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0:20 (일)
20년 피땀어린 학교 되찾기 위해 百方으로 뛰었지만
20년 피땀어린 학교 되찾기 위해 百方으로 뛰었지만
  • 교수신문
  • 승인 2008.06.23 14: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학 秘史] 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⑦

新理事長에게 보낸 請求書와 書信

請 求 書 (I)
      ……
 현 嶺南大學의 운명이 언제나 본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출발 당시에 그 불합리함을 指摘한대로, 지금 그 불건전한 결과를 坐視할 수 없어, 다시금 現 理事陣의 改編을 要求하고, 그 이유를 下記에 진술하려 합니다.

                                  下     記

                                    (一)
  첫째, 1967年 6月 靑丘大學이 어찌하여 청와대 비서실에게 넘겨졌으며, 그후 大邱大學이 무엇 때문에 引受되었던가를 한번 상기해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관련기사] ⑥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 … “사학 설립자 노력 정당하게 대접해야”
[관련기사] ⑤ 大邱에서도 의아해했던 ‘청구-대구 합병’… 설립자 의사 무시

[관련기사] ④ 陶南 조윤제 박사 ‘다시 일어서자’ 권유해 희망 가졌지만

[관련기사] ③ 이사장 자리 비어있던 ‘진상 각서’ … 故人의 말을 직접 인용한 까닭
[관련기사] ② “1967년 6월 신축 校舍 붕괴 … 위기 몰린 신경영진, 惡手 던져”
[관련기사] ① “2代 理事長, 설립자 배신하고 靑丘를 청와대에 넘겨”

 

靑丘大學은 八千餘萬圓의 부채 때문에 청와대에 進上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65年 7月 本人은 그 대학의 理事兼 學長으로서, 직원 몇몇의 不正을 감지하고, 이것을 조사, 처리하기위하여, 처음 변호사에게 문의하고, 다음에 자체감사를 시작했던 바, 이것을 두려워한 犯行職員들이 不平敎授 某某와 결탁하여 理事들과 本人사이를 離間시켰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어난 突發事態에서 本人은 일시적 충동으로 學長職을 사퇴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66年 11月에서 12 月 사이의 일이었습니다.

 ‘67年 1月부터 本人은 별도로 財團造成을 하고 있던 중, 6月  어느 날 그들이 증축하고 있던 校舍가 붕괴하는, 天地를 驚愕케 한 불상사를 초래하자, 自救收拾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20年間 기울여 육성한 그 學校를 설립자에게는 一言半句없이 청와대에 가져다 바친 것입니다.

 本人은 뒤미쳐 대통령과 李厚洛 실장에게 무려 數十次 진정 서한을 내고, 面會申請을 하는 등, 眞相을 설명하려고 시도했으나 官邊에서는 終始 묵살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同年 8月 ‘大統領學校’라는 大書特筆下에 所謂 新理事들의 명단이 일간지에 발표되자, 李 室長이 드디어 면회의 장소로 초대한 곳이 8月 18日 所謂 新舊理事가 會同한다는 半島호텔이었습니다.

 동창생들은 반대 성명을 냈으나, 本人은 그 동안 좌절 끝에 千載一遇 같은 이 기회를 저버릴 수 없어 일단 지시된 장소에 나가 別室에 있던 바, 李 室長은 면담은 전혀 의중에 없이 앞에서 당기고, 金成坤씨는 뒤에서 밀어, 막무간에 회의실에 끌어 넣고는, 대통령을 顧問으로 하고, ‘大靑丘大學’ 건설한다는 宣言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本人은 舊理事들 면전에 물잔의 물을 던지면서 이 사태가 모두 不正을 隱蔽하려는 그들의 所致라는 것과 저간의 경위를 약간 설명하고,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1. 經理不正을 계속 조사해 줄 것.
          2. 增築中  校舍의 倒壞사건의 責任追窮.
          3. 本人의 大靑丘 建設에의 참여.

그리고 이것을 다시 書面으로, 金成坤씨를 통하여 제출하였습니다.

