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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관한 한 전권을 쥐고 충성을 바쳤다
학교에 관한 한 전권을 쥐고 충성을 바쳤다
  • 교수신문
  • 승인 2020.12.2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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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 총장 4년(1994.9~1998.8)의 회고 ⑥(끝)
현승종 전 총리를 추모하며…이사장과 총장의 대학이야기

건국대 총장 4년의 세월은 나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행복하고 보람 있는 세월이었다. 학교에 관한한 나는 현승종 전 이사장의 원칙과 신뢰에 따라 전권을 장악하고 건국대에 충성을 바쳤다. 그 대신 모든 책임은 내가 자원해서 짊어졌다. 교학 정책만이 아니다. 학교 비축금을 포함한 모든 재정 운용도 마찬가지다. 


현승종 전 이사장, 그분은 101세를 일기로 가셨으나 많은 교훈으로 여운을 남겼다. 평소의 그분답게 조용히 가셨다. 일관된 의지로, 그리고 정밀하게 앞뒤를 가려가면서 원칙을 존중하며 인고하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어떤 자리에 앉든지, 누구와 만나던지 몸과 마음을 낮추었던 겸허의 지성인, 노신사의 삶이 조용히 마감된 것이다. 나는 약속대로 만 65세에 임기를 만료하고 퇴임하였다. 총장이 임기를 마치고 후임 총장과 함께 이?취임식을 가졌던 것은 건국대 개교 이래 초유의 일이라 한다.


현승종 전 이사장을 추모하면 마음 아픈 사연이 떠오른다. 그분이 평안남도 개천군 개천면에서 태어난 것은 1919년이었다. 그의 출생지의 말뜻을 풀어보면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뜻이다. 그의 조부와 부친은 의병과 독립 운동가였다. <연합뉴스>가 1999년 2월말 3·1운동 80주년을 맞아 80세를 맞은 현승종 이사장과 인터뷰를 가졌다. 내가 학교를 떠난 지 반년 후의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애국 투사의 혈통을 받고 태어났는데도 불구하고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끌려가 1945년 6월 일본국 소위로 임관되었고 8월 15일 즉, 종전 당일 중국 팔로군과 교전한 것이 평생 가슴 아픈 기억이라고 밝혔다.

그나마 독립군과 교전한 일이 없음을 다행히 여겼다는 뜻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학내의 막강한 정서적·통합적 위력을 갖고 있던 동문 교수협의회를 비롯해 학내의 여러 단체들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는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고 조직적으로 비난을 가하며 퇴출을 촉구했다. 결국 인고의 리더십이었던 현승종 전 이사장이건만 사표를 제출하고 학교를 떠난다. 그로부터 6년 반 후인 2005년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 인명사전에도 현승종 이름 석 자는 없다. 이것이 1999년 4월의 일이므로 현 전 이사장이 취임한지 6년만의 일이었다. 고려대 학생처장(1960~1965), 성균관대 총장(1974~1980), 한림대 학장 및 총장(1986~1992) 등의 재임 기간이 모두 6년 전후이니 끝내 6년의 징크스를 못 깬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됨에 따라 건국대 이사장의 자리는 설립자 유석창 박사의 큰 자부가 맡게 되었고 지금은 그녀의 따님이 뒤를 잇고 있다. 24년의 세월이 지난 후 현승종 전 이사장은 이승을 떠났지만 그는 건국대 이사장 퇴임 후에도 한국유니세프 회장, 인촌기념회 이사장, 고려대 이사장, 국가원로회의 공동의장, 대한민국 건국6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아 사회적 기여를 계속하셨다.


그러나 그의 빈소는 코로나19의 위협 속에 그렇게 조용했고, 장례는 고인의 유훈을 받들어 가족장으로 그처럼 조촐했다니 고인의 영령 앞에 나로서는 뭐라 더 이상 할 말을 잃을 뿐이다. 

윤형섭 연세대 명예교수·단국대 석좌교수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했다. 연세대 교수를 거쳐 교육부 장관(1990.12.27.~1992.1.22)을 지냈다. 한국정치학회 회장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서울신문>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건국대·호남대 총장을 지냈다.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와 단국대 석좌교수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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