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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 가능한 흐름’을 빚을 줄 아는 국가
‘지속 가능한 흐름’을 빚을 줄 아는 국가
  • 김월회
  • 승인 2022.01.03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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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_ 선도 국가란 무엇인가 ③

근대적 시민사회라는 기존 패러다임을 넘어서서 
‘인문적 시민사회’가 구현될 때 비로소 ‘성숙이 성장이 되는’ 회로가 
개인부터 국가 차원에 이르기까지 갖춰지고 작동될 수 있다. 
인문복지의 보편적 시행은 이러한 진전을 일궈내는 데 터전이 될 수 있다.

선도국가는 ‘첫발을 내딛는(first mover)’ 나라인 동시에 그렇게 내딛은 첫 걸음을 지속 가능한 흐름이 되도록 빚어갈 줄 아는 나라이다. 인간은 백년을 못 채우는 존재이지만 다행히 자연이 있어 지속 가능한 흐름을 사유하고 구현하며 만물의 영장인 양 살아올 수 있었다. 

자연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흐름 자체이다. 지난 호(<교수신문> 2021년 12월 20일자)에서 안재원 교수의 “자연을 보호하겠다는 오만한 주장부터 폐기해야 한다”는 일갈은 그래서 통렬하다. 인간과 사회뿐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국가의 존재 이유로 삼고 국가를 경영하는 나라가 바로 선도국가임을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인문은 그러한 자연을 욕망한다. 개체의 삶은 유한하지만 개체들이 빚어낸 인문, 그러니까 ‘인간다움’은 자연을 닮아 지속될 수 있다. 여기서 인문은 분과학문의 하나인 인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무늬’라는 축자적 의미처럼 인간다움의 총화를 가리킨다. 이는 말이나 행위, 글, 소리, 그림, 조형 등에 담겨 시간의 늪을 가로지르고 공간의 벽을 넘나든다. 그래서 인문은 인류의 생존과 생활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을 빚어냄으로써 인간은 살아남는 수준을 넘어 문명을 구가할 수 있었다. 생존이 아닌 생활을 위해 존재하는 국가라는 당위도 실현할 수 있었다. 

인문이라는 지속 가능한 흐름

저 옛날부터 군주의 존재 이유를 ‘이민(利民)’, 그러니까 민을 이롭게 하는 데서 찾은 까닭이다. ‘이민’은 민이 개나 돼지가 아닌 한, 단지 배가 충족됨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생래적으로 가슴 쓰고 머리 쓰는 존재이기에 마음과 머리가 충족됐을 때 비로소 이롭다고 판단하게 된다. 인문이 배를 위한 생존만이 아니라 마음과 머리를 위한 생활을 가능케 하는 터전이었음이다. 나아가 인문은 성숙의 텃밭이다. 덕분에 인류는 물질적 성장을 통한 이익의 극성을 넘어 도덕적 역량의 증대를 통한 문명의 성숙을 도모할 줄 알았다.

그래서 공자는 이민뿐 아니라 ‘안민(安民)’, 곧 물질적ㆍ정신적 차원 모두에서 민을 편안하게 함을 군주의 존재 이유로 제시했고, 맹자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소득인 ‘항산(恒産)’만으로는 부족하고 성숙에 필요한 도덕심인 ‘항심(恒心)’의 구비를 설파했다. 

이렇듯 인문은 생존과 생활, 성장과 성숙 모두를 품고서 생존을 생활과 맺어주고 성장을 성숙으로 이어간다. 그러면서 자연처럼 후세로 이어진다. 하여 선도자가 첫발을 내딛음도, 또 이를 지속 가능한 흐름으로 빚어감도 모두 인문 안에서의 일이다. 자연 앞에서 더는 오만하지 말아야 함처럼 인문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다.

국가의 성숙은 전 지구 차원의 문제 해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요청된다. 사진=픽사베이

국가의 인문화가 필요한 까닭

더구나 삶의 조건, 문명 조건이 4차 산업혁명ㆍ지식기반 사회ㆍ평생공부 시대 등으로 대변되는 21세기이다.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 또한 인문 앞에서 더는 오만해서는 안 되는 때이다. 달리 말해 ‘국가의 인문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가의 인문화가 선도자로서 내딛은 첫걸음을 지속 가능한 흐름으로 빚어가는 데 관건이 되는 시대가 펼쳐지고 있기에 그러하다. 

