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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10 - 멜리에와 앙라제
박홍규의 아나키스트열전10 - 멜리에와 앙라제
  • 교수신문
  • 승인 2019.12.05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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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리에를 아시나요?

앞에서 본 17세기 영국의 윈스턴리를 아시나요라고 물은 것 이상으로 18세기 프랑스의 멜리에(Jean Meslier, 1664~1729)를 아시나요라고 묻는 것은 후자가 우리에게는 정말 무명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윈스턴리는 영화로 만들어지고 학술논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멜리에는 그렇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윈스턴리와 18세기 프랑스의 멜리에는 각각 자국에서만 아나키스트로 다루어지는 특이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즉 프레포지에를 비롯한 프랑스인의 아나키즘 역사서에 윈스턴리는 아예 나오지 않는 반면, 영미의 아나키즘 책에서는 멜리에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 두 사람을 함께 다루는 것은 내가 처음이 아닐까. 

멜리에는 영미는 물론 프랑스 철학서에서도 보기 어렵다. 그를 하나의 장으로 다루는 거의 유일한 책은 미셀 옹프레의 <반철학사> 4권 <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주의 철학자들>이다. 계몽주의 사상을 다루는 그 책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계몽사상가들인 볼테르나 디드로나 루소나 칸트는 주역이 아니라 조역, 그것도 악역 정도로 나올 뿐이다. 이는 프레포지에 같은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을 찬양하는 것과 다르다. 

18세기는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을 준비한 시대였다. 당시의 프랑스는 다른 유럽 국가처럼 기독교 사상에 근거하여 교회와 소수 귀족이 특권층을 형성했으므로 대혁명을 준비하는 사상은 그 특권층에 반대하는 것이자 4세기에 기독교가 국교화된 이래 14세기 동안의 사상사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4세기만의 대혁명이었다. 그러나 그 대혁명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계몽사상가들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옹프레는 그들을 ‘흐릿한 빛들’, 즉 ‘불분명한 계몽’으로 평가 절하한다. 

가령 디드로나 콩도르세는 흑인 노예를 동정하면서도 노예 소유자들의 이익을 옹호했다. 순수이성의 사용을 기원하고 보통선거를 찬양한 칸트는 그것을 흑인은 물론 여성, 나아가 노동자나 월급을 받는 수동적 시민에게 인정하지 않는 차별의식을 가진 자였다. 루소는 인쇄술이 불온을 양산한다고 하면서 불신하고 연극은 의식과 몸을 누그러뜨린다며 증오하며, 과학과 모든 예술의 잘못된 계통을 열거하고, 신앙과 종교와 군사훈련과 함께 시골풍과 수공업과 무지를 찬양하며 서민을 순종상태로 유지시키려고 고심하고, 모든 혁명적 욕구를 차단하려고 하고, 사형제도를 옹호했다. 사형제도는 칸트, 몽테스키외, 디드로, 볼테르에 의해서도 옹호되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권력과 타협하기 위해 무신론을 비난하고 자연종교를 옹호했다. 즉 권력의 남용을 형이상학적으로 지지하여 특권층을 기쁘게 했다. 물론 볼테르 등의 이신론이나 루소 등의 자연종교는 어디까지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그들은 당대의 성직자들을 조금은 지탄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심스럽게 입술만 달싹거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가 민중을 왕정 하에 두게 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므로 그 자체를 부정할 수 없었다. 무신론은 모든 도덕을 부정한다고 믿는 그들은 무신론자들울 처형하는 것에도 찬성했다.

반면 옹프레가 말하는 멜리에 같은 급진주의 철학자들은 신도 주인도, 교황도 왕도 부인했다. 그러니 귀족 사교계나 대학 강단에 머무르는 루소 등이 보기에 신의 죽음을 말하는 멜리에 등의 급진주의자들은 ‘너무 촌스럽다.’급진주의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무신론자이다. 그들에게 모든 종교는 미신이고 모든 신은 허구이다. 그리고 유물론자이고 과학자다. 나아가 쾌락주의자고 혁명주의자로 사유재산을 거부하고 재산과 토지의 공유를 주장하며 지방자치주의를 주장한다. 멜리에는 그 선구자였고 그의 주장은 프랑스대혁명에서 앙라제의 주장으로 이어졌으며 다시 1968년의 학생운동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앙라제도 역사에서는 무시되었다. 따라서 멜리에로부터 앙라제에 이르는 프랑스의 17-18세기 아나키즘 사상사는 최근에 와서 재조명된 것이다. 그런 무시는 지구 반대쪽에서 프랑스혁명과는 철저히 무관하게 살았던 대한민국에서는 더욱더 철저했다. 

