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4:05 (토)
‘문화로서의 출판’을 일궈온 거인 …
50년을 달려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문화로서의 출판’을 일궈온 거인 …
50년을 달려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8.31 16: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립 50주년 앞둔 문예출판사 전병석 회장
© 최익현

지금은 책 출판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거래’로 변질됐다. 이메일로 모든 게 진행된다.
인세도 계좌로 입금하니 저자를 만나기가 어렵게 됐다. 출판사와 저자의 유대가 맺어질 틈이 없다. 저자가 출판사를 일종의 ‘살롱’으로 활용해서 좋은 아이디어를 서로 나눠야 문화가 풍성해진다. 지금은 그런 문화가 사리져가고 있다
.

 

 대한출판문화협회가 펴낸 『출판백서』(1970)를 보면, 1963년 국내 등록 출판사는 모두 602곳이었다. 3년 뒤인 1966년 출판사는 1천360곳으로 곱절로 늘어났다. 바로 이즈음인 1966년 12월 2일 문예출판사가 신생 출판사로 등장했다. 사회문화적으로 인문학의 세례를 받은 편집자들이 출판계에 출사표를 던졌던 것과 달리, 상대(경제학) 출신으로 경제·경영·법학 대학교재를 만들던 이가 ‘문학예술 교양서’를 출판하겠다고 이 바닥에 뛰어든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리고 부침은 있었지만 50년 가까이 한길을 걸어왔다. 그 가운데 출판문화인 전병석 회장(79세)이 있다.

그런 전병석 회장이 내년 문예출판사 창립 50주년을 앞두고 『현대한국출판사』(이두영 지음)을 내놨다. 원래는 그의 계획대로 ‘한국사상사’쯤을 내놔야했지만, 한국 사상사 분야가 워낙 가시밭길이라 좀 더 ‘출산’을 미루고, ‘한국출판사’쪽을 정리한 책을 내기로 한 것이다. 광복 70주년에 맞춰 이 나라 출판문화의 역사(1945-2010)를 정리한 것. 전 회장은 이 책을 한·일 두 나라에서 동시 출간했다.

1937년생인 전병석 회장은 고려대 경제학과 57학번이다. 당시 경제학과 출신들이 대부분 관계나 금융계로 진출하던 것과 달리 그는 ‘출판’을 선택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虛飢가 작용한다. 끝모르는 배고픔을 겪으며 자라난 세대, 제대로 된 책 없이 성장한 세대였던 그는 ‘배고픔’ 때문에 경제학을, 책에 대한 굶주림 때문에 출판을 선택했다. “경제학과에 적을 두고 있을 때 서울대·연대 상대와 모임을 자주 했어요. 조국의 경제부흥에 앞장서자 이런 취지였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가 나선다고 경제가 부흥될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생각을 바꾼 거죠.”

‘책을 마음껏 볼 수 있게 좋은 책을 만들어내는 출판인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전 회장은 출판 쪽의 직장을 찾았다. 큰 출판사에 들어가면 일은 배우겠지만 독립하기 어려울 것 같아 이것저것 종횡으로 많은 일을 경험할 수 있는 ‘작은 곳’을 찾을 요량이었다. 그러던 중 진명문화사에서 편집장을 하고 있던 임종한(임종국의 동생)에게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는 이력서 하나 쓰지 않고 그렇게 자신이 꿈꿨던 출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6년을 꼬박 이곳에서 일했다. 대학교재가 귀하던 시절이라 경제·경영·법학 분야 대학교재를 100여종 이상 만들었다. 새로운 책을 기획하고 만들고 영업까지도 직접 뛰었다.

단행본 2~3권 출판할 정도의 자금으로 출발

1966년 12월 전병석 회장은 단행본 두세 권 출판할 수 있을 정도의 자금으로 문예출판사 간판을 내걸었다. 서울 종로구 내수동 165번지에 터를 잡고, 출판등록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2월 20일 헤르만 헤세의 교양소설 『데미안』을 첫 번째 출간물로 발간했다. 『데미안』(김요섭 역)은 이듬해인 1967년 당당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이때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김학수 역)도 함께 베스트셀러로 기록됐다.