 

文化洞 校舍, 지금 'Migliore(밀리오레)' 建物 자리.
그러나 다시금 이것은 묵살당하고, 新任 理事들의 공약, 卽 同年 9月 18日까지 一切負債를 청산하고, 10月18日까지 거액을 투자하여 大靑丘大學 건설계획을 완료한다는 것도 履行되지 않았습니다. 들으니, 負債 8千萬圓은 결국 靑丘大學 文化洞 校舍敷地 일부의 道路編入에서 나온 보상금으로 辨濟했다고 합니다. 한 편으로는 大邱大學의 讓與, 인수가 秘書室과 李秉喆씨 사이에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二)

 마침내 12月 12日 兩大學의 통합이 大大的으로 신문지상에 보도되었으니, 이것은 靑丘大學 設立者의 의사는 全혀 무시된채, 兩大學 미해결의 윤리적, 事理的 모순을 그대로 지니고, 靑瓦臺 권력의 料理下에 恣行된 것입니다.

                               (三)

 慶山 農地와 先山을 강제 징용하다시피 했으니, 群民들의 원성도 조금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勤勞人의 요청에 의하여 都心에 생겨났고, 都心에서 자란 靑丘大學에 있어서 文化洞 校舍는 그 역사를 위해서도, 도시의 문화공간의 필요로 보아서도 없애지 못할 장소로, 本人으로서는 그 매각이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 校舍를 무리하게 매각하느라고 政府機關을 이리저리 格에 안 맞게 옮기고, 億臺 이상 가치의 堅固한 건물을 破壞해버린다면 국가적 손실이 아니겠습니까.

 통합후 兩大學의 전통을 살리고, 권리와 의무를 계승한다던 공약은 아랑곳없이, 그 학교는 지금 무조건 抹殺主義를 능사로 삼고 있는듯 합니다. 국립인지, 사립인지 성격도  모호한 가운데 常務理事 한 사람의 독무대가 되어있으니, 국민의 눈에는 權力誇示의 무대입니다…….

 그래서 지금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씩이라도 개선해나가는 의미에서, 우선 理事陣의 합리적 편성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즉, 兩大學이 같은 比例로 3人 以上 자리를 갖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설 工業專門學校는 設立者에게 환원한다고 言約한 사실이 역력히 있고, 그 후  書面으로 계속 이를 제기해 온 바이오니, 지금 새삼 설명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약속은 즉각 履行해주시기 바랍니다.

 以上은 모두 불합리한 시작이 빚어낸 결과로, 후환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방법인 바, 이 요청의 선의적 意圖는 額面그대로 받아주셔서 無妨합니다. 
                        
                                   1970年  4月
                                                        靑丘大學 設立者     崔 海 淸

嶺南大學校 理事長   李 東 寧  貴下 

請 求 書 (II)

        ……
 지금 새삼 과거에 言及하는 것이 貴下의 氣分에 맞지 않을지 모르고, 本人 역시 快事는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의 일이 어제에 비롯됨은 三尺童子라도 아는 바이고, 역사가 정치권력에 의하여 고정되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도 성인大衆은 다 경험한 바입니다. 飜手作雨하는 정치권력에 비하여 眞理는 언젠가 되살아나는 법이지오. 現在 貴財團에서 兩大學의 과거 抹殺을 일삼고, 本人에 대해서도 박해를 가하고 있는 것이 다 이것을 두려워한 나머지이겠습니다마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야청 Versailles, 1959
귀하께서는 설립자를 제외한 舊理事 몇 사람의 覺書 한 장으로 靑丘大學을 합법적으로 인수한 것이라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裁判所, 登記所를 둘러싸고 있는 詐欺꾼들의 행위를 시민들은 많이 보고 온 터입니다.