멜리에

1664년 멜리에가 태어나고 21년 뒤인 1685년, 프랑스에서는 위그노(칼뱅파)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를 강요하는 야만적인 명령이 내려지고, 이웃 독일에서는 인구의 절반을 희생시킨 참혹한 30년 종교전쟁(1618-1648)이 끝났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무엇보다도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났다. 최근 한국에서처럼 개독교라는 말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네덜란드의 스피노자(1632-1677)가 자연이 신의 피조물이라고 보는 기독교의 창조론을 부정하고 범신론을 세웠다. 1687년, 뉴턴(1643~1727)은 일정한 ‘법칙’에 의해 우주는 움직인다고 주장하여 ‘신’이 창조주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역사상 최초의 명백한 고전적 무신론자인 멜리에는 최근 등장한 현대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프 히친스 등의 대선배로 꼽히지만, 아나키즘의 역사를 살피려고 하는 우리의 관심은 그런 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무신론자로서의 멜리에에 대한 관심도 극히 최근에 생긴 것이었다. 앞에서 본 윈스턴리와 달리 멜리에가 남긴 유고는 그가 죽은 뒤 몇 년 뒤 당대의 철학자인 볼테르에 의해 발견되어 출판되었지만 볼테르는 무신론자 윈스턴리를 유신론자로 바꿀 정도로 그를 심각하게 왜곡했다. 멜리에가 무신론자로서는 물론이고 아나키스트로 각광을 받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평생을 시골 신부로 살았던 멜리에의 생애에서 아나키스트로 주목할 만한 점은 거의 없다. 신학교를 마치고 1689년에 고향 아르덴의 에트레피니라는 인구 165명의 작은 마을의 주임신부로 부임해 그곳에서 40년을 지내고 1729년에 사망했다. 교구청의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마을의 귀족과 마찰을 빚었으며,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선행을 했다고 하지만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18세의 친척 하녀를 두었는데 이는 만 40세 미만의 여성을 신부의 하녀로 삼지 못하게 한 교회법에 반하는 것이어서 처벌을 받았는데 이 점도 아나키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의 사상도 결코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예수회, 데카르트, 얀세니즘(jansenism) 등의 사상으로부터 자신의 무신론을 도출했고 몽테뉴나 라보에시를 비롯한 여러 선배 사상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당대의 파스칼들이나 세네카, 타키투스, 리비우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고전도 읽었다. 그리고 평생 한 권의 책을 썼지만 살아생전에는 발표하지 못했다. 그것을 발표하여 이단으로 쫓겨나거나 종교재판으로 화형당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지구의 모든 지배자와 모든 귀족이 신부의 창자에 묶여 교수형에 처해질 때 사람들의 희망은 되돌아올 것이다.”라고 한 말에서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말은 디드로에 의해 “마지막 왕이 마지막 신부의 창자에 묶여 교수형에 처해질 때까지는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아멘.”이라는 표현으로 변형되었고, 다시 프루동에 의해 “다른 사람도 아닌 두목이 감히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신부의 창자로, 마지막으로 남은 왕의 목을 조르자고”로 반복되었다. 1968년 5월, 소르본점령위원회의 급진적인 학생들은 "마지막 자본가가 마지막 관료의 내장과 함께 매달리기 전까지는 인류가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현대화했다. 

