민의 가옥인 게르와 소박한 살림살이를 실은 마차, 양과 말, 소 등 방목하는(유목과 방목은 다르다) 가축은 생명과도 같은 재산이었다. 이 모든 것이 무리를 지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대이동이었다. 그걸 상상하며 나는 나린 초원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치렌산을 떠나 천산을 거쳐 강이 흐르고 초원이 있는 일리 분지에 일시 거주하던 월지가 또다시 길을 떠나야 했던 사연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어떤 정보로 왜 나린을 목적지로 삼게 됐을까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아슈(ashuu, 고개(pass))를 얼마나 많이 넘었는지 모른다. 해발 3천913m의 콕 아이릭 고개(Kok-Airyk Ashuu)를 시작으로 잘팍 벨 고개(Jalpak-Bel Ashuu: 해발 3천350m), 키질 벨 고개(Kyzyl-Bel Ashuu: 해발 2천620m), 쿨락 고개(Kulak Ashuu: 해발 3천400m), 몰도 고개(Moldo Ashuu: 해발 3천250m), 카라 케체 고개(Kara-Keche Ashuu: 해발 3천384m) 등 이름도 생소한, 그러나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고 싶은 높고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고개를 넘고 또 넘었다. 솔직히 기록한 순서가 맞는지는 자신이 없다. 오가는 길에 정신없어 엇갈려 적었을 수 있다. 분명한 건 키르기즈스탄은 초원의 나라라기보다 고원의 나라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


이쯤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 하나. 구소련에 의해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국경이 그어지기 전에는 몽골이나 돌궐의 칸들이 일정한 지역과 사람을 지배하는 汗國(khanate)들만이 있었다. 이를 국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2천여 년 전의 흉노는 국가일까 민족일까? 막강한(?) 중원 농경국가 秦나라 漢나라를 잇달아 상대하며 長城너머 북방 사막과 초원지대를 지배하던 흉노는 결코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성격상 單宇(단우,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선우’라고 읽는다)를 정점으로 하는 느슨한 형태의 종족연맹체에 가까웠다고 보는 게 맞다. 그러므로 匈奴(고대 서방세계에서는 Hunna, Hunni, Hunoi 등으로 표기)는 몽골 고원과 타림 분지 등을 아우르던 유목민 집단에 대한 총칭이었을 것이다. 종족이나 민족명이 아니라 국가명에 해당하는 외부로부터의 他稱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흉노 내부에는 수많은 부족과 씨족이 혼재해 있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 호연씨(呼衍氏), 란씨(蘭氏), 수복씨(須卜氏) 세 氏族은 귀족집단으로 관직을 세습했다. 선우를 배출하는 황족집단은 연제씨(攣鞮氏)였다.


月支(혹은 月氏)의 구성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월지는 ‘玉의 나라’를 지칭하는 엑소님(exonym, 타칭)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月支는 월지인의 말로 ‘玉’을 가리키는데 이를 소리가 유사한 한자로 적은 音差 字다. 옛 한문 기록의 인명, 국명, 관명, 지명 등은 대개 그러하다. 가야국을 세운 김해김씨의 시조 수로왕의 한자 표기가 그러하다. 수로왕은 문헌에 따라 ‘首露’와 ‘首陵’으로 달리 적혀있다. 설마 이들 한자를 뜻을 따라 한 나라를 세운 왕의 이름의 의미를 ‘머리 이슬’이나 ‘머리 언덕’이라 풀이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이는 ‘수리(sur(i))’의 음차어로 ‘태양’이라는 말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왕이 곧 태양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도, 잉카의 왕도, 인도의 수리야 방시 가문이 세운 왕조 사람들도, 심지어 루이 14세도 ‘태양왕(sun-king)’임을 자처했다. ‘수리’가 ‘해’를 가리키는 말인 이상 이 말을 사용하는 민족이 누군가를 알면 수로왕의 출신을 알 수 있다. 수로왕비 허황후의 시호 ‘普州太后’ 또한 이런 맥락에서 접근하면 어째서 일연스님이 그녀가 천축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기록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여하간 부족연맹체 혹은 종족연맹체였을 월지의 내부에는 다양한 집단이 문화와 언어, 인종 등에서 비슷하거나 다른 부족 혹은 씨족과 공존했을 것이다. 연맹체의 성격상 이들은 일단 외부의 도전에는 힘을 합치지만 막상 존망의 위기에 봉착하면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는 법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쪽 길을 택하고 누군가 혹은 누구와 누구는 함께 저쪽 길을 간다. 그런데 그 누군가에 해당하는 집단은(부족이든 씨족이든) 저마다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월지가 西遷을 시작했을 때 연맹체의 구성성분이었던 하위부족들은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서로를 차별화하며 함께 혹은 따로 움직였을 것이다. 따라서 외부인들도 그들을 월지가 아닌 저마다의 명칭으로 불렀을 것이다.

우리가 부리야트족이라고 부르는 종족도 적어도 네 개의 하위집단으로 나뉘며 그들 각각은 이색적인 명칭을 지니고 있다. 부리야트(Buriat, buri(늑대)-at(사람들))는 『몽골비사』에 처음 등장하는 이름이다. 때문에 바이칼호 부근에 살던 삼림유목민을 한데 묶어 부른 엑소님으로 이해해야 한다. 부리야트의 하위 집단에는 코리(Khori), 콘고도리(Khongodori), 에히레티(Ekhireti), 불라가티(Bulagati) 등이 있다. 이들 각각의 명칭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궁금해 하고 알아가는 과정은 무척 흥미진진하다. 그것이 학문의 즐거움이다. 지적 호기심의 발로와 그 충족.


다시 월지로 돌아가 보자. 일리하에 당도해 塞種을 몰아내고 그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으려했던 월지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한다. 흉노의 사주를 받은 오손이 내습한 것이다. 그래서 월지는 또 떠난다. 그렇다고 모두 동참한 것은 아니다. 일부는 어떻게든 현지에 머물고, 일부는 이리로, 또 다른 일부는 저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이주와 정착과정이 그러하다.


바이킹의 한 갈래인 바랑고이족(희랍어: Varangoi, the Varangians 혹은 Varyags라고도 표기)이 현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순록을 따라 남으로 내려오는 중에 일부는 오늘날의 노보그라드 일대에 정착하고 그곳에 만족하지 못한 일부는 남하를 계속해 마침내 드네프르강(the Dnieper)을 끼고 있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 지역에 이른다. 이곳은 처음 떠나온 곳과는 사뭇 달랐다. 토양이 비옥하고 기후와 자연조건이 이상향에 가까웠다. 물산 또한 풍부했다. 식량인 밀이 자라고 숲에서는 손쉽게 야생동물을 잡을 수 있었다. 살코기는 먹이로, 모피는 교역품으로 적합했다. 꿀 채취 또한 용이해 이것도 주요한 교역품이 됐다. 이들은 고향을 잊었다.


흑해 북부 내륙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본래 슬라브인들의 땅이었다. 그런데 9세기의 어느 날 키 크고 하얀 피부에 거친 수염을 기른 낯선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다수 임에도 이들과 상대하거나 설득해 돌아가라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을 자신들의 언어로 ‘루스(Rus)’라 불렀다. ‘이방인, 외래인’이라는 말이었다.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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