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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族 출신의 황후에 대한 총애가 불러온 역사의 진동
異族 출신의 황후에 대한 총애가 불러온 역사의 진동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1.14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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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_1. 流浪의 시작, 月支의 西遷(1)


 

10회까지의 연재 목차
01. 流浪의 시작, 月支의 西遷(1)
02. 流浪의 시작, 月支의 西遷(2)
03. 유목민 塞種의 요람 이식쿨 호수와 烏孫의 赤谷城(1)
04. 유목민 塞種의 요람 이식쿨 호수와 烏孫의 赤谷城(2)
05.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시켁, 나린과 石城 타시 라바트(1)
06. 키르기즈스탄의 수도 비시켁, 나린과 石城 타시 라바트(2)
07. 李太白의 고향 碎葉城, 악베심 유허
08. 동서 문명 교류의 시발, 탈라스 전투
09. 키르기즈인의 민족 서사시, 마나스
10. 이오니아인이 세운 나라 大宛, 페르가나

▲ 인도 라자스탄 지역에 전통축제가 벌어졌다. 사막 유목민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이곳에는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들려오는 듯한 민속음악이 있었다.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들려오는 민속음악은 바람소리처럼 가슴을 파고들어
멋모르는 유럽사람들이 돔바의 후손을 이집트에서 온 줄 알고 집시’로 불러

“우연은 없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치고 인과관계를 벗어난 것이 없다. 인간이 인식하든 못하든 매사에는 그럴만한 원인이 있는 법이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든다지 않는가? 모든 일은 얽혀있다.”
인도는 내가 즐겨 찾는 여행 목적지 중 한 곳이다. 인도를 좋아하는 몇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도의 음악이다.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듣는 민속음악이 바람소리와도 같이 가슴을 파고들듯, 인도 사원에서 듣는 바잔(bhajan)이나 라가(raga)는 성당의 종소리처럼 신비롭다. 지난 해 겨울에는 라자스탄 지역을 여행했다. 가는 곳마다 음악이 있었다. 특히나 사막 유목민들의 악기 연주와 목청은 아름다웠다. 마침 음력 보름이었다. 밤하늘을 비추고 있는 달빛 아래 듣는 타악기 따볼라(tabola)와 외줄 현악기 엑타라(extara)의 음률은 유쾌하고 슬펐다. 그 선율을 따라 나는 이들의 역사를 생각했다.

 

 

 

 

 


인도에는 바울(Baul)이라는 유랑집단이 있다. 바울은 벵골어로 ‘바람’이라는 뜻을 갖는 산스크리트어 vayu(‘air’ or ‘wind’)에 그 기원을 둔다. 바울은 노래하는 음유집단이다. 노래가 좋아 노래에 미친 사람들이다. 바울은 그렇게 음악에 신들린(Vatula: ‘possessed’, ‘mad’, or ‘crazy’)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에는 신명이 있고, 때문에 애잔하다. 황야의 바람 소리와도 같은 쓸쓸함이 배어있다.
이들의 노래 중에는 재회의 기쁨을 축하하는 아가마니(Agamani: Songs of advent)가 있고 작별을 슬퍼하는 비자야(Vijaya: Songs of parting)가 있다. 들어보라, 바울의 음률이 전하는 인생의 희노애락을. 노래하는 이가 그러하듯 듣는 이 역시 음악에 사로잡힌 채 신을 느낄 지도 모른다.


산야시(San(n)yasi(n), 힌두교의 탁발승)처럼 문전걸식하며 노래에 살고 노래에 죽는 유랑 음악인들. 바람처럼 동가숙서가식하던 무소유의 떠돌이 고대 인도 악사들. 이들을 부르는 또 다른 명칭이 돔바(Domba)다. 돔바란 ‘북(dom)’을 치는 ‘사람(-ba)’을 말한다. 이들이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며 음악을 연주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가다보니 판노니아 평원(The Pannonian Plain: 카르파티아 분지, 헝가리 초원이라고도 함)에까지 이르렀다. 멋모르는 유럽 사람들은 이들이 이집트(Egypt)에서 온 줄 알고 집시(Gypsy)라고 불렀다. 사실 오늘날 유럽 집시의 또 다른 명칭인 ‘Romani’가 바로 돔바의 후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러나 이주나 유랑의 사연은 저마다 달랐다.

▲ 라자스탄지역 초원 사막민들이 불을 피우고 둘러앉았다.


