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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적 언어 통해 한국 불교사상 해석 … ‘원효사상’의 고유성·특수성 밝혔다
서양철학적 언어 통해 한국 불교사상 해석 … ‘원효사상’의 고유성·특수성 밝혔다
  • 조은수 서울대·철학
  • 승인 2010.09.13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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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홍과 한국 사상의 ‘재발견’

박종홍은 한국불교를 철학이라는 근대 학문의 영역 속에 자리 잡게 만든 최초의 인물이다. 나아가 그의 삶과 학문 세계 자체가, 현대 한국 사회 속에  자리 잡아간 철학의 궤적을 보여준다. 그는 경성제국대 철학과에서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마쳤는데, 당시 일본교수들을 통해 독일철학을 배우고,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에 대해 연구했다. 대학원 수료 후 이화여전에서 가르치다가 해방 후부터 모교로 옮겨 은퇴할 때까지 서울대에서 교육과 연구에 종사했다. 은퇴 후 그가 박정희 정권하에서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수년간 있었던 경력은 그 후 박종홍 사상을 평가하는 학자들에 의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서양철학 특히 독일의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주로 연구하던 그가 어떻게 한국의 전통철학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다. 가족들은 “아버지는 50년대에 구미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귀국하신 후 한국의 철학사상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면서, ‘우리조상들도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에 관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나는 꼭지를 따주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고 기록에 쓰고있다 (「그리운 아버지, 열암 박종홍」). 따라서 1958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 제목이 「한국사상 연구에 관한 서론적인 구상」인 것은 이와 유관하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란 말로 시작하는 그 글은, 한국사상의 정체성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그 연구의 당위성을 촉구하는 웅장한 글로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문이다.

“『한국사상사』 능가하는 철학사 없어”

그는 과거 속에 유물로 묻혀있는 한국 사상을 새로이 재발견해 내는 일을 자임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 철학을 탐구하고 그것을 학문적으로 성립시키는 것은 한국인 된 사명이고, 나아가 한국 유학과 불교는 발굴을 기다리는 보물과 같다고 했다.

1972년에 출판된 『한국사상사-불교편』은 한 시대를 구획할 정도의 중요한 업적이다. 1983년에는 유교편도 발간됐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봉직하다가 서강대로 이직하고 그곳에서 퇴임하신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도 아직도 학계에 이 책을 능가하는 한국철학사가 없는 것 같다고 할 정도로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효용을 가진 저술이다. 문고판으로 출판됐으며 그 내용은 승랑, 원측, 원효, 나말여초의 사상, 의천, 그리고 지눌의 여섯 장으로 이뤄져 있다. 한국불교철학사 상의 주요인물 5명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박종홍의 한국 불교 연구 활동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불교를 철학적으로 접근했을 뿐 아니라 서양철학적언어를 통해 불교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불교사상사를 기술하면서, 전통적 불교 용어를 쓰기보다는 서양철학의 개념, 용어나 방법론 등을 들어서 그것을 설명했다. 많은 학자들은 불교 내부의 언어를 탈피해 새로운 언어로 불교 해석을 해내고자 시도하고 있는데, 이 같은 시도의 최초를 박종홍에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승랑에 관한 챕터는 「고구려 승랑의 인식방법론과 본체론」이란 제목이 되는 식이다.

 
박종홍의 한국 불교 연구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원효의 철학사상」이다. 그는 원효사상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천명하면서 원효 사상의 가장 근본적 특성을 화쟁이라고 진단하고, 원효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탐구할 것임을 선언했다. 그는 화쟁의 논리를 입파와 여탈이라는 특이한 방법론적 용어를 도입해 설명하고 또 어떤 때는 서양의 변증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박종홍이 원효를 개합의 논리로 설명한 이 글은 일찍이 미국 UCLA 로버트 버스웰 교수에 의해 번역 소개돼 외국 학자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2008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세계불교학대회에서는 일군의 불교학자들이 패널을 만들어 원효의 화쟁사상을 개합이라는 형식논리를 사용해 해석하는 것이 맞는가를 놓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화쟁 논리는 이후 한국학계에서 엉뚱한 운명을 맞게 되니, 1970년대 이후 당시 사회의 민족주의적 정서 또는 정치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필요성에 의해, 화쟁이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길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나타나게 되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당시 사회 상황은 화쟁 사상에서 새로운 도덕 원리를 발견하고, 여러 이견과 분열을 화합하는 한국적 사례로서 원효의 철학을 고취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화쟁 논리, 정치적 필요에 의해 변질돼

이러한 과정에서 박종홍 선생의 한국철학연구는 당시 전통 사상을 민족적 이데올로기로 탈바꿈시키려는 지배그룹의 의지와 결부돼 박정희 정권의 새로운 민족성 창조라는 논리와 맞물리는 수순을 밟게 됐다. 전통적 철학과 가치관을 현재와 ‘여기에 되살려’ 당시 사회의 새로운 위계질서를 정당화시키고, 나아가 공동의 선이 바로 대중을 위한 최상급 도덕률이란 주장의 기반을 제공했다. 그러나 박종홍 선생의 본래 의도가 그랬다기보다는 화쟁 개념이 정치적 유세의 전략을 찾고 있던 당시의 정권에 의해 민족화합과 국민 총화라는 이념으로 변질됐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후 1970년대 말과 80년대 박정희 정권의 몰락 이후 더욱 강한 민족주의적 열정이 등장하는데 이 흐름은 민족의 주체성 추구 내지는 전통문화에 대한 재평가로 특징된다. 이것은 정권으로부터 가해진 압력이라기보다는 대중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된 것으로서 전통적인 민족의 철학을 규정하고 독특한 한국의 전통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개인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추구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쉽게 민족주의 정서와 결합하는 특징을 보였다. 고대 동양 사상의 특징적인 면모를 부각하고 식민지 시대와 전쟁, 그리고 근대화의 역정 속에서 오랫동안 잊혀 왔던 우리의 조상과 선조에게서 물려받은 지혜를 되살리는 노력은 이후에도 다른 형태로 다른 주체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조은수 서울대·철학

필자는 미국 버클리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원효에 있어서 진리의 존재론적 지위」, 저서로는  『현대사회와 불교생명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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