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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경세’ 매개로 미래 설계한다
‘순수와 경세’ 매개로 미래 설계한다
  • 김월회
  • 승인 2024.03.0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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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개념의 재정립 위한 제언

경제인문사회연구회 2023년 지정과제 「인문정책 거버넌스 구축의 이론적 근거 연구」는 인문정책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인문 개념을 이념적·역사적 차원에서 재정립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수행됐다. 필자가 연구책임자를 맡았고, 도승연 광운대 인제니움학부대학 교수,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 윤비 성균관대 교수(정치외교학과)가 공동연구원으로 연구에 참여했다.

우리 연구의 핵심은 인문정책 거버넌스 구축에 필요한 인문 개념의 재정립이다. 이를 위해 먼저 전근대시기 중국과 서구에서의 인문·인문학·인문주의에 대한 이해를 살펴봤다. 이 과정에서 한자권 전근대시기의 문(文)·인문·문명·문화의 개념을 고찰했고, 서구에서는 고대 그리스, 로마와 르네상스시대의 인문, 인문학, 인문주의 개념을 살펴보았다. 그런 다음 경세적 인문의 이론적 근거로 ‘동태적(動態的) 인문’, ‘동사적 앎’, ‘수기와 치인의 되먹임구조’라는 전통에 주목해 이들을 고찰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및 르네상스시대의 인문과 인문학에 대한 관념을 살펴봤다. 

역사적 근거로는 ‘고대 중국의 학정일체(學政一體: 학술과 정사의 일체화) 전통’, ‘역대 중국의 황실 주도 도서 정비와 간행 사업’, ‘중국 전국시대의 직하학궁(稷下學宮)’과 ‘조선시대의 규장각’ 및 ‘인문학이 만든 로마 국가와 로마문명’, ‘그리스-로마의 인문진흥과 르네상스시대의 인문부흥’, ‘서구 근대를 빚은 인문학’ 전통에 주목해 고찰했다. 이번 연구에서 재정립한 인문 개념이 인문정책 거버넌스 구축에서 이른바 ‘순수 지향적 인문학’과 ‘경세 지향적 인문학’을 연계해 주는 매개자이자 장의 역할을, 인문정책 거버넌스는 인문학과 경세를 연계해주는 매개자이자 장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봤다.      

특히 인문이 본성적·이념적 차원과 실천적·역사적 차원 모두에서 천하 경영, 국가 통치와 유기적으로 연동돼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문명의 요람이자 그것의 기틀을 빚어내는 차원과도 밀접하게 연계돼 있음도 확인했다. 예컨대 중국 전국시대의 직하학궁과 역대 통일왕조의 대규모 도서 정비와 간행 사업 및 조선시대 규장각의 사례를 통해, 고대 그리스부터 로마와 르네상스 및 근대에 걸쳐 인문학이 국가 형성부터 운영과 유지 및 갱신의 토대가 됐음을 통해, 인문이 경세의 근간이자 원천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인문은 본성적으로 ‘쓸모없음의 쓸모’, ‘이익 없음의 이익’ 등의 표현으로 대변되는, 이를테면 ‘순수’만을 지향한다거나 그것만이 인문의 참된 본령이라고 간주함은 비역사적인 판단임을 알 수 있었다. 

단적으로 인문은 경세와 순수를 양대 기축으로 삼아왔던 것이며,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되먹임 하는 회로를 구성하며 동전 하나의 양면과도 같은 양태를 이뤄왔다. 동양이나 서양 모두 고대로부터 인문은 순수 지향적 경향성과 경세 지향적 경향성이 늘 함께 있어왔음에도 한국사회에서는 전자만이 참된 인문이라는 관념이 지배적이었을 따름이다. 

인문정책 거버넌스 구축의 이론적 근거로 경세형 인문을 제시함은 그 자체로 국가와 인문정책, 인문이 한 몸처럼 연동돼 있던 역사의 복원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가가 인문정책을 수립·집행·갱신해가야 함은 단지 물질적 차원에서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이 문화적 차원에서도 선진국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국가와 인문정책, 인문의 결합은 선진국만의 특징이 아니라, 국가가 국가로서의 기본을 수행하고자 하는 한 항상 실현돼 왔다. 경세적 인문의 복원 작업은 다음 같은 현재적 의의를 지닌다. 전근대시기 동서양의 경세 실제에서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인문은 국가와 사회의 ‘미래 설계자’이다. 또한 국가와 사회 경영의 기반이자 동반자로서 ‘지속 가능’한 국력 창출의 마르지 않는 원천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 왔다. 

특히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선 한국의 경우, 인문을 기반으로 우리의 현 상황을 진단하고, 미래를 구체적으로 빚어가는 것은 국가가 마땅히 실현해야 할 소명이다. 이는 인문이 순수 지향적 인문학만을 고수해서는 안 됨을 분명히 말해준다. 또한 ‘선진국-선진국다움’의 창출과 지속 가능한 갱신을 위해서는 순수 지향적 인문 하나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함도 일러준다. 

한국이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존재하고 구동되기 위해서는 ‘과학흥국’과 ‘인문경국’의 양 날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청에 명실상부하게 부응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순수 지향형 인문과 경세 지향형 인문의 병중이 반드시 필요하다.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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