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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중화론의 승계자 … “역사를 무시하고 개인을 수동적 존재로 이해”
전통적 중화론의 승계자 … “역사를 무시하고 개인을 수동적 존재로 이해”
  • 양재혁 성균관대·철학
  • 승인 2010.09.13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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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8>박종홍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여덟 번째 인물은 열암 박종홍(1903.7.1~1976.3.17)이다. 총 8표로 철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김재현 경남대 교수(철학)는 “일제하에서 철학적 모색을 전개했고 해방 후에는 전통 철학과 서양 철학을 종합하려 시도했다”고 박종홍 사상을 평가했다. 양재혁 성균관대 명예교수(철학)와 조은수 서울대 교수(철학)가 나서 박종홍 사상의 명과 암을 재조명했다. 박종홍은 향내적 태도로 서양철학을 해석해 한국 근대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반면 지배 이데올로기에 협조했던 점으로 인해 학계의 끊임없는 비판을 받아왔다. 두 철학자는 박종홍 사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열암 박종홍은 1903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경성제대 철학과 졸업 후 1937년 이화여전 강사로 임용됐다. 1945년 경성대 교수를 거쳐 1946년부터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박정희 정부의 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70년 12월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됐으며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사진: 열암기념사업회

오늘날 한국철학의 접근방식 중에 박종홍의 철학에 몇 페이지를 할애하지 않는 개론서는 드물다. 물론 편집자의 가치판단 경향에 따라 그에게 주어지는 중요성은 크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논리를 옹호하기 위해서든 그의 논리를 비판하기 위해서든 우선 그를 ‘한국의 위대한 철학자’로 전제한다. 그는 일제 시대에 이미 독일 관념론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수용했고, 또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서 미군정의 지원 하에 이뤄진 ‘조선 교육 심의회’에서 고등교육 프로그램에 관계했다. 그리고 민족분단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의 핵심사상인 ‘중용의 중화(中庸 中和)’ 논리는 민주정치시대에도 숭배됐다. 그것은 봉건질서를 지탱하는 충효의 가치관과 추상적 환원론(無極而太極, 往則歸) 곧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로 대표된다. 즉, 실상은 기존 지배체제의 옹호에 불과한 박종홍의 학문태도가 위대한 사상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지적성장과 유교사상의 영향

그의 ‘중화’사상은 남달리 겪은 일련의 ‘전통’숭배로 특징되는 그의 개인적인 여정과 관련 있다. 그는 자신의 출신환경, 최초로 받은 교육, 그리고 환경순응적인 지적흐름의 전통을 단절하지 못했다. 죽을 때 까지 그의 ‘중화사상’은 전통적 ‘聖人’논리를 이어받아, ‘우매한 백성[愚民]을 계도한다’는 성인론의 변형된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학자의 생명은 그가 처한 사회에 대한 분명한 ‘태도’에 있다. 그러나 박종홍은 ‘하등의 적극적 능력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고 고백하고 ‘不結果가 새싹’이라고 주장하면서 인문학 연구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즉 박종홍은 사회의 분화를 외면하고 있었으며, 사회계층들 속에서 그의 위치를 파악하지 않았다.

그는 1903년 태어나 한학자인 아버지의 유교사상을 주입받았다. 그것은 봉건질서를 지탱하는 충효의 가치관과 추상적 환원론으로 대표된다. 박종홍은 다카하시 도오루(高橋 亨)가 교장으로 있던 대구사범 선생으로 취임해 그로부터 退溪學에 대한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다카하시는 ‘우승열패’라는 사회진화론에 근거해 조선인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이론을 체계화한 인물이다. 역사과정의 생산관계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해서 그가 퇴계의 ‘居敬窮理’ 즉, 행동을 거부하는, 웅얼웅얼 알 수 없는 이론을 철학의 본체라고 높이 칭찬한 것을 박종홍이 그대로 답습했다. 일제의 교육목표는 ‘충성스런 황국신민 양성’이었으며, 박종홍은 그 목적을 전파하던 모범생이었다. 민족말살이라는 식민지현실에서 그는 독립의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추상적 미분하의 본체를 ‘중화’로 설정하고 그것에 매달렸으니, 지배와 피지배를 구분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전형적 우민철학의 핵심인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웅얼웅얼’한 것이다. 

 
한 학자에 대한 전기적 지표들을 제공하는 것이 상투적 관행이어서는 안 된다. 박종홍의 철학은 개인과 집단의 역사 속에서 구축되는 ‘태도(Haltung)’에 근거해 개인적, 집단적 실천들을 설명하는 대신에 ‘天命’이란 숙명론을 제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 대상을 과학적 원칙으로 분석하지 않고 분화 이전, 즉 태도를 보류한 분화이전의 ‘中’을 강조했다.

