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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의 North Face ②] 죄의식의 사회, 양심의 문화
[김성희의 North Face ②] 죄의식의 사회, 양심의 문화
  • 김성희
  • 승인 2021.05.14 0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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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
김일성 광장에서 열린 횟불 행진. 사진=연합

 

감정에도 역사가 있다. 다시 말해, 시대에 따라 지배적인 감정이 있을 수 있다. 요즘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고 있지만, 정신뿐 아니라 감정 역시 ‘시대적’이다. 즉, ‘시대감정’도 있다는 말이다. 어떤 감정은 시대에 따라 약해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그 밀도나 중요성이 변하는 감정으로는 수치심을 꼽을 수 있다.

모욕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감정이 유난히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쉽게 모욕감을 느꼈고, 또 그런 감정을 초래한 이를 꼭 응징하려고 했다. 

서구 유럽의 경우, 백오십 년 전만 해도 귀족 남자들은 이 수치심 혹은 모욕감을 느끼면 목숨을 걸고 결투를 벌이곤 했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학창시절, 결투를 스무 번 넘게 했다고 한다. 결투는 주로 명예를 지키기 위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명예가 손상됐다고 느끼면 수치심・모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즈음에 오면, 이 수치심・모욕감은 비로소 비(非)문명인의 감정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에릭 도즈(Eric R. Dodds)는 『그리스인들과 비이성적인 것』(1951)이라는 책에서 고대 그리스 사회가 ‘수치심 문화’에서 ‘죄의식 문화’로, 즉 좀 더 문명화된 사회로 발전해갔다고 주장했다. 그보다 다소 앞선 시기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국화와 칼』(1946)에서 일본 사회를 수치심의 사회라고 명명한 바 있었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할복을 하기도 하는 일본인들은 기독교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베네딕트의 시선에서 볼 때, 명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문명화되지 못한 이들이었고, 꽤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문명인들에게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양심이다. 명예가 손상되면 수치심・모욕감을 느끼듯, 양심을 지키지 못하면 죄의식을 느낀다. 서구 근대는 명예 중심의 수치심 문화에서 양심 중심의 죄의식 문화로 이행하는 감정의 역사라고 봐도 무방하다. 가령 막스 베버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양심의 윤리이다. 물질이나 명예보다 중요한 것은 신이 자신에게 준 소명이고, 이 소명을 자신의 양심에 따라 실행한다. 

이런 감정사 연구는 공산주의 연구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소련 사회주의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 중 한 명인 예브게니 도브렌코(Evgeny Dobrenko)는 ‘사회주의적 경쟁’을 물질적 이익이 아닌 명예를 추구하는 행위라고 보았다. 물질적 보상보다는 명예라는 정신적 보상이 주어지는 게 ‘사회주의적 경쟁’의 시스템이다. 개인 사이, 혹은 집단(공장이나 마을) 사이의 경쟁에서 패했을 때, 느끼는 수치심과 모욕감이 사회주의 경제를 지탱했던 감정적 기반이었다. 이 수치심 사회는 서구의 죄의식 사회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북한의 문학 작품을 읽어보면, 사회주의 사회에서 명예가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문학 작품 안에서는 명예보다 양심이 더 중요하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경쟁에서 패했을 때 느끼게 되는 수치심과 모욕감을 피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자신의 양심에 따라 일하고, 자기 양심의 기준에 미달했을 때에는 죄의식을 느낀다. 실제로 그랬다기보다는 신문과 같은 미디어나 문학작품에서 양심이 크게 강조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분명히 담론의 차원에서 보면 북한은 죄의식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소엽의 「바다의 륜리(1966)」라는 단편소설을 보면, 물고기가 많이 잡히지 않자 어부들이 죄책감에 시달린다.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자신들 때문에 국가가 정한 “어획고 100만톤”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을 한다. 그래서 물질적 보상이 더 주어지지도 않는데,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밤새 잠도 못 이루고 일을 한다. 

이렇게 양심과 죄의식이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김일성이 일인 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하던 무렵인 것 같다. 기독교의 종교개혁이 개인과 신과의 일대일 관계를 강조했듯, 1960년대부터 북한은 인민 개인과 수령과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리기 시작한다. 수령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수령이 준 과업을 완벽하게 이루지 못하면 죄의식에 어쩔 줄을 몰라 한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문명화일까? 역사의 진보일까? 

북한의 사례는 감정사 연구의 난제 중 하나이다. 감정의 역사에서 진보란 없다. 수치심 사회가 죄의식의 사회로 변화하는 것을 두고 문명화라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북한의 사례는 서구의 근대화 서사, 진보 서사를 매우 기괴한 방식으로 해체한다. 

김성희 숭실대 한국기독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하버드대 동아시아언어문명학과에서 「권위와 감정: 북한문학의 종교적 상상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학이론과 북한문학, 동아시아 냉전 문화 등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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