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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는 선택을 하고선 왜 힘들다고 하느냐’
‘아이 낳는 선택을 하고선 왜 힘들다고 하느냐’
  • 서나래
  • 승인 2024.03.20 09: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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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연구자로 가까스로 살아남기 ② 연구자의 생애주기와 출산2
서나래 한국교원대 한국근대교육사연구센터 전임연구원

지역의 중소도시를 시작으로, 서울에서 거리가 먼 순서대로 대학은 사라질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벚꽃이 피는 순서대로”다. 대학에서 교원을 꿈꾸고 있는 신진 연구자는 이런 미래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진 연구자들이 나부터 일상에서 인구절벽을 막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있는 환경일까? 역설적이게도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신진 연구자일수록 불안한 미래와 연구 부담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거나 결혼을 했더라도 출산을 포기하고 있다. 불안한 미래는 남성 연구자나 여성 연구자에게 똑같이 주어진 현실이다. 하지만 출산을 선택한 여성 연구자에게는 더더욱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 연재에서 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다. 하나는 왜 여성 연구자들이 출산이나 육아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의 대학은 현재 어떤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아줌마 연구자로 가까스로 살아남기’라는 연재 제목은 양육과 연구로 저글링하며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다.

지역의 많은 연구자들이 특히 여성 연구자들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연구를 접고 있다. 이 연재를 통해 고군분투하는 신진 연구자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한편, 익명의 신진 연구자들에게 진한 동지애를 전달하고 싶다. “우리, 살아서, 만나요.” 

나는 B급, 어쩌면 C급 연구자로서, 
그리고 이 사회에 필요한 시민을 키워내는 
엄마로서 살아남고 있는 중이다. 
나는 종종 내가 하는 일이 
토양의 ‘거름’을 만드는 일 같다는 생각을 한다. 

현 정부의 R&D 연구비 감축으로 인해 갓 학위를 마친 학문후속세대의 생계가 어렵다는 뉴스 기사를 보았다. 박사학위를 마치고도 일자리가 별로 없어서 대졸 신입사원 연봉보다 낮은 연봉을 받거나 그 마저도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기사의 댓글이었다. “누칼협.” 누칼협은 “누가 칼로 협박했느냐”의 줄임말로 MZ세대 사이의 유행어다.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일이나 직업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걸 하라고 협박한 사람은 없으니 그럼 하지 말라고 조롱하는 말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옛말과 유사하다.

그냥 나의 할 일이라 여기고 버텼다

워킹맘의 고단함을 토로하는 글에도 종종 ‘누칼협’이라는 댓글이 붙는다. 누가 아이를 낳으라고 한 것이 아닌데 스스로 아이를 낳는 선택을 하고선 왜 힘들다고 하냐는 뜻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박사학위를 하는 것도, 출산을 하는 것도 개인의 선택이다. 누가 칼 들고 협박을 한 적은 없다. 나는 자의에 의해 박사과정을 했고, 자의에 의해 출산을 하고서는 지면을 빌어 힘들다고 동네방네 떠드는 것은 아닌지 한참 동안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냥 나의 할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 시간을 버텨냈던 것 같다. 그리고 ‘누칼협’의 조롱 속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떠벌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지만, 지금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여성’ 연구자들과 연대의식을 갖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더라도 학술지는 제때 나와야 했다

나는 한밤중에 갑자기 양수가 터져서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가면서도 가방에 노트북부터 챙겼다. 그때 나는 학회의 편집간사를 맡고 있었다. 나의 아기가 태어나더라도 학술지는 제때 나와야했고, 학회 JAMS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는 쉽게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학술지 논문투고시스템을 관리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소수학문의 특성상 이 일을 대신 맡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편집위원장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에 학술지가 차질없이 발행될 수 있었지만, 조리원에서 논문투고시스템의 홈페이지를 한동안 바라보았던 일은 또렷이 기억이 난다. 

대학원 학칙으로 육아휴학이 있었는데 임신, 출산, 만 8세 이하의 자녀 육아 사유로 신청할 수 있다. 육아휴학은 최대 1년(2학기)까지 신청할 수 있으며, 자녀 1명당 1회만 신청 가능하다. 아기가 만 1세가 된다고 해서 바로 엄마가 학교에 복학을 하여 예전과 같은 생활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학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년만 육아휴학을 했다. 

