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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의 언어 창조하려면 낡은 지적 문화풍토 극복해야
새로운 지식의 언어 창조하려면 낡은 지적 문화풍토 극복해야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3.10.16 14: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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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한국 기획시리즈 4. 한국의 인문학, 그 미래는?

2006년 80여개 대학의 인문학위기선언에 대한 활로로 시작한 인문한국(HK)사업은 연간 약 432억(2013년 9월 기준)이 집행되는 대규모 인문학 지원 프로그램이다. 10년 장기사업으로 총 소요예산은 4천억 원이 넘는다. 하지만 사업시행 6년을 넘어서며 평가기준의 핵심인‘HK교수 채용률’로 인해 연구소 전임경쟁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가가 주도하는 인문한국사업이 단순히 전임으로 가는 우회로 사업으로 전락할 경우, 인문학 위기 선언이 되풀이될 수도 있다. 교수신문은 현 인문한국사업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해외사례를 참고해 한국인문학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보는 인문한국 기획시리즈를 준비했다. 마지막 기획은 인문한국 사업을 통해 모색하는 한국인문학의 미래다.

위기에 빠진 것은 인문학이었을까 인문학자였을까. 되풀이되던 인문학 위기 선언에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문한국 사업이 6년차 반환점을 돈 지금, 학계가 바라보는 인문한국 사업의 공과는 HK연구소 안에 있는가 아닌가로 그 입장이 극명하게 갈린다.

인문한국 사업 덕분에 연구자도 늘어나고 연구소 별로 다양한 학술서적이 발간되는 순기능을 봐야한다는 신승운 HK연구소협의회장(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HK사업단)은 인문한국 사업이 연구소 중심으로 추진됐기에 인문학에 새로운 동력이 됐다고 평가한다. 학술대회 몇 번, 잡지 몇 권 내면서 흐지부지 사라졌던 기존의 다수 연구소들에 비해 연구전담인력이 배치되고 예산도 배정된 HK 연구소들은 본격적으로 연구를 할 수 있는 기초 인프라로 기능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 역시 한국연구재단의 획일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개선할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43개 연구소가 모두 다르다. 또 6년간 연구를 하면서 어젠다별로, 연구자별로 실적이 많이 나오는 분야가 있고, 더 기다려줘야 하는 분야가 있는데, 연구재단의 정량적이고 일률적인 평가는 아쉽다.” 그는 또 BK사업이 후속지원을 하는 것처럼 지금이야말로 포스트 인문한국 사업을 고민할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남은 4년이 지날 경우 대학에서 자체적으로 기금을 조성해 HK 연구소를 지속시킬 수 있는 대학은 극히 적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그는 세계적 연구소를 키우기 위해서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HK연구소는 일종의 싱크탱크다”

투자적 관점에서만 인문한국 사업 6년을 봐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있다. 백종현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문명연구사업단장(철학과)은 “인문한국 사업은 절반은 인력지원 사업이고 나머지 절반은 연구지원을 해주는 거다. 연구지원은 반쯤 헛돈 쓴다는 생각으로 해야 결과가 나온다. 처음부터 최고의 전문가들을 모아두고 연구를 지원한 것도 아닌 점을 고려하면 평균 정도는 하고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그는 인문한국 사업 초기 설정 목표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은 학문간 소통이 원활해야 하는데, 학과별로 또아리를 틀고 있어서 학과를 벗어나면 공동으로 연구가 안 된다. 자기만의 언어로 논문만 쓰는 것을 극복하려고 인문한국 사업이 시작된 거다. 분과학문 체제를 넘어서서 공동연구를 하는 것이 HK 연구소의 연구과제다.”

