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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너머에 있는 정치적 미소”… 엄밀한 연구 부족
“신화 너머에 있는 정치적 미소”… 엄밀한 연구 부족
  • 최장순 기자
  • 승인 2006.07.0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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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비평_엘리아데의 신화연구, 어떻게 볼 것인가

© 일러스트: Alfio Krancic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이미 하나의 ‘現象’이다. 엘리아데는 이미 종교학 연구자라면 한번쯤 읽고 넘어가야할 고전이 돼버렸으며, 조셉 캠벨, 칼 융과 함께 종교학의 3대 스타로 군림하면서, 대중들에게 하나의 문화적 트렌드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엘리아데를 찾는 이유는 뭘까.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일단 대중들의 신화에 대한 관심이 기반이 된 것”이라며 “엘리아데는 종교현상에 대한 보편이론을 구축함에 있어 풍부한 경험적 사례를 제시해 재미를 더한다”고 분석했다. 이론이 이론으로만 그치지 않고 생생한 사례를 통해 증명되고 있어 독자들이 찾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인기가 일방적 찬사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해 박규태 한양대 교수(일본언어·문화)는 ‘세계종교사상사 3’를 번역하고 나서, “반역사주의, 환원주의, 독단적이고 주관적인 신학, 은폐된 오리엔탈리즘, 비학문적 픽션, 애매모호한 직관주의, 실증성과 정밀성을 결여한 제너럴리스트, 또 하나의 종교로서의 엘리아데 종교학 등, 엘리아데 비판에 흔히 따라다니는 수식어”를 소개한 바 있다. 비판의 차원은 너무나 다양해서 어느 것부터 검토해야할지 난감한 상황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러한 비판적 수식어들이 하나의 논점, 즉 “엘리아데 종교학과 해석학은 非역사적”이라는 비판을 중심으로 정렬된다는 것.

엘리아데는 항상 태고적 ‘그 때(illum tempus)’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여기서 인간이 본받고 따라야 할 하나의 ‘原型(archetype)’을 발굴함으로써 원형으로부터 일탈해 삶의 의미를 상실한 근대인과 그 문명을 비판했다. 엘리아데의 눈에는, 근대인의 이러한 ‘일탈’은 곧 죄악으로의 붕괴(Verfall)였던 것. 이러한 ‘몰락’이 못마땅했던 그는 근대인을 종교의례와 신화를 통한 세계의 聖化에 동참시켜 ‘새로운 휴머니즘’을 구현하고자 했다.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다.

이창익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이하 한종연) 연구원은 “‘모든 사물을 聖化시키려는 경향성’이 ‘성현의 변증법’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고 “사물을 성화시킨다는 것은 사물을 ‘원형’으로 환원하여 결국 사물로부터 ‘역사’를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전한다(‘엘리아데와 차이의 해석학’). 엘리아데 비판이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그가 ‘역사’를 넘어서려는 바로 그 순간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엘리아데 종교학의 비역사성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한국학)의 비판이 눈길을 끈다(‘엘리아데가 선택한 ‘부드러운 파시즘’’). 박 교수는 엘리아데의 극단적 관념주의가 “계급 개념 자체를 부정”했다고 지적한다. 이어 그는 “공산주의뿐 아니라 모든 진보적 사상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몸처럼 움직이는 ‘유기적 사회’인 엘리아데의 이상을 위협하는 존재”였으며, 결국 엘리아데는 이러한 위협을 퇴치하기 위해 “독재자 살라자르(Salazar) 치하의 당대 포르투갈이나,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같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부드러운 파시즘’을 택했다”는 것.