무대를 현재의 몽골 초원으로 옮겨보자. 시대는 기원전 3세기 말. 초원의 바람소리는 구슬프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화살의 울음소리와 같다. 匈奴單于(치세: 기원전 220~209년)의 태자 冒頓(치세: 기원전 209~174년)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일 목적으로 휘하의 1만 기병을 훈련시킬 때 사용하던 鳴鏑이 그러했다. 아버지의 이름 頭曼은 ‘萬人長’ 혹은 ‘万戶制’라는 의미의 투르크어 tumen의 한어 음역으로 추정된다. 冒頓은 墨毒, 墨突, 旄頭(『焦氏易林』) 등으로도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흉노어 이름의 한자 음차어다.


冒頓이라는 이름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현재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Ulanbataar. 붉은(ulan) 영웅(bataar))에서 보이는 원 투르크어 ‘baγatur’(용감한 자, 용사)의 음역이라고들 하지만 언어학자인 나는 도무지 그 근거를 알지 못한다. 차라리 ‘끝’에 대응되는 말로써 『月印釋譜』序: 14에 보이는 ‘서열이 맨 위인, 맨 앞의, 처음 나온’이라는 우리말 ‘’(>맏)과 기원이 같은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싶다.


혹은 우리말 ‘모두~몽땅’과 어원을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다. ‘모두’는 『楞嚴經諺解』(1461, 2:49)에 ‘모도’의 형태로 처음 나타난다. 중세 국어에서 ‘-[會]’이라는 용언 어간에 부사 파생의 ‘-오’가 결합해서 생긴 ‘모도’가 근대 국어로 들어오면서 모음조화에서 벗어나게 돼 ‘모두’로 실현된 것이다.
그렇다. 모돈은 ‘맏아들, 첫 아들’이라는 의미의 말일 수 있다. 과거 사람들은 다들 그런 식으로 쉽게 이름을 지었다. 지금도 중국 운남성, 태국 북부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리수족은 태어난 순서에 따라 집집마다 붙이는 이름이 같다. 그래서 엄마도 ‘아미’, 딸도 ‘아미’라면 다 같이 큰 딸로 태어났다고 이해하면 된다.

異族 출신에 대한 편애가 불러온 역사의 진동
그런데 최근 나는 키르기즈 민족의 장편 서사시 『마나스(Manas)』를 읽다가 아주 흥미로운 어휘를 발견했다. ‘몰토(Molto)’가 그것이다. 그것은 키타이 칸(Kitai Khan)의 이름으로[Kitai는 契丹을 의미하나, 서사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이때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음], 이 이름은 현재 키르기즈인의 인명으로도 쓰인다. 키르기즈 20솜(som)짜리 화폐 속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의 이름은 ‘둥글이 학자’라는 뜻의 ‘Togolok Moldo(round faced educated person)’. 그렇다면 모돈이 ‘학자, 현인’의 의미로 사용되는 키르기즈어 ‘moldo’ 혹은 ‘molto’와 기원이 같은 것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 기원전 250년 경 흉노의 영토(녹색 부분) : 오늘날의 몽골리아, 만주 서부, 타림분지, 카자흐스탄 동부, 키르기즈스탄 동부, 내몽골, 중국 감숙성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키르기즈는 흉노가 초원의 지배세력이 되기 전부터 그 북쪽, 바이칼 호수 서쪽에 거주하던 ‘鬲昆’을 그 조상으로 한다. 예니세이 강을 기반으로 수렵과 어로, 유목 생활을 했기에 예니세이 키르기즈로 알려져 있는 키르기즈족은 사마천의 『史記』(기원전 109~91년에 편찬)에 처음 ‘鬲昆’ 혹은 ‘隔昆’으로, 다른 곳에는 ‘堅昆’으로 등장한다. 이들에 대한 후일의 역사 기록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이들이 붉은 머리에 푸른 (녹색) 눈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色目人이다. 어떤 사람들이 과연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하고 있는 걸까.
이렇듯 몽골초원 북쪽에는 隔昆이, 또 그 주변에는 丁零이 살던 당시, 흉노의 태자 모돈은 한동안 흉노 서쪽의 月支國에 인질로 가있었다. 이는 월지가 당시 흉노가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국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버지 두만은 월지 공주를 閼氏(알씨)로 맞아들여 자식을 낳았다. 당시 힘깨나 쓰는 집단의 首長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흉노의 임금을 한자로는 單于라 기록하고 선우라 말하며, 왕비는 閼氏라고 쓰고 연지라 읽는다.