누가 칼로 협박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쨌든 아이 둘을 키우며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누칼협'이라는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사진=펙셀

무엇보다 시간이 없었다

아기를 낳아보니 갓난 아기는 시도 때도 없이 울고 먹고 쌌다. 분유를 먹이고 기저귀를 가는 것이 초보 부모의 주된 일이었다. 조리원에서는 모유가 좋다고 모유 수유를 강조했지만 나의 공부를 위해서는 분유를 먹이는 편이 훨씬 나아보였다. 나 아닌 누군가가 대신 수유를 해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후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분유를 먹이기 시작했다. 생후 여덟 달이 되었을 때, 아기는 어디든 기어다니려고 했고, 겨우 “마, 음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엄마를 부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아기를 집 근처 가정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동네를 산책하는 할머니들은 엄마가 애좀 더 보지 왜 벌써 기관에 보내냐고 혀를 끌끌 찼지만 그런 소리는 무시했다. 나는 아침 9시에 어린이집 가방에 분유병 2개와 이유식을 싸서 어린이집에 보냈고 오후 3시에 찾아왔다. 이제 육아휴학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보육기관에 적응을 시켜야했기 때문이다. 아기가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내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빨래와 청소, 이유식을 만들고 나면 또 아기를 찾아올 시간이 되었다. 

아기가 돌이 됨과 동시에 나의 육아휴학 기간도 끝이 났다. 아기는 계속 어린이집을 다녔고 나는 논문을 쓸 준비를 했다.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읽고 분류하는 일을 주로 했는데, 워낙 선행연구가 없는 분야라 자료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늦은 오후에 아기를 어린이집에서 찾아서 저녁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면 나의 몸은 녹초가 되었다.

아기를 재우고 나의 공부를 지속할 힘이 나지 않아서 알람을 맞춰놓고 아기와 함께 자다가 새벽 2시나 3시에 일어나서 아침이 올 때까지 논문 준비를 했다. 수면은 언제나 부족했고 체력을 위해 운동을 할 여유는 전혀 없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를 ‘시간 거지’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없었다. 

B급 학자, 2등 시민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 2~3년만 고생을 하면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겠지 생각한 찰나에 더 큰 위협이 찾아왔다. 계획에 전혀 없었던, 둘째의 임신이었다. 둘째를 임신한 것을 알게 된 후 나는 며칠 동안 울기만 했다. 그동안의 고생을 되풀이해야 한다니…. 둘째 임신은 모든 것을 계획대로 하고자 했던 나의 오만함에 대한 반격 같았다. 둘째의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나의 계획은 또 1년 이상 지체되었다. 이번에는 반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렇지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심정으로 공부했다.

이로써 나는 학자로서 B급, 그리고 2등 시민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육아에 신경을 쏟지 않아도 되는 누군가보다 이미 학문의 세계에서 이미 지고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한 미 평화봉사단에 관한 연구는 나 아니면 관심을 가질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기에, 1940년대~1950년대 생인 그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부지런히 기록해야 할 것 같아서 포기할 수 없었다. 누가 칼로 협박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어쨌든 아이 둘을 키우며 학위를 마칠 수 있었다. 

나는 B급, 어쩌면 C급 연구자로서, 그리고 이 사회에 필요한 시민을 키워내는 엄마로서 살아남고 있는 중이다. 나는 종종 내가 하는 일이 토양의 ‘거름’을 만드는 일 같다는 생각을 한다. 거름을 만들고 있을 때는 이것이 쓸모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언젠가 다른 학자들이 거목이 되고 열매를 맺을 때 내가 만든 작은 거름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두 명밖에 되지 않는 아이들이지만 장차 커서 이 사회에서 쓸모있는 시민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에 ‘누칼협’이라는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서나래 한국교원대 한국근대교육사연구센터 전임연구원
대학에서 역사와 문학을 전공했다. 잠시 중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적 있다. 연세대 대학원 교육학과에서 「교실 속 이방인들: 주한 미 평화봉사단의 교육 활동과 그 영향(1966-1981)」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세아라는 필명으로 한국 거주 외국인들의 이야기를 글자로 옮겨 책을 두어권 낸 바 있다. 현재 사범대학에서 교사를 꿈꾸는 학생을 대상으로 ‘교육철학 및 교육사’라는 교직 과목을 가르치며 한국 현대교육사를 연구하는 공부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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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예원 2024-03-26 08:30:01
누칼협 너무나 공감됩니다. 또한 그냥 내가 할 일이라서 했다는 문장 또한 공감합니다. 아줌마 연구자로서 많은 공감을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