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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이 법인의 정관 개정까지 앞장서다니!
총장이 법인의 정관 개정까지 앞장서다니!
  • 윤형섭
  • 승인 2020.12.08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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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총장 4년(1994.9~1998.8)의 회고 ④
현승종 전 총리를 추모하며...이사장과 총장의 대학이야기

앞에서 말했듯이 1994년 총장 취임식장 앞에 도열해서 나의 총장 취임을 반대하던 학생들의 피켓 시위를 바라보며 한편 놀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 당시의 학내 상황이 능히 그럴 만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전혀 결례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취임하자마자 나는 총학생회 임원들과 본관 대형 회의실에서 일문일답식의 간담회를 가졌다. 왠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정중하고 신중하여 보기에 좋았다. <건국대 신문> 기자와의 인터뷰도 재미있게 진행했다. 아마도 내가 대학 재학 중 학부와 대학원에서 학생회장을 경험했고 육군사관학교에서 6년간 교관 생활을 했으며 Y대학교수 재임 중에는 그 난세에 학생처장을 4년 2개월 겪었던 것이 나로 하여금 그들을 그렇게 귀하고 미쁘게 보게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존스·홉킨스대와 하버드대에서 그리고 일본 게이오대와 중국문화대에서 보고 느꼈던 사례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주며 건국대의 새로운 미래상을 그려내고 희망을 갖게 한 것이 크게 주효했던 것 같다. 

환갑의 나이에 4년간 주말부부 노릇

거기에 총동문회 홍순정 회장과 정복환 건국대 419민주혁명동지회장을 비롯한 동문간부들이 나를 뒷받침해주니 나는 평상심을 갖고 학교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어느 정도로 전념했는가. 고양시 일산에서 건국대까지 출근하는데 그 당시에는 1시간 40분이 소요되었다. 왕복을 따지면 3시간 20분!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광화문 앞에 남의 사무실을 빌려 간이침대 하나를 들여놓고 출근해보니 당시의 청계천 고가도로를 거쳐 30분이면 족하였다. 그래서 환갑 노인이 4년간 주말부부 노릇을 한 것이었다. 겨울이 되면 저녁 6시에 그 건물의 난방이 일제히 꺼진다. 할 수 없이 오바위에 담요를 덮고 앉아 밤늦게까지 학교 서류를 검토하는 것이 매일 하는 일이었다. 누가 봐도 가엾은 몰골이다. 아내는 일주일에 한 번씩 음식을 실어 날랐다. 그래도 매일같이 변해가는 건국대의 모습에 나는 희망에 부풀었고 행복하기만 했다. 더군다나 내 말 한마디로 건국대의 법인 정관이 만장일치로 개정될 때는 참으로 보람스러웠다.


제도 운영의 합리화를 위해서 정관, 학칙, 관련 규정 등을 세심하게 검토하던 어느 날 정관에 놀라운 조항이 있음을 발견했다. 즉 총장을 재임했던 이는 재임 기간과 업적심사도 없이 자동적으로 명예교수가 되어 평생토록 월 50만원을 지급받게 되어 있었다. 교수는 25년을 근속하고 여러 단계의 심사를 거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사회의 석상에서 그 부당성을 역설하고 당해 조항의 삭제와 50만원 지급제도의 철폐를 호소했다. 모두가 끄덕였다. 조일문 이사(전직총장)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개정했을 때 손해 볼 사람은 윤 총장 오직 한사람뿐인데?” 그래서 내말이 “그러니까 저밖에 제안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오늘이 이 조항 철폐의 절호의 기회입니다.” 내 뜻이 관철되어 나는 연간 600만원의 손해를 22년간 보아왔으나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그러나 법률불소급의 원칙에 의해서 기존 명예교수들의 기득권은 존중되었고 명예교수 요건 중 25년 재직조건을 20년으로 감축하였다. 그날 이후 새롭게 명예교수가 된 분과 후임 총장 중 비교수 출신들의 경제적 손실에 대해서는 참으로 죄스런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학교 재정을 합리적으로 접근하면 그 수익이 처음은 미미하나 그 끝은 창대해지는 법이다. 이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총장이 법인의 정관개정까지 앞장서다니! 실로 현승종 리더십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으면 어찌 시도할 수나 있었겠는가.

현승종, 인고의 리더십

그러나 현승종 이사장은 매일 같이 ‘현퇴추’에 시달렸다. ‘현퇴추’란 현승종퇴출추진위원회의 약칭이다. 그들은 줄기차게 각종의 방법으로 현승종 이사장을 괴롭혔다. 그 대표자는 재학생도 아니었다. 나는 교학 책임을 진 총장으로서 좌시할 수 없었다. 더구나 1970년대의 그 난세에 Y대학의 학생처장, 전국 최장수의 학생처장이었던 내가 어찌 그런 일을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는 분명코 이사장에 대한 총장의 인책 사항이 아닌가. 그러나 “총장은 절대로 이 일에 손대지 말고 학교만 발전시켜라”는 것이 현 이사장의 기본 원칙이었다. 당신께서 참고 넘기기만 하면 이 문제는 절로 사그라질 것이라는 입장이다. 현퇴추가 현 이사장에 대한 터무니없는 명예훼손 차원의 유언비어를 대자보 또는 전단의 형식으로 퍼뜨려도 현 이사장의 인고 제일주의 철학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현 이사장께서는 현퇴추의 배후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학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총장의 관할영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일은 더 키워서는 안 된다. 오직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는 것이 이사장의 대응철학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으레 이사장이 총장에게 책임을 묻고 사태수습을 독촉하거나 질책할 것이건만 현승종 이사장은 사태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오직 인고의 리더십으로 이겨낸 것이었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고 나는 아연실색했다. 현승종 이사장이 서울동부지검의 출두 명력을 받았다는 것이다. “무슨 일 때문이라더냐?” “학교 건설 관계랍니다.” “학교 건설이라면 모든 건설을 내 책임 하에 진행하고 있는데 내가 호출을 당해야지 왜 이사장이냐” “가자!”하고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아 동부지검에 출두했다. 나로서는 일생 처음이다. 그런 일은 그 후에도 없다. 담당 검사가 나를 맞았다. (전관예우인 것 같았다.) 총장은 해당이 없으니 가시고 현승종 이사장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역시 이사장에 대한 모함의 투서가 있었다. 교내 각종 공사에 대한 어마어마한 독직·수뢰 혐의 고발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의 강력한 항변이 이어졌고 상당 시간이 흘렀다. 결국 담당 검사가 자리를 뜨더니 얼마 후 돌아와서는 총장의 확인 서명으로 대체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뭘 확인하라는 것인가? 읽어보니 고발 내용이 모두 무혐의임을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이사장께는 보고도 안 했다. 언젠가는 우스갯소리로 알려드리려 했는데 적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 후에도 그의 인고의 리더십은 계속되었다. ‘분사난’(분하거든 그로 인해서 생겨날 환난을 생각하라. 그러니 분할수록 참아라)이란 공자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윤형섭 연세대 명예교수·단국대 석좌교수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했다. 연세대 교수를 거쳐 교육부 장관(1990.12.27.~1992.1.22)을 지냈다. 한국정치학회 회장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서울신문>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건국대·호남대 총장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와 단국대 석좌교수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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