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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서울대 교수, 허무에 맞서 산책하며 글 쓰다
김영민 서울대 교수, 허무에 맞서 산책하며 글 쓰다
  • 김재호
  • 승인 2024.01.28 2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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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인생의 허무를 보다』(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456쪽)

‘마구 김영민 선생’ 마구라고? 마왕 비슷한 건가? 여기서 마구는 ‘마’포구에 사는 호‘구’의 줄임말이다. 이 자학적 표현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김영민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과부·동양정치사상)의 『인생의 허무를 보다』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김 교수는 식당에서 종종 종원업에게 음식 추천을 부탁한다. 그런데 지인이 음식 추천을 하면 가게 입장에선 재고가 많은 음식 위주로 알려줄 것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김 교수는 ‘자유인과 호구 사이에서’ 후자에 기운 자신의 처지를 해학으로 그려냈다. 

또 하나 빵 터진 장면이 있다. 김 교수는 산책을 좋아해 거리를 자주 걷는다. 그런데 이때 누가 뭘 부탁하면 산책에 집중하기 힘들어 싫다. 이걸 묘사하는 장면에서 다음이 나온다. “산책하는 김에 쓰레기 좀 버려줘, 곡괭이 하나만 사다 줘, 손도끼 하나만 사다 줘, 텍사스 전기톱 하나만 사다 줘. 어차피 나가는 김인데.” 텍사스 전기톱이라니! 김 교수의 서슬 퍼런(?) 해학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목적이 부여되면 산책은 더 이상 산책이 아니라 출장이다... 그냥 텍사스 전기톱을 사다 준 뒤, 나만의 신성한 산책을 위해 재차 나가는 거다.”

오늘도 휴대폰을 뒤적인다. 뭔가 재미난 일이나 자극적인 이슈 혹은 지인의 좋은 소식이 없을까 해서다. 하지만 연락은 없다. 허무가 좇아온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오늘도 허무의 그림자를 조금이라도 떨쳐버리기 위해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인생의 허무를 보다』는 자매편 격인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미처 다하지 못했던 얘기와 그림을 담았다. 책은 판형 자체가 엄청 커졌고, 그림과 해설 등이 풍부하게 담겼다. 좀 더 긴 호흡으로 허무를 직면해 보는 셈이다.  

 

인생은 거품 뜻하는 ‘호모 불라’

인생은 ‘호모 불라(homobulla, 인간은 거품이다)’다. “아무리 귀한 만남도 시간 속에서 풍화될 것이다.” 김 교수가 해설한 그림들에는 노인이 거품을 부는 장면은 보기 어렵다. 김 교수는 “인생의 허무를 이미 알고 있는 상태가 호모 불라의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라며 “인생의 허무를 모른 채, 마냥 거품을 불어대는 것이 호모 불라의 주제”라고 설명했다. 아!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인생은 왜 이리 허무할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인생의 허무를 보다』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죽음(시간의 풍화)’과 ‘노동(목적의 덧없음)’이 아닐까 한다. 이 둘의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건 다양한 관점이 가능한 글쓰기라고 김 교수는 강조한다. 여기서 글쓰기는 인생의 역설을 이해하는 방편이고, 인생의 재미를 배가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작가에게 국한될 뿐, 화가에겐 그림 그리기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글쓰기는 인생을 제대로 공부하는 예술이다. 적어도 기자에게는 그렇게 읽힌다.  

“사람들이 글을 써 남기는 것은 하루살이에 불과한 삶을 견디기 위해 영원을 희구하는 일이다. 훗날 누군가 자기 글을 읽어주기를 내심 바라는 일이다.” 
“작가는 삶의 허무에 대해 쓰기도 하고, 허무를 이기기 위해 쓰기도 하고, 허무에도 불구하고 쓰기도 하고, 쓰는 일을 통해 허무 너머를 보기도 한다. 결국 작가는 허무 속에서 쓴다.”
“목표를 달성할 수 없어 오는 초조함도, 목표를 달성했기에 오는 허탈감도 없이,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 사라질 내 삶의 시를 쓸 수 있기를 바란다.”
“모든 것이 허무할 때 할 만한 유일한 일은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취지의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자』의 「지락」 편에서 장자는 아내가 죽었는데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춤을 추고 노래한다. 사진=위키피디아

 

죽음을 대하는 다른 방식과 관점, 왜 슬퍼하니?

먼저 죽음을 보자. 도교의 한 분파인 전진교에서는 “현실은 환상이고 인간은 결국 백골이 되기 마련이니, 너 나 할 것 없이 미망(迷妄)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16세기 판화가 루카 참베를라노(1575∼1646)는 「무제」라는 작품에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 가장 불확실한 것은 죽음의 때”라는 라틴어 문장을 새겨 넣었다. 김 교수는 죽음을 초래하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시간의 풍화를 이겨내려면 일단 시간의 풍화를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장자』의 「지락」 편에서 장자는 아내가 죽었는데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춤을 추고 노래한다. 그 이유에 대해 김 교수는 “사람이 죽으면 태어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법이라고.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 대해 슬퍼한 적이 없는데, 왜 죽었다고 새삼 슬퍼하느냐고.”라고 적었다. 죽음을 대하는 다른 관점이다. 김 교수는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죽음은 어쩔 수 없지만, 죽음에 대한 태도는 어쩔 수 있다. 죽음이야 신의 소관이겠지만, 죽음에 대한 입장만큼은 인간의 소관이다. 즐거운 인생을 사는 이에게야 죽음은 더없이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고단한 인생을 사는 이에게는 죽음이 반가운 소식일 수도 있다.” 

