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1-12-01 18:34 (수)
철인왕과 사업가형 지도자
철인왕과 사업가형 지도자
  • 김성희
  • 승인 2021.11.02 0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성희의 North Face ⑩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1947년에 쓴 『휴머니즘과 테러』라는 책에서 스탈린체제를 옹호했다. 소련 대숙청 시기, 일련의 공개 재판을 그는 폭력이라고 인정하면서도, 혁명 과정에서 발생한 “혁명적 폭력”이라고 정당화했다. 물론 그도 훗날 소련을 비판하지만, 스탈린 생전의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 중 상당수와 마찬가지로 그는 스탈린의 폭력적인 지배방식에 대해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스탈린이 행한 폭력을 신비화했던 것이다.

물론 혁명적 폭력이란 그다지 난해한 개념은 아니었다. 혁명은 전쟁과 마찬가지로 예외상황이다. 이 예외상황은 국가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나치의 법철학자였던 칼 슈미트(Carl Schmitt)부터 21세기 초반 테러와의 전쟁 기간 미군의 고문 행위에 합법성을 부여했던 존 유(John Yoo)까지 국가의 폭력 혹은 독재를 정당화하는 시도는 항상 존재해왔다.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에서는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을 고안해 혁명 상황에서의 독재를 합리화했었다. 메를로 퐁티의 혁명적 폭력이라는 개념도 이 ‘예외상황에서의 국가의 폭력’이라는 계보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사회주의 진영의 혁명적 폭력이 문제였다면, 자본주의 진영에서는 “관리문화”가 문제였다. 미국의 교육철학자 레이몬드 칼라한(Raymond E. Callahan)은 『교육과 효율성 숭배(1962)』라는 책에서 산업혁명을 경험하면서 미국에서는 기업의 의사결정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토론과 합의보다는 기업 경영인 즉 관리자의 독단적 결정이 더 선호되는 문화는 “관리문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관리문화”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면서도 자본주의 국가 정치문화를 지탱하는 한 축이 되어왔다. 현재까지도 유권자나 상대 당과의 소통에는 미숙하더라도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지닌 사업가 출신의 정치인이 선호되기도 하는 이유는 이런 관리문화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적 폭력이든 관리문화이든 그 기원은 어쩌면 플라톤의 철인왕인지도 모른다. 이미지=위키미디어
혁명적 폭력이든 관리문화이든 그 기원은 어쩌면 플라톤의 철인왕인지도 모른다. 이미지=위키미디어

혁명적 폭력이든 관리문화이든 그 기원은 어쩌면 플라톤의 철인왕인지도 모르겠다. 플라톤이 꿈꾸던 이상사회는 철학자에 의해 지배되는 계급사회였다. 대중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회였다. 이 철인왕의 특징은 지배자의 지적 우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소련 대숙청 기간 동안 혁명적 폭력을 조장한 스탈린 역시 철인왕이었다. 그는 자신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가장 정통한 이론가이길 원했다. 언어학 논쟁에 끼어들어 언어가 하부구조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정치가이자 사상가이자 이론가였다.

이런 지적인 지도자의 시초는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지배했던 슐기(Shulgi) 왕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우르남무를 도와 법전을 편찬하기도 했고, 교육제도를 정비하기도 했다. 수메르어와 엘람어에 능통했으며, 스스로 자신을 칭송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모든 인류문명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중근동의 왕들은 문맹이 많았다. 그래서 읽고 쓸 수 있었던 슐기는 매우 특이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특이한 예는 플라톤의 시대를 거치며 꽤 일반적인 경우가 된다. 알렉산더대왕이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대왕도 그런 지적인 지도자였다. 이러한 지적인 지도자의 계보가 스탈린으로 이어진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영향을 받은 북한 지도자들 역시 이러한 계보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성은 탁월한 군사전략가이기도 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정통한 이론가이기도 했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기보다는 북한의 프로파간다에서 그렇게 묘사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가령 그의 청소년기를 그린 『혁명의 려명』은 소년 김일성은 마르스크주의에 관한 논쟁에서 간도의 조선인 지식인들을 무릎 꿇린다. 김정일 역시 지적인 지도자로 묘사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벤자민 프랭클린처럼 그는 다방면에 뛰어난 천재이다. 역사도 다시 쓰게 하고, 영화?문학?예술 부문을 개혁하기도 한다. 

이런 철인왕 유형의 지도자는 자본주의 관리문화의 사업가형 지도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독단적이어서 추진력이 있어 보이지만, 결국 그들의 정치는 폭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철학자 제이슨 스탠리(Jason Stanley)는 철인왕 유형의 지도자, 사업가형 지도자들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했다. 과거(냉전)의 문제도 아니고 타국(소련)의 문제도 아닌 현재 미국의 문제라고 한 것이다. 과거는 항상 우리를 반성하게 만든다. 현재 한국의 정치문화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스탠리의 성찰을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성희 숭실대 한국기독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연세대 언더우드국제대학,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서 한국문학과 영어논문쓰기 등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문학이론, 북한문학, 동아시아 냉전 문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