멜리에는 “나는 그 어떤 종교적인 넌센스도 믿지 않았다. 신은 없고, 내세도 없으며, 교회는 루이 14 세와 같은 폭군들이 당신을 가난하고 착취하도록 도와준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지만, 놈들에게 맞서 더 공정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한 멜리에는 기독교는 물론 모든 종교를 신이 아니라 ‘인간의 발명품’으로 간주했다. 창조주이자 절대자로서 신은 인간에 의한 숭배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 그 신이 오히려 인간을 사랑하고, 경배하고, 또 그들에게 봉사해야 한다고도 했다. 인간이 고통 받고 헐벗고 굶주리며 온갖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데 신은 왜 비밀스럽게 존재하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신이 인간만물을 창조하고 사랑한다고 하면서 인간에 대해 도대체 신이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아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멜리에는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자유의지 개념을 일축했다. 신이 존재하든 않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는 그들 자신의 본성을 소유하는 한 항상 동일할 것이라고 주장한 그는 성경에서 예언자들이 보았다고 하는 것은 미친 사람들의 환영에 불과하고 그들의 예언이라는 것들은 실현된 적이 없다고도 했다. 또 기독교 도덕은 자연의 가르침과 모순되고 기독교는 정치권력과 공모하여 착취한다고 주장했다. 즉 기독교는 교회와 정치가들이 어리석은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라는 것이다. 비록 초기 기독교인들이 재산을 나눔으로써 모범을 보였지만, 종교는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육성된 것이고 프랑스 왕들에 의해 폭정에 대한 고통과 복종의 수용을 장려하기 위해 오랫동안 퇴보했으며 불의는 전능한 존재의 의지로 설명되었다고 보았다. 

사회적 불의를 격렬하게 공격한 멜리에는 한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공동 재산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모두가 함께 일하는 일종의 농촌 원시공동체를 구상하기도 했다. 사랑과 형제애에 기반한 그 공동체는 서로를 돕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동맹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그 자신이 그런 공동체를 만들지는 못했다. 

프랑스대혁명과 앙라제

아나키즘 최고의 이론가로 일컬어지는 크로폿킨은 프랑스혁명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과 같은 사회주의자에게도 프랑스혁명은 혁명의 모델이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혁명은 그 테러적 성격이 프랑스혁명의 자코뱅에서 비롯되었다. 반면 마르크스와 대적한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프랑스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없는 자유는 특권이자 불의이고, 자유 없는 사회주의는 노예제이자 잔인성”이라고 했다. 

바쿠닌은 프랑스혁명의 주축인 부르주아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자코뱅(Jacobin) 으로 변호사, 언론인 및 혁명적 부르주아로 구성된 집단으로 정의와 자유 및 평등을 지지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그들 중에는 바뵈프(Francois Noel Babeuf, 1760~1797)처럼 완전한 국가 통제의 사회주의와 국가에 의해 강제된 평등을 요구한 사회주의 자코뱅도 있었으나, 대체로 경제적 혁명보다는 정치적 혁명을 추구했다. 또 하나는 지롱드(Girondins)로 상인을 비롯한 중산계급으로 자신들의 부를 추구하면서 자코뱅을 두려워했다.  

1793년에 혁명이 끝나기까지 불안과 폭동 및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1789년의 바스티유 습격 작전에 중산층은 왕과 타협하여 영국왕 정도로 왕의 권한을 축소하고자 했으나, 완고한 루이 16세가 이를 거부하여 타협은 실패하고 대중이 거리를 장악했다. 도시와 농촌의 열기가 의회에 왕을 능가하는 힘을 부여하여 ‘인권선언’을 발표했으나 왕의 거부로 개혁은 실패하고 파리는 기근으로 고통을 받았고 쿠데타 소문도 끊이지 않았다. 파리 여성들이 빵과 총을 요구하며 베르사유로 행진하자 중산층과 남성들도 가담해 베르사유를 습격했고 왕과 왕비는 파리로 피신했으나 의회의 보호를 받았다. 파리와 지방에 코뮌이 성립되었다.    

이어 혁명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복잡하게 이어지는데 그것은 널리 알려졌으므로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프랑스혁명은 중산층의 혁명적 행동과 교육받은 계층의 혁명적 사고가 결합하여 중산층이 지배하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결과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크로폿킨이 “파리 코뮌은 통치 국가가 아니라 가능하면 중개자나 주인 없이 인민 스스로 직접 통치하는 것”이라고 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남성 성인과 경우에 따라 여성의 참여를 확대한 파리코뮌은 1792년부터 경찰, 금융, 방위 및 공급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이는 대중이 주도권을 잡아 혁명의 결정적 순간을 이끌었음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혁명이자 대중의 직접민주주의를 시험한 최초의 혁명이었다. 후자의 아나키즘적 혁명은 앙라제를 통하여 나타났다.   