하지만, 지난 24일 열린 ‘한일 종교학 공동세미나’에서 츠루오카 요시오(鶴罔賀雄) 도쿄대 교수(종교학)는 “엘리아데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지적은 ‘정치지상주의’적 단정에 불과”하며 “종교를 정치적 수준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엘리아데 종교학의 성격을 보다 종교학적으로,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창익 연구원은 “엘리아데는 당시 지나치게 실증주의적, 역사주의적 시각에 대한 반발로서, 자기 나름의 현상학적·해석학적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며 “엘리아데의 학문적 가면 너머에 도사린 정치적 미소는 과연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한편, 엘리아데에 대한 신화학적 비판도 제기됐다.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중문학)는 “엘리아데는 끊임없이 동일한 패턴으로 신화를 분석해 신화 자체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 정 교수는 “에누마 엘리쉬 신화에서는 당시 사회 권력관계의 변천 및 신구세력의 갈등을 읽어낼 수도 있는데, 엘리아데는 초월의 측면만을 보여주고 있어 현대문명의 고질적 병폐를 신화로써 치유할 수 있다는 ‘신화 만능주의’를 야기시킨다”고 비판했다.

또한 김현자 서울대 종교문제연구소 연구원(중국신화)은 “뒤메질이나 레비스트로스의 경우 신화가 담겨있는 문화적 컨텍스트를 철저히 파악한 후, 역사와 문화 전체 속에서 신화를 해석하는 반면, 엘리아데는 그렇지 않다”며 엘리아데의 신화분석이 지니는 지나친 일반화를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곰’과 다른 나라의 ‘곰’이 지니는 문화적 가치는 상이한데, 엘리아데의 형태론에서는 동일하게 의미화된다는 지적이다. 또한, “엘리아데의 경우 이미 연구된 신화들을 통해 일반적 보편성을 추출하기 때문에 문헌학적 엄밀성이 결여된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한 반비판도 적지 않다. 엘리아데 종교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대해 김윤성 한신대 교수(종교문화학)는 “엘리아데의 주요개념이나 방법들에 대한 오독으로부터 일방적인 비판이 이뤄지기도 했다”고 전했으며, 박규태 교수는 “비역사성과 관련한 여러 비판들의 일면성은 보다 심화된 엘리아데 연구를 통해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아직 학계에서도 엘리아데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일까.

엘리아데와 찰스 롱에게서 사사한 아라키 미치오(荒木美智雄)는 1980년대 엘리아데 연구의 단편적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을 가한다(‘새로운 휴머니즘을 요청하며’): “일본에서는 엘리아데의 학설의 여러 단편, 예를 들면 ‘성과 속’ ‘샤머니즘’ ‘원형(archetype)’ 등의 개념이 그의 종교학 전체의 문맥으로부터 단절되어 논의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 (중략) 엘리아데 학문의 근본문제가 전체적으로 고찰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스무 해를 넘긴 아라키 미치오의 이러한 지적은 현재 우리나라 종교학계에도 유효하다.

신광철 한신대 교수(종교학)에 따르면, 엘리아데의 저서 중 24권이 번역됐다. 엘리아데의 저서는 모두 38권. 저서의 63%가 번역된 상황이다. 하지만, 번역의 엄밀성에 대한 비평이 거의 부재한 상태인데다가, 엘리아데와 관련해서는 연구논문(33편), 석사논문(13편), 단행본(2권) 등 그 실적이 부진하다. 게다가 학문의 실증성과 과학성이 강조됨에 따라, 엘리아데는 학계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다.

조철수 서강대 강사(종교학)는 “엘리아데의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봐도 맞는 일반적인 이야기”라며 “이를 후대 연구자들이 더 이상 재생산해서는 안된다”고 전한다. ‘엘리아데’는 교양서 정도로 읽어야 한다는 것. 게다가 조철수 강사는 “엘리아데 종교학의 한국적 적용이 얼마나 타당한지 모르겠다”며 “그건 시작부터 틀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시작부터 틀린 것’에 왜 연구자들이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엘리아데는 ‘종교형태론’의 서문에서 “코끼리를 현미경을 통해서만 연구하는 자연과학자가 과연 그 동물을 충분히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푸앵카레의 말을 인용하면서 “종교현상은 그 자체의 고유한 차원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엘리아데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를 “그 자체의 고유한 차원에서 파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최장순 기자 ch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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