 靑丘大學은 負債에 넘어진 학교도 아니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소위 분규학교도 아니었습니다. 1966年 11月末頃에서 12月사이에 일어난 靑丘事態란 어디까지나 내부적인 일에 불과했습니다. 평소 학교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舊理事들이 理事職을 무슨 권리인양 알고, 過多한 대가를 설립자에게 요구하기에 이것을 屢次 拒絶했던 바, 그들은 당시 帳簿不正을 저질은 직원 몇몇과 不平敎授 몇몇과 결탁해서 일시 반발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빚어진 사태를 本人은 일시 후퇴하여 학교경영을 그들에게 放任한 것이 1967年 1月부터 6月 사이의 일이었는데, 6月15日그들의 무모한 교사증축이 倒壞慘事를 일어키자, 당황한 나머지 수습의 길을 청와대 進上에 찾은 것입니다 ― 本人의 20年 피땀 어린 그 학교를 말입니다.

 本人은 즉시 대통령에게, 李厚洛 室長에게 사태의 眞相을 알리려 數十次 서신을 보내고, 면회를 신청하는등 각방 노력을 했는데도 회답이 없다가, 마침내 李室長이 相面을 期約해 준 자리가 同年 8月18日소위 新舊 理事들이 합석한다는 半島호텔이었습니다. 그러나 李室長은 面晤대신에 本人을 바로 회의장으로 이끌어 나갔는데, 그때 抵抗하는 本人을 李室長은 앞에서 잡아당기고, 金成坤 議員은 뒤에서 腕力으로 밀어넣는 光景을 貴下도 目睹하였습니다.

 귀하께서 지금 理事長職에 취임은 하고 계시나, 당시의 상황과 그 경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계신다해도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신문지상에 그 학교가 대통령의 학교라고 갑작히 大書特筆로 보도되었을 때,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다가 12月 15日에는 거액을 투자하여 大 靑丘大學을 건설하겠다던 공약을 깨고, 靑大, 邱大가 통합한다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兩大學 동창생들의 반대성명을 묵살하고, 미해결의 문제를 담뿍 싣고, 설립자에게는 傍若無人으로 소위 嶺南大學이 생겨난 것입니다.
以來 三年, 本人이 예측하고, 世人이 우려한대로, 그 학교는 아직도 건전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선 現  理事님들 중에 몇 분이, 얼마나 직접 투자를 했으며, 진정으로 晝夜間에 학교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몇 분이나 되십니까.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나, 都市文化를 위해서나 없애지 못할 文化洞 校舍를 무리한 방법으로 매각하고, 그 대금으로 慶山郡民을 울려가며 그들의 농지, 선산을 매수하여……

 學校로서 더욱 중요한 것은 물질보다 내용인데, 嶺南大學은 國立인지 私立인지 성격이 모호하고, 떳떳한 정신을 내세우기에 그 형성과정이 너무나 정도를 벗어났습니다. 권력과 학원은 氷炭不相容인데, 이 밀착의 시작은 끝끝내 학교의 汚點으로 남을 것입니다.

 兩大學의 전통과 권리, 의무를 계승한다던 公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무조건 抹殺主義를 능사로 삼고, 常任理事 한 사람에게 독무대를 제공하고 있는 樣相은 바로 權力誇示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리는 교육界를 넘어서 일반사회의 건전성을 좀먹고, 시민들의 嚬蹙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귀하께서는 밝은 장래를 展望하십니까.

 

필자 최찬식씨.
勢不得已하여 이미 벌어진 상황이나마, 그 학교의 최선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간 前後事의 일단을 설명한 바입니다. 학교의 좀 더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좀 더 후환을 덜기 위하여 냉철한 판단을 내리시기 바랍니다. 우선 하나씩이라도 실마리를 풀어나가는 意味에서, 영大의 전신 靑丘大學의 창설자는 다음과 같이 요구합니다. 조속한 시일내에 回示 있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記

 1. 現理事陣을 개편하여, 兩大學에서 같은 比例로 각각 삼인 以上의 理事席을 配當할 것.
 2. 工業專門學校는 통합에서 제외하여, 設立者에게 돌려주기로 분명히 약속한 바이니, 그 간 屢次 서면으로 촉구한 대로 早速히 이行할 것.
 3. 勞動法에도 퇴직금이란 명목이 있거늘…… 本人에게 응분의 보상을 치러 줄 것.

                                  1970 4月
                     靑丘大學 設立者   崔 海 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