다음은 노동이다. 김 교수는 대니엘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의 다음 여행』을 인용한다. “일하는 사람은 일할 기운을 줄 양식을 얻으려고 매일 기를 쓰며 일한다. 그리고 그 일하는 과정에서 다시 그 기운을 소진한다. 일하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일하는 슬픔의 쳇바퀴를 돌린다. 마치 매일의 양식이 노곤한 삶의 유일한 목적이고, 노곤한 인생 속에서만 매일의 양식이 얻어지는 것처럼.” 그렇다. 인생은 노동으로 인해 피곤하고, 그래서 더욱 허무하다. 

노동의 가장 큰 문제는 ‘반복’에 있다. “대체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큰 흐름과 우발적 사건의 비빔밥 속에서 선택과 습관을 오가면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지 않던가. 그러다가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죽을 때다.” 또한 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목적의식’이 인간을 괴롭게 한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해보자. 대개 기대만큼 기쁘지 않다. 허무가 엄습한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뭐 하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고 해보자. 허무가 엄습한다. 그것 봐, 해내지 못했잖아. 넌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지?” 그래서 김 교수는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라며 “구원은 비천하고 무의미한 노동을 즐길 만한 노동으로 만드는 데서 올 것”이라고 설파했다. 

16세기 판화가 루카 참베를라노(1575∼1646)는 「무제」라는 작품에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 가장 불확실한 것은 죽음의 때”라는 라틴어 문장을 새겨 넣었다. 그림=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예술로서의 글쓰기, 의미를 창조하다

시간의 풍화로 인한 죽음, 목적의 덧없음에 이르는 노동을 극복할 수 있는 한 가지 방편은 예술로서의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의미를 창조해낸다. “의미는 의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가끔 떠올릴 수 있는 깃발이 되어야 한다.” 특히 글쓰기는 삶의 역설을 깨닫는 도구다. 삶의 곳곳에 숨어 있는 딜레마를 알아챌 수 있는 방식인 셈이다. 역설과 딜레마를 보기 위해선 천천히 제대로, 다양한 시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야 우리와 가장 맞닿아 있는 어떤 원형(혹은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구체성을 무시한 난폭한 일반화에 저항하는 훈련... 구체적인 양상을 집요하게 응시하는 것, 그것은 신산한 삶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레시피이기도 하다.”
“마음속에 하나의 대나무가 생겨날 때까지 대나무를 살펴보고 탐구해야 한다. 대나무를 그린다는 것은 결국 외부에 있는 대나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속의 대나무를 그리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건 그만큼 공부가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공부는 재미있는 공부여야 한다. “공부를 안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공부를 하는 게 구원이다. 사람을 만나는 게 괴로운가? 사람을 안 만나는 게 구원이 아니라,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구원이다.” 재미있는 공부가 제대로 된 공부이다. 이를 통해 삶의 역설을 조금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책에서 삶의 역설과 딜레마는 △쓸모없음의 쓸모(『장자』의 「인간세」 편: 성긴 나무가 꿈에 나타났다. 내가 자잘하게 유용했으면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정신승리의 궁극(자신이 정신승리를 했다는 사실을 마침내 잊는 것)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 뒤집기(포도의 세계에서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는 근거 없이. 시다는 평가를 일삼는 평가 권력의 폐해를 그린 작품일지도 모른다.) △의도와 걸작(사람들은 의도가 훌륭한 졸작보다는 의도하지 않은 걸작을 보기 원한다.) △이별과 연애(아침에 이별을 생각하는 사람은 시간의 동학을 숙지하고 연애(예술)에 임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통로(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향한 통로다.) △묵상과 삶의 목적(눈을 뜨면 삶의 수단이 보일지 몰라도 삶의 목적은 보이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보기 위해서는 묵상해야 하고, 묵상할 때는 눈을 감는다.) △헛소리와 예술(인간은 하루 24시간을 보내면서 잠깐 의식적으로 합리적인 행동을 할 뿐, 대부분 습관적인 행동이나 망상이나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보낸다. 적어도 나와 내 주변 사람은 그렇다. 그중 어떤 망상은 해롭기도 하지만, 또 다른 망상은 예술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헛소리는 삶의 활력이 되기도 한다.) △쉰다는 것의 의미(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 목적 없는 삶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야 목적 없이 살 수 있다.) 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영민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과부·동양정치사상)에게 글쓰기란 허무에 맞서는 예술과 같다. 특히 산책은 그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진=김영민

 

인생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살 수 있나

인생은 죽음과 노동으로 인해 고통이 만연하다. 김 교수는 “예술(글쓰기)은 고통을 자극으로 환원하지 않고 관조의 대상으로 만든다”라며 “많은 예술가들이 자기 작품을 보는 순간만큼은 관객들이 잠시나마 삶의 고통을 잊기를 바란다”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생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즐길 수 있을까? “인생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대상을 좋아하되 파묻히지 않으려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의 중심은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 경직되지 않아야 기꺼이 좋아하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또 그 대상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김 교수는 원한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김 교수는 끊임없이 산책한다. “잘 사는 사람은 허무를 다스리며 산책하는 사람이 아닐까.”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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