문제는 월지 출신의 연지와 그 아들을 총애한 나머지 모돈을 제치고 선우자리를 그쪽에 넘겨주려한 데 있다. 그래서 혼인동맹을 맺었던 월지에 부러 싸움을 걸었다. 월지에 있던 모돈은 목숨이 위태로웠다. 다행히 평소 눈여겨보던 준마를 집어타고 본향으로 돌아왔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아버지의 처사였다. 이를 갈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절치부심 때를 기다렸다. 예상과 달리 살아 돌아온 아들을 어쩌지 못한 아버지는 속마음을 숨기고 모돈에게 기병 1만을 내리고 사실상의 후계자인 左賢王에 봉한다. 모돈이 할 일은 부하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게 훈련시키는 것. 이를 위해 우는 화살 명적을 이용한다. 마침내 월지 출신의 연지와 그 아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마저 살해하고 모돈은 선우 자리에 오른다(재위: 기원전 209~174년).


월지(月氏, 月支)는 원래 현 중국의 감숙성 서부 지역 하서회랑과 기련산맥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월지’라는 명칭은 한자로만 전해 내려오며 그 말의 원음과 어의, 그리고 그들의 종족적 기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 없다. 사마천 『史記』 「匈奴列傳」에 보이는 ‘烏氏’, 『逸周書』「王會篇」의 ‘禺氏’에 비정되고 있는데, 만약 후자와의 관련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월지의 종족적 기원은 상당히 오래됐다고 할 수 있다. ‘월지’의 말뜻을 ‘玉’으로 이해하고 월지족을 ‘옥의 종족’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실크로드의 관문 玉門關이라는 지명도 월지와의 관련 속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생각이 좀 다르다. 아무튼 사서의 기록으로 미뤄 분명한 것은 월지가 흉노의 서방세력으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점이다.


쿠데타로 선우가 된 모돈은 자신에 대한 불만을 의식, 지지기반을 다질 겸 관심을 대외전쟁으로 돌린다. 눈엣가시이던 동쪽의 東胡(만주 일대 거주)를 격파한 모돈의 흉노군은 여세를 몰아 서쪽의 월지를 쳐서 멸망시킨다(기원전 176년).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월지는 본거지에 머물 수 없다. 패자가 취할 길은 流浪.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역사는 어느 면에서 보면 무언가를 뺏으려는 자와 그를 지키려는 자와의 갈등의 연속이다.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차지하고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와의 갈등이 전쟁을 초래한다. 전쟁! 이 끔찍한 일로 무수한 사람이 이유도 모른 채 죽고 수많은 도시가 파괴됐다. 그래서 성곽이 쌓이고 축조 기술이 발전했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달의 높이 쯤 되는 우주 공간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도 그렇게 해서 두려운 북방의 침략자를 막기 위해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 문명은 알고 보면 단순한 데서 비롯된다. 북방의 야만족(사람들은 항상 자신은 옳은 존재요 문명인, 또 자신은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었다. 중국도, 인도도, 페르시아도, 그리스도)에 대한 공포는 중원의 문명화된 漢族 정권들로 하여금 차례차례 깊은 방어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전제 권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강제 노역을 통한 축성 공사를 감행하게 했다. 역설적으로 중국은 유목세력에 대한 농경 정착 세력의 저항 과정을 통해 명맥을 유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싸움에 정의란 없다. 승리가 정의일 뿐이다. 유목세력 간에도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싸움이 벌어졌다. 혼인동맹을 맺었던 월지와 흉노도 그러했다. 아내로 맞은 카이사르의 어린 딸이 병들어 죽자 금세 친구이자 장인이었던 카이사르의 적으로 변한 폼페이우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당시 로마 三頭政治의 허상을 본다. 아버지를 죽이고 권좌를 탈취하기까지 하는 마당에 친구가 적이 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흉노의 월지 토벌과 월지의 西遷
흉노의 월지 침공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무언가 깊은 원한이 있었지 싶다. 모돈의 뒤를 이은 老上單于(재위: 기원전 174~160년)는 2년 뒤 다시 월지를 쳐서 월지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이 잔인한 풍습은 고대 스키타이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바 유목종족의 승리 의식 내지 용맹함의 과시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월지(月氏, 月支) 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의 이동
이미 말했다시피, 모돈선우 시절까지 월지는 흉노의 서방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서역의 나라들(오아시스국가들)에게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의 右賢王[제국의 右翼인 서방을 담당하는 왕. 선우의 태자는 언제나 左翼을 책임지는 左屠耆王, 즉 左賢王이 됐다. ‘屠耆’는 흉노어로 ‘賢明하다’는 말]이 한나라와 소규모 전쟁을 벌인 이듬해인 기원전 176년, 모돈선우와 한의 文帝(재위: 기원전 180-157년)가 서신을 교환했다. 흉노선우가 한의 天子에게 보낸 다음의 글에 월지 토벌과 관련한 내용이 보인다.