국가의 인문화란 인문의 국가 주도를 말함이 아니다. ‘인문적 시민사회’, 그러니까 근대적 시민사회가 인문적으로 한층 성숙됨으로써 그 결과로 구현되어야 한다. 사람의 인문적 성숙이 시민사회의 인문적 성숙으로 모아지고 그 과정에서 국가의 인문적 성숙이 견인되는 회로의 소산이다. 이 회로가 제대로 작동되면 개인의 인문적 성숙과 인문적 시민사회의 보편적 구현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보장하는 정책의 입안, 제도의 구축, 이들의 지속적 시행에 필요한 재정적 지원 등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는 매우 긴요하다. 생명공학ㆍ인공지능ㆍ로봇의 더디지 않은 발달이 시사해주듯이 자본주의는 인간생명·인간정신·인간역량 등 인간다움의 상당 부분을 자신의 고정자산으로 착착 포섭해가고 있다. 초국적 자본주의의 구동이 입증해주듯이 자본주의가 개인은 물론 국가 차원을 넘어서 작동된 지도 이미 오래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문적 삶과 사회의 구현을 위한 노력을 개인에게 일임한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지독한 난독증이다.

게다가 디지털 기반 과학기술의 발달로 국가는 개인과 사회 차원에서 갈수록 미시적으로 작동한다. ‘사람의 성숙-사회의 성숙-국가의 성숙’이 서로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회로가 뒷받침되지 않은 한, 개인의 성숙이나 사회의 성숙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일 따름이다. 

한편 국가의 성숙은 전 지구 차원의 문제 해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요청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익히 경험했듯이, 생태 파괴로 인한 이상기후 등의 자연재해와 갈등ㆍ테러ㆍ전쟁 등으로 인한 사회적 재난은 일국 차원을 넘어서 국제적 차원에서 상호 연동된 채로 발생하고 심화되고 있다. 이에 탄소 제로 등의 친환경, 인권 등의 사회적 책임, 공정 등의 윤리적 지배구조 같은 인문적 가치가 이들 지구적 현안 해결의 관건으로 대두되고 있으며, 나아가 기존 국제질서의 새로운 재편을 야기하고 있다. 세계화된 재해재난의 해결은 일국의 역량을 넘어서 있기에 국가를 기본단위로 하는 협력이 국제질서의 기본이 될 터, 인문화가 덜된 국가가 설 자리는 국제사회에서 갈수록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인문복지’라는 과업

국가의 인문화는 ‘인문복지’라는 말로 갈무리할 수 있다. 선도국가로서 해야 할 일의 하나가 국민의 기본권으로 ‘인문복지권’을 헌법에 명기하고 이를 보편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다. 인문복지라 함은 4차 산업혁명ㆍ지식기반 사회ㆍ평생공부 시대의 본격적 전개에 따라 평생복지의 차원에서 차별 없이 인문을 활용하고 누릴 권리를 말한다. 이것이 절실한 까닭은 근대적 시민사회라는 기존 패러다임을 넘어서서 인문적 시민사회가 구현될 때 비로소 성숙이 성장이 되는 회로가 개인부터 국가 차원에 이르기까지 갖춰지고 작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문복지의 보편적 시행은 이러한 진전을 일궈내는 데 터전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첫발을 내딛는 국가로서 반드시 갖춰야 하는 역량인 미래기획 역량을 개인과 사회, 국가가 골고루 증진해갈 수 있게 된다. 4차 산업혁명의 진전에 따라 인간의 생명, 지능, 활동 등의 디지털화ㆍ공학기술화가 가속되고 있고, ‘가족-집’ ‘교육-학교’ ‘노동-회사(공장)’ 등의 근대적 사회 재생산구조가 근본부터 재편되고 있다. 또한 ‘인간­비(非)인간’ ‘실제세계­가상세계’ ‘실제자아-가상자아’ ‘글로벌-로컬’ 간의 경계가 해체되거나 융합되고 있다.

이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기존 관념의 조정, 기존 가치와 권위의 리셋, ‘세계(globalism)-국가(nationalism)-개인(liberalism)’ 관계의 재설정 등이 요청되고 있고, 이들은 개인과 사회, 국가 할 것 없이 목하 본격화된 문명조건의 변이에 대한 능동적, 시의적 대응 능력의 구비가, 또 이를 기반으로 한 미래기획 역량의 증진이 필수임을 웅변해준다. 

이러한 역량의 구비를 개인의 몫으로 맡겨둘 수만은 없다. ‘기울어진 운동장’ ‘유리천장’ 같은 말이 삶의 실제 그대로인 현실에서 성숙이 성장이 되는 선도국가를 지향함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인문적 시민사회 구현의 제도적, 재정적 바탕이 되는 인문복지의 보편적 시행이 선도국가로서 내딛은 첫걸음을 지속 가능한 흐름으로 빚어가는 미더운 길인 까닭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서울대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박사를 했다. 주로 고대와 근대 중국의 학술사상과 중국문학사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인문적 시민사회’ 구현을 위한 교양교육과 인문교육에 대한 연구도 함께 하고 있다. 저서로 『인문정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 『깊음에서 비롯되는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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