‘문예’라는 출판사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문예출판사는 문학예술 교양서 전문 출판사로 성장해왔다. 물론 전병석 회장의 의지다. “책을 내면 10년 뒤, 30년 뒤에도 후학들에게 평가받을 수 있는 책을 내려고 했어요. 일과성이나 함량미달의 책은 내지 않겠다는 거였죠. 무엇보다 단순한 지식보다 삶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책을 내는 힘썼어요. 50년 전, 40년 전에 낸 책들이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걸 보면, 그때 판단이 옳았다고 봐요. 그런 정신으로 선택한 책들이었으니까요.” 그래서일까, 문예출판사는 1980년대 초반까지 독주했다. 전 회장은 문학교양서를 내는 출판사가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독주’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픈 시절이 있었다. 1970년, 시대를 앞서 아동용 과학소설 30권 세트를 기획해 세상에 내놨지만 이게 영 팔려나가지 않았다. 할 수없이 ‘외판’에 손을 댔다. 당시 전집류 외판은 한 품목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아 춘조사에서 ‘효석전집’을 갖고 와야 했다. “그러다보니 출판사가 외판센터가 되고 말았어요. 또 시대적으로 외판이 유행하다보니 너도나도 외판에 뛰어들더군요. 포화상태가 되고 말았죠. 지방 서점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더군요. 그 직격탄을 맞고 6개월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전병석 회장은 이 위기를 『러브 스토리』라는 순애보 번역으로 돌파하려고 했다. 재기해야 하는 데 도무지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 12월 조판까지 마쳤지만 주변에서 극구 만류하고 나섰다. 시대가 변했는데 누가 순애보를 읽겠냐는 힐난이 이어졌다. 고심하던 전 회장의 눈에 연말 신문 한 귀퉁이에 국도극장 개봉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이 40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기사가 들어왔다. “이것은 최루성 아닌가? 그렇다면 순애보도 된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렇게 해서 그는 『러브 스토리』를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1980년대부터 전병석 회장은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 ‘사이드 리더’로서의 다양한 책들을 내겠다는 생각이었다. 대학 교재만으로는 폭넓은 지식 이상을 습득할 수 없다는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방향 조정이었다. “공부를 해야 했어요. 데리다, 라캉 이런 외국 학자들의 이름을 만나면 이들이 누군지 알아야 했으니까요. 철학, 사회과학, 문학이론, 예술이론 등의 책들을 바탕으로 ‘총서’를 기획했죠. 특히 문학예술 분야에서 해체비평, 정신분석비평, 구조주의비평 등 문학이론서에 공을 들였습니다.”

당시 문예출판사가 내놓은 문학이론 번역서들은 많은 이들에게 공부의 자양분이 됐다. 전 회장이 출판에 뛰어든 걸 보람으로 느끼는 순간도 이런 책으로 공부했다고 말하는 이들을 만날 때다. “1980년대 이후 철학, 인문사회 사이드 리더 분야에 손대면서 20년 정도 돈 되지 않는 책을 내왔습니다. 저는 재미있었지만, 출판사는 어려운 시기였어요.(웃음) 그래도 많은 분들이 저희 출판사 책을 통해 공부했다는 말을 건넬 때마다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아마 출판 50년을 지탱하게 한 것 같아요.”

문예출판사의 도서목록을 보면 번역물이 70~80%를 차지한다. 이게 늘 마음에 걸린 전 회장은 ‘기획 출판’에 더 눈을 돌렸다. 그가 다른 분야도 아닌 ‘한국 미술사’쪽에 주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출판의 기본은 기획입니다. 기획 없이 남의 책을 가져다 출판하는 것은 진정한 출판이라고 하기 어렵죠. 한국 미술사와 사상사 이 두 분야 책을 꼭 내고 싶었어요. 다른 분야는 ‘히스토리’가 있는데, 이 두 분야는 미개척 분야잖아요.” 그가 『한국미술사』(진홍섭 외 지음)를 가장 어렵게 만든 책, 가장 소중한 책으로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미술사는 회화, 조각, 건축, 공예가 온전하게 맞물려야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분야다. 전 회장은 권영필 교수, 김리나 교수 등 4명과 함께 자료도 비축하면서 2년 간 세미나를 진행해 결실을 맺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학자들의 학문 세계가 다르다보니 좀처럼 접점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처음 시도는 그렇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기회는 다시 그를 찾아왔다. 어느 날 신문을 보다가 전 회장은 눈이 번쩍 띄었다. “80대 후반이지만 건강만 허락된다면 한국 미술사를 집필하고 싶다”는 진홍섭 고려대 명예교수의 짧은 기사였다. 그렇게 해서 2006년 12월 2일 전병석 회장은 진홍섭·강경숙·변영섭·이완우 교수를 저자로 한 『한국미술사』를 출간했다. 5년의 집필 끝에 완성된 이 책에 투입된 제작비는 무려 7천만 원에 달한다.