백종현 단장은 HK연구소의 연구인력이 학과 소속 교수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연구를 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예컨대 국문과에서 박사를 한 경우, 국문과 교수와 같은 주제에 얽매여서 논문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학과에서 미쳐 손을 대지 못하는 장기 프로젝트를 HK 연구소에서 해줘야 한다. 인문대가 가진 학문적 고민에 대한 장기적 과제를 연구하는 싱크탱크 역할을 해야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하면서 HK (연구)교수들에 대한 평가도 학과 교수들의 기준과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한 단장들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는 “전임 단장이 어디까지 왜 그만큼 뛰었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내 구간에서 뛸 분량을 설정하는 미덕이 지속적인 연구에 필요하다”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인문한국 사업을 바라보는 학계의 고민은 HK 연구소 내부보다 더 깊다. 80여 인문학회로 구성된 한국인문학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혜숙 이화여대 교수(철학과)는 양적 성장에 치중된 인문한국 사업에 회의적인 입장이다. 애초 설정한 10년 후면 연구소가 자립해 나름의 설정분야에서 성과를 거둬 연구를 계속해나가는 것이었는데, 6년이 지난 지금 인문한국 사업이 과연 한국인문학의 토양을 풍부히 하는데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점이 너무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4천억원의 예산을 들여서 한국 인문학의 위상이 과연 10년 후 어떻게 변해있을까. 인문학자들의 지위는 안정이 될 것인가. 학교 안에서도 HK교수는 학과 교수와 다른 위치에 서 있고, 소모품처럼 취급되는 HK연구교수의 지위는 말할 것도 없다.”

인문학자의 지위인가 인문 토양의 개선인가

김혜숙 회장은 지식을 접하는 달라진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는 낡은 대학 시스템과 공동연구에 서툰 교수들의 지적 문화풍토를 고치지 않고서는 인문한국 사업이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유수의 해외 대학들도 인터넷으로 강의를 오픈한다. 이전에 강단에서 소화했던 지식에 대한 제고가 필요하다. 교수들도 유학가서 공부하고 온 20~30년 전 지식으로 자기만의 성역 안에 머무르기보다는 새로운 어젠다를 창출해내고 관심 분야 교수들을 만나 공동연구를 하는 지적 풍토가 필요하다.”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학파까지는 아니더라고 연구의 집단적 힘이 창출될 수 있어야 자생학문의 길이 열린다는 지적이다.

전임 인력 몇 명을 채용한다고 해서 과잉 배출되는 인문학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근본적 해결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김 교수는 ‘국가교수제도’ 도입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정부가 고용해 이들이 대학 교양교육을 담당하며, 시민교육, 교사 재교육, 공무원 교육 등 고급교육이 필요한 부분에 적절히 운용한다는 그림이다. 그는 ‘인문’을 넓게 볼 것도 함께 주문했다. 인문을 인문학으로 한정짓지 말고 언어를 중심으로 해 인간과 관련된 모든 활동을 포함해달라는 요청이다. 높은 자살률, 바닥에 떨어진 인성교육 등으로 황폐해진 삶에 ‘인문’이야말로 해답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인문한국 사업이 인문교육과 유리돼 있기에 겉돈다는 지적도 있었다. 손동현 대교협 한국교양기초교육원장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햄릿의 심리분석 같은 연구는 하지만 이 작품으로 어떻게 청소년들에게 교훈을 주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교육연구를 병행하지 않는다. 연구재단의 지원 분류에 이런 카테고리 자체가 없다. 인문교양교육에 관심 있던 학문후속세대도 철학 전공이면 철학 논문이나 쓴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인문교육이 점점 천박해지고 있다”라고 현 인문교양교육에 대한 연구재단의 정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지난 7일 국회에서 열린 ‘문화융성 시대, 인문정신문화 진흥을 위한 법제화 방안’ 공개토론회에 참여하기도 했던 손 원장은 인문한국 사업이 국가의 인문정책과 함께 가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거시적 정책 구상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창조경제도 마찬가지고 국가에서 정책을 세울 때 기본적으로 인문정책이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 이를 담당할 인문정신문화정책심의회는 문체부와 교육부의 유기적 협력이 필요하지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수준으로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설정해야 한다.”

인문학 위기 타개를 위해 지난 시작된 인문한국 사업이 지난 6년간 이뤄낸 성과는 적지 않다. 하지만 HK 전임 경쟁으로 건전한 공동연구를 위협받는 학문후속세대들, 정량적이고 획일적인 평가로 공공재적 가치라는 본분을 잊은 채 무더기로 양산되는 논문과 총서들, 어젠다에 급급한 연구로 연구 기간을 연장하는 HK연구소의 관행이 개선되지 않고서는 4년 뒤 한국의 이론과 담론을 발신할 수 있는 세계적 연구소는 멀어 보인다. ‘인문’의 토양을 깊게 북돋을 수 있는 인문한국 사업에 대한 학계와 연구재단, 정부의 다각적인 성찰과 지혜가 절실히 요청된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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