임마누엘 월러스타인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사회적 변화와 인민주권의 정당성을 세계적인 상식의 일부로 만들었다. 프랑스의 혁명은 실제로 세 혁명으로 구성되었다. 1789년에 시작된 첫 번째 혁명은 왕을 전복하고 봉건제를 폐지했다. 1792년에 시작된 두 번째 혁명은 온건한 입법의회를 급진적 입법인 국가협약이 대체했다. 1793년에 ‘몹시 화가 난 사람들’이라는 뜻의 ‘앙라제’(Enrages)가 요구한 세 번째 혁명은 국가협약을 직접민주주의 형태의 통치로 대체하려는 시도였으나 실패했다. 

앙라제는 자코방파가 자본주의적 부르주아를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등장했다. 1792년부터 이듬해까지 식료품 등의 생활필수품이 결핍되고 가격이 폭등하자 그 물품에 대한 가격통제와 물질 결핍의 원흉인 매점매석하는 상인, 투기꾼, 악덕 상인 등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여 생큐로트의 지지를 얻었고, 사유재산제를 부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국민공회가 거부하자 1793년 2월 17일부터 5월 31일까지 이어진 반란을 주도하여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를 비롯한 몽태뉴파(산악파)가 지롱드파를 국민공회에서 추방하고 전면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상인 엘리트의 저택과 기업을 약탈하는 등, 그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직접행동에 나섰다. 법적, 초법적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나아가 빈민을 대신하여 국민공회를 비판했다. 혁명이 빈민에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처럼 앙라제는 오로지 민중의 권위만을 인정하고 자발적이고 비조직적인 운동을 펼친 아나키스트였다. 특히 통일된 집단이 아니고 냉소적이며 개인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그 대표들은 자크 루(Jacques Roux, 1752~1794), 장 테오필 르크류 그리고 장 바를레(Jean Varlet, 1764~1837) 같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정치적 조직이 없었고, 심지어 루는 바를레를 체포해야 한다고 요구할 정도로 서로 무관하게 지냈다. 

급진적인 가톨릭 사제로 프랑스대혁명 기간 동안 정치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한 루는 직접민주주의와 계급 없는 사회의 이상을 파리의 서민과 노동 계급, 임금 노동자들과 가게 주인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을 위험한 혁명 세력으로 급진화시켰다. 1791년에 파리코뮌에 선출된 그는 1792년 프랑스 제1공화국이 시작되자 서민의 이익을 지키는 가장 극단적인 좌익의 대변인으로 여겨졌다.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싸운 그는 귀족의 재산을 압수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1793년의 앙라제 선언에서 사유 재산과 계급 사회의 폐지를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빈민을 희생하여 부자가 혁명에서 이익을 얻었기 때문에 혁명의 구호인 자유나 평등은 이제 헛된 환상이 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을 시정하기 위해 모든 필수품은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당시의 지배자인 로베스피에르는 루를 자코방 정부와 공공안전위원회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려는 외국 스파이라고 비난했다. 루의 친구였던 마라(Jean-Paul Marat, 1743~1793)도 루는 수입이 있는 한 종교에만 관심이 있는 거짓 사제라고 매도했다. 결국 그의 적들에 의해 체포된 그는 투옥되었고 1794년 초에 혁명재판소에 의해 재판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자 감옥에서 자살했다. 

바를레도 1792년과 1793년에 출판한 여러 저술에서 직접 민주주의와 재산의 재분배를 주장했다. 특히 프랑스 혁명에서 여성이 갖는 엄청난 영향력을 이해한 그는 빈곤한 노동여성을 도발하고 동기를 부여한 조직으로 앙라제를 결성했다. 앙라제는 전국대회에서 운동을 대표할 연설자로 여성을 임명했다. 클레어 라콤브(Claire Lacombe, 1765~?)와 폴린 레옹(Pauline Leon, 1768~1838)을 포함한 혁명적인 페미니스트들은 앙라제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19세기 페미니즘 운동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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