소광희 포스텍 명예교수(철학)의 책을 출간한 것도 전후가 흥미롭다. 소 교수는 시간의 문제, 존재의 문제를 천착해온 철학자다. 전 회장은 소광희 교수에게 번역서 말고 저서를 남기자고 설득했다. 『시간의 철학적 성찰』(2002)은 1천부를 찍었지만 500부나 소화될까 내심 우려했다. 그러나 이 책은 5쇄까지 연거푸 이어졌다. “이 책으로 학술원에서 상으로 1천만원을 받았어요. 한국출판문화대상(한국일보)도 받고요. 그때 좋은 책을 내면 독자가 알아본다! 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후속 저작을 내자고 제안했더니 소 교수가 ‘손해볼텐데 …’ 그러더군요. 손해는 내가 볼테니 책 내자고 말했죠. 결국 3권의 존재론을 출간했습니다.”
이쯤이면 전병석 회장의 출판정신이 어느 정도 그려진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출판은 문화적, 사업적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익성을 생각하면 사업이지만, 그보다 좋은 책이 어떤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면 이건 문화사업이죠. 학교나 대학에서 ‘교재’로 많이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봐요. 책은 선생님이라는 말이 있듯, 책 없이는 교육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제가 출판을 문화사업, 나아가 교육사업으로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출판은 그 자체가 문화·교육”

그런 전병석 회장도 요즘 복잡하게 얽힌 출판계가 걱정이다. 일부에서는 요즘 책이 안 읽히는 게 ‘스마트폰’의 등장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이들도 있지만, 전 회장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소크라테스 시대에는 이데아가, 르네상스 이후에는 이성이 중시됐지만,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물질이 생각의 중심에 놓이기 시작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지덕체와 같은 고전적 덕목조차 ‘지’만 강조하는 세태가 됐다는 것이다. 독서를 하더라도 지나치게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입시, 취업, 처세, 모두 실용적 가치관에 입각한 독서가 되고 있습니다. 인격 도야라는 德의 측면을 놓치고 있다는 게 문제죠.” 그는 이런 부박한 독서 풍토가 된 데는 교육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탓이 크다고 말했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라 생활이어야 해요. 자신을 발견하고, 성찰하는 일종의 修身의 한 방편인 셈이죠.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훈련을 해야 하는데, 독서가 바로 그런 힘을 길러줍니다.”

뿐만 아니다. 출판계 일부긴 하지만 상업성에 매몰된 출판인들을 보면 안타까워한다. 함양미달에다 일과성인 책, 반짝하는 유행에 의존하는 책들에 한국 출판계가 너무 달려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출판을 왕창 돈버는 사업으로 생각하니 어려운 거죠. 나 밥 먹고 직원 월급주고 좋은 책 만들면 되는데 말입니다. 50년 출판을 해오면서 하나 후회되는 게 사람을 길러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출판계가 사람에 투자하지 못했다는 것, 정말 문제입니다. 유능한 편집자, 뛰어난 저자들 말입니다. 외국 작가들에게는 큰돈을 쓰면서도 국내 작가들에게 1억 주고 작품 발굴하는 그런 시도가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올해 우리 나이로 79세. 전병석 회장의 ‘문화로서의 출판’을 일궈온 출판인생 길은 한국출판문화사의 한 면을 너끈하게 채운다. 그가 걸어온 길 하나하나가 현대한국출판사의 마디마디가 될 것이다. 2014년 10월 전병석 회장은 문예출판사 대표이사 및 발행인 자리를 장남인 전준배에게 넘겼다. “그동안 문예출판사가 걸어온 격을 지키면서, 조금 눈높이를 낮추려고 합니다. 그래서 좀 더 사회와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내고자 합니다. 현대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 말입니다. 물론 쉽지 않을 겁니다. 다들 출판이 사양산업이라고 말하지만, 저는 아니라고 봐요. 과거처럼 영화를 누릴 수는 없겠지만, 교육이 존재하고 학문이 계속되는 한 출판도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그렇게 말하는 전 회장은 약간 야윈 얼굴이지만 무척 건강해보였다. 어쩌면 그는 그의 숙원인 ‘한국 사상사’를 문예출판사 창립 60주년 기념으로 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글·사진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