해방 이후 박종홍은 친일파들과 같이 존재근거를 미군정으로 옮겨 반공을 한국철학의 체계 삼아 민족분단의 이론을 제공했다. 특히 그가 힘쓴 이론은 현실의 모순을 망각하게 할 목적으로 하이데거의 ‘존재, 현상학의 본질불변’등의 허황한 용어들에 불교나 유교의 ‘심성론적 수양론’과 결부시킴으로써 민족분단과 정치부패를 철학적 토론에서 배제하게 했다.

역사를 통합하기 보다 단절시켜

인문학의 분화발전 과정에서 박종홍의 한국철학 접근방식은 책임이 크지 않을 수 없다. 그는 中和로 통합해 보는 방법을 주장하고 사회적 분석을 거부한다. 그리고 더욱이 그 속해 있는 행위자들 사이의 투쟁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중화가 합목적인 것’이라면 왜 한 집단은 보존 혹은 확장의 전략을 이용하고, 또 다른 집단은 전복의 전략들을 이용하는가. 오늘날 국내 철학담론은 박종홍에 의해 보급된 원생적 중화주의 지지자들 외에도 사회과학적으로 세분화된 선택적 접근법의 지지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역설적이게도 사회 과학적 투쟁이 가장 첨예할 뿐만 아니라 가장 생산적으로 드러날 때는 대립된 양자가 동일한 사회적 모순을 공유하고 있을 때다.

한국 철학의 여러 장들에서 박종홍의 영향을 받은 ‘원생적 존재론’(未發之中)연구가 주류를 형성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박종홍이 제안한 전통적 중화론이나 하이데거의 존재론(Sorge)에 대한 해석은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저서들 혹은 논문들이 입증하듯 일정 역할을 거듭해왔다. 의식무의식 중에 전통철학을 보급하려는 대학의 많은 철학 교수들에게는 아직도 지대한 유산으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박종홍은 특히 식민통치시기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우리’란 개념으로 황국신민론을 대변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여러 사회계급들로 분리돼 투쟁하고 있는 사회구조를 전통적 聖人論으로 설득하려는 태도에서 천황긍정론이다. 민족지배와 해방의 관계에서 벌이는 투쟁에 도덕적 심성론을 웅얼거렸다. 성인의 ‘仁愛’란 개념은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적절치 않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폐기된 개념이다.

오늘의 요구는 인애 대신 인권에 있다. 인권담론은 산업과 국제적 분쟁들의 변화, 그리고 행동주체들의 변화와 그 목표의 변화에 의해 정립된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분쟁의 목표는 더 이상 독재정권 전복이 아니라 사회의 문화적 동향, 특히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문화방침을 정치적 참여를 통해 조정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전통적 관행을 용인하게 되는 기구들과 그들이 기획하는 결정들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 투쟁이 제일 중요하다. 지배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의 지역이 옮겨지며 분쟁은 더욱 확장된다. 우리 사회의 집단들은 그들 나름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박종홍의 방식대로 웅얼거림의 방법으로 더 이상 지도자를 대변할 수 없다. 그들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온 많은 중간계층은 문화적 자유주의로 무장한 특수한 실천들과 가치를 확산시키고 있다.

과거와 현재사이의 대립은 필연적임에도 실상 그의 논리 핵심은 ‘中의 有無相轉 同時性’에 있다. 박종홍은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6·25 이후 박정희 독재시기까지의 중요한 집단들의 서로 다른 가치지향을 표상하지 않았다. 그의 이론은 너무나 정태적이며 역사를 무시한다. ‘참된 교육애의 거룩한 희생적 정신은 퇴계의 언행을 통해 길이 빛난다’는 박종홍의 교육주제는 비역사적이고 고정적인 성격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그리고 좌·우의 정치적 대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자의 대립으로 환원 될 수만은 없다. 각기 다른 구조의 고유한 정치논리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보유한 자본의 대조뿐 아니라 각기 처해 있는 계층구조도 중요하다. 단순히 ‘자유를 사랑하고 공산을 반대한 그의 태도’는 정치 기피현상을 정착시켰다. 박종홍의 반공철학 접근방식은 행동주체들의 역할을 무시하고 개인들을 극도로 수동적인 존재로만 봤다. 때문에 분단된 민족의 북쪽사회 행동주체들의 자유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그의 결정론은 일본과 미국의 분열주의 철학을 보급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으며 이것은 동시에 오늘날 국내 철학에 남는 과제다.

양재혁 성균관대·철학

필자는 독일 칼스루헤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현대사회에 있어서의 인식론과 성리학의 문제」, 저서로는 『동양철학 서양철학과 어떻게 다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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