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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민주주의·교육’, 一民 윤형섭을 관통하는 코드
‘애국·민주주의·교육’, 一民 윤형섭을 관통하는 코드
  • 전상인
  • 승인 2023.04.18 0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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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인생 구십의 보람과 아쉬움』 펴낸 윤형섭

구순을 맞은 노학자의 공적·사적인 삶
옛 추억과 한국의 근현대를 되돌아보다

일민(一民) 윤형섭 선생께서 구순을 맞으셨다. 1976년 봄 처음 뵀을 때 선생님은 40대 초중반이셨는데 이 제자도 벌써 60대 중반을 넘겨버렸으니, 세월이 참으로 빠르다. 마침 이번에 선생님께서 『살며 생각하며』라는 책을 내셨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는 기쁨이 한편으로는 선생님의 공적 생애를 재인식하는 기회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생님과의 사적 인연을 재음미하는 계기가 됐다.

 

일민을 지칭하는 직함과 직책, 지위는 실로 다양하다. 당신께서는 박사이고 교수셨다, 당신께서는 대학 총장이시고 신문사 사장이시고 일국의 장관이셨다. 원장, 회장, 이사장, 이사, 감사, 고문, 위원장, 위원 등 그동안 당신께서 맡아왔던 공직은 일일이 나열조차 힘들 정도다. 이처럼 다채롭고 열정적인 삶에는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주는 몇 가지 코드가 관통하고 있다.

첫째로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이시다. 태생부터가 우국지사 가문인 탓이었는지, 해방 이후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기대가 각별했다. 정치학도를 거쳐 정치학자가 된 것도, 남들보다 아주 길게 장교 생활을 한 것도, 훗날 교육부 장관의 대임을 맡은 것도 궁극적으로는 애국심의 소산이었다.

둘째로 민주주의 신봉자이시다. 선생님은 한국 현대사가 경험한 두 차례의 군사쿠데타 모두를 비판한다. 전두환 정권하에서 국외로 추방된 경험도 있다. 선생님이 볼 때 민주주의의 파괴는 다양한 분야의 사회지도자들이 주어진 역할을 넘어 남의 일을 흉내 내기 때문에 일어난다, 쿠데타를 통해 군인들이 정치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셋째로 학자이자 교육자이시면서 동시에 교육행정가이시다. 대학교수로서는 물론 특히 교육행정가로서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하셨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지향적 개혁에 관심이 많았는데, 제도개혁을 문화개혁과 병행시키고 개혁 에너지를 교육계 내부에서 유도하려 했다는 점에서 통상적인 교육전문가와 달랐다. 

선생님은 ‘의례적인’ 안부 그 이상의 깊은 관심을 내게 보여주셨다. 가령 내가 대학교수가 된 이후에도 봉급이 얼마냐, 집은 어디냐, 학교 분위기는 좋으냐와 같은 개인적 질문을 자주 하셨다. 신문에 내 칼럼이 실리면 거의 매번 장문의 코멘트를 보내시거나 일부러 전화를 주셨다. 이런 일이 어찌 나한테만 있었겠는가. 선생님은 누구한테나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내가 정치학을 공부하다가 유학을 가면서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꾼 점을 선생님이 내심 무척 서운해하셨다는 말씀을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 다른 은사님한테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선생님은 한 번도 내게 정색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 이 또한 나는 극진한 제자 사랑의 일환으로 믿고 있다. 이 자리를 빌려 늦게나마 용서를 청할 뿐이다. 

내가 선생님 연구실에서 조교로 근무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운 ‘대학교수로 사는 법’도 잊기 어렵다. 예컨대 퇴근할 때 책상 위나 서랍 안을 반드시 정리·정돈하도록 훈련받았고(밤새 무슨 일이 생겨 내일 아침부터 이 방을 다른 사람이 쓸 수도 있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시험 답안지를 채점할 때 너무 꼼꼼히 읽지 말라는 지시도 있었다(난필이나 비문, 오자 등이 성적평가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선생님의 구순맞이와 저서 출간을 지면을 통해 축하드리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더없는 영광이 아닐 수 없다. 모쪼록 만수무강하시어 나라에 대한 사랑,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 학문에 대한 사랑, 교육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랑을 계속 베풀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처럼 언제까지나 나의 은사님으로 곁에 계시면 좋겠다. “제 선생님이 되어 주셔서 참으로 감사드리며, 항상 많이 배울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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