“지금 하급 관리들이 맹약을 깨트렸기 때문에 그 죄를 물어 이번에 우현왕에게 그 벌로써 서쪽으로 월지를 討滅하게 했소이다. 다행히 하늘의 가호로 단련된 정예 병사와 강건한 말로써 월지를 쳐부수어 이들 모두를 참살함으로써 항복시키고 樓蘭, 烏孫, 呼揭 및 인접한 26개국을 평정해 이들을 모두 흉노에 병합했소이다. 이리하여 활을 쏘는 유목민족(引弓之民)은 합하여 한 집안이 됐고, 북쪽 지방은 이미 안정을 찾았소이다.” (사마천, 『사기』 「흉노열전」)


원수지만 화친할 수밖에 없던 흉노와 한. 무엇보다 白登山 전투에서의 굴욕적 패배 이후 흉노에게 매년 비단을 바치고 황실의 여인을 흉노선우에게 시집보내는 등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해야만 한 한고조(劉邦) 이하 한정권의 심정은 참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함부로 대적할 수 없기에 평화 유지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중에도 더러 예기치 않은 사고가 생기는 법. 과격한 성격의 장수가 있으면 상대에서 시비를 걸 때 일단 말을 몰고 나가 한 판 싸움을 벌여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상황 속에 흉노 우현왕과 한나라 국경 수비대 사이에 예기치 않은 전투가 벌어졌음을, 그로 인해 흉노선우가 명령을 어긴 죄를 물어 서방의 월지를 토벌토록 했다는 것이 위 편지글의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흉노가 월지는 물론 서역 諸國을 점령해 북방 유목민족을 하나로 통합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자부심 가득한 편지인가. 이 얼마나 漢王室을 조롱하는 문장인가.


위와 같은 흉노선우의 편지를 받은 한의 文帝는 답신을 통해 우현왕을 책망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선우에게 비단옷 수십 필을 선물로 보낸다. 그리고 편지를 교환한 지 얼마 안 가 모돈은 죽고, 아들 稽粥이 즉위해 후일 노상선우라 칭했다. 그러자 文帝는 곧 종실의 딸을 공주라 속여 흉노로 보내 선우의 연지로 삼도록 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모돈의 아들 노상선우도 아버지에 뒤질 세라 계속해서 정복사업을 벌였다. 심지어 한의 수도인 장안까지 진격해 한 조정에 심대한 압박을 가한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월지 역시 또 한 번의 타격을 받는다. 치명타다. 기원전 162년 노상선우의 명을 받은 흉노군의 공격을 받고 월지의 왕이 참담하게 살해됐다. 이때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獅子王 老上單于는 자신이 죽인 월지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 한다. 왜 老上單于가 사자왕인가. 필자는 老上을 투르크어 arslan(사자)에서 어두의 a-가 탈락된 음차어로 본다. 安祿山 또한 安國(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출신의 (a)ruslan(사자)이다. 남자들은 용맹한 존재로 인식되길 원한다. 전사의 이미지로 사자 이상의 것이 없다. 사자왕 리차드가 그렇고, 셀주크 제국의 두 번 째 술탄도 Alp Arslan(영웅적 사자)였다.
이제 월지의 운명은 결정됐다. 디아스포라(diaspora)! 마침내 유대인의 바빌론(Babylon) 捕囚를 연상케 하는 월지의 역사적 대이동이 시작된다. 사진제공 이정국

글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필자는 충청도 사람이다. 한국외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준비중에 있다. 정도전에 따르면, 충청도 사람은‘맑은 바람 밝은 달(淸風明月)’의 특질을 지녔어야 한다. 과연 그럴까? 현재는 ‘岩下老人’과도 같다는 강원도 하고도 대관령 넘어 강릉 땅 관동대에서 30년 가까이 영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30여 년 세상 곳곳을 여행하고 있다. 차를 즐겨 마시다보니 관심이 생겼고 그로 인해 20여 년 전에는 <중앙일보>에 매주 ‘茶의 故鄕’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이라는 칼럼을 쓰고‘닥터 트래블’, ‘開口 영어’같은 여행 영어 칼럼도 연재했다. 나름 좋은 책이라고 자부하는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등이 있다. 내겐 꿈이 있다. 몽골초원에서 시작해 西로의 여행을 시도하는 것이 그것이다. 누군가는 걸어서, 누군가는 낙타를 타고, 또 누구는 차량을 이용해 이 노정을 답파했다. 나는 말을 타고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이 길을 가고 싶다. 몸이 쇠약해져 마음마저 무력해지기 전 꿈을 실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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