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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통일론 벗어나 ‘인문학적 통일담론’ 이끈다
낭만적 통일론 벗어나 ‘인문학적 통일담론’ 이끈다
  • 김재호
  • 승인 2024.01.10 08: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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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통일인문학』 쓴 김성민 건국대 명예교수

통일인문학은 정치·경제적인 거시통합과 체제통합이라는 방식으로 다뤄져 온

한반도의 분단 극복과 통일문제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가치·생활문화의 통합이라는 방식으로 전환해서 모색한다.

2009년부터 시작된 통일인문학연구단(이하 연구단)은 벌써 16년 째를 맞았다. 연구단은 인문학국, 인문한국플러스지원사업에 선정돼 ‘통일인문학과 통합적 코리아학’ 연구를 수행 중이다. 통일인문학의 성과에 대해 김 교수는 거시적 차원의 민족통일 담론을 미시적 차원의 일상 담론으로 전환해 모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치·경제적인 거시통합과 체제통합이라는 방식으로 다뤄져 온 한반도의 분단 극복과 통일문제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가치·생활문화의 통합이라는 방식으로 전환해서 모색한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연구단의 성과를 세 가지로 압축해 설명했다. 첫째, 학문적 객관화의 대상으로서 인문학적 통일담론의 개방을 가져왔다. 낭만적 통일론을 벗어나 학술 차원의 방법론·인식론을 토대로 통일문제를 사유하게 끔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한반도의 분단 극복과 통일을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관점 속에서 사유할 수 있도록 했다. 통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듯 일회적 사건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장기적 과정을 통해서 모색되고 창출돼야 하는 창조 작업이자 새로운 미래의 고향으로서 통일 한반도를 만들어내는 장구한 실천 과정이 바로 통일이다. 셋째, 분단 체제가 한반도 구성원의 내면에 특정한 구조를 만들어 왔음에 주목하면서, 분단 트라우마와 같은 학문적 개념을 생성시켰으며 그 해결을 위한 여러 이론화를 수행했다는 점이다. 

김성민 건국대 명예교수는 건국대 철학과에서 학·석·박사를 했다. 건국대 문과대학 학장과 학생복지처장을 지냈다. 2009년 가을부 터 2023년 여름까지 건국대 인문학연구원장과 통일인문학연구단 장직을 맡았다. 한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통일부 자문위원과 민 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을 지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 회 정책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사진=김성민

 

강만길과 백낙청 그리고 송두율

지난해 6월,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사학)가 별세했다. 강 교수는 ‘분단 시대’의 사학을 비판하고 ‘분단 극복의 사학’을 주창했다. 『통일인문학』에는 강 교수에 대한 업적과 평가가 담겨 있다. “한국의 학계에서 분단 학문적 성격에 대한 성찰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면서 자신의 학문세계를 독창적으로 정립해 갔던 최초의 인문학자가 있다면 그는 ‘강만길’일 것이다.” 

김 교수는 “강 교수의 문제의식은 내 통일인문학의 학문적 출발점이기도 했다”라고 고백했다. 다만, 통일인문학 연구의 향후 과제 차원에서 다음의 지적도 귀 기울일 만하다. “강만길의 통일담론은 세부적인 각론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며, 다층적이고 중층적인 분단 구조를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발전적으로 계승돼야 할 통일론이다.”

인문학적 통일연구에서 빠질 수 없는 두 명이 더 있다. 바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와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교수(철학)다. 백 교수는 남북 분단이 유지되는 이유를 이데올로기적 대립에서만 찾아온 전통적인 관점에서 탈피하고 세계 체제의 하위 체제인 ‘분단 체제’로서 자생력과 안전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송 교수는 동질성 대 이질성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적인 틀에서 벗어나 ‘경계인의 사유’를 통해 차이의 인정과 이에 따른 다양성의 비폭력적 통일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백 교수는 물론 ‘마음의 병’을 언급하지만, 분단이 지속되고 탈분단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요인으로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 남북 주민의 사회심리와 상처까지는 분석하지 않았다”라며 “송 교수는 분단 국가의 상징적 폭력에 의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어떤 성향과 믿음들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인식적·실천적인 장애를 과소평가한 것 같다”라고 평했다. 그래서 통일인문학은 분단의 신체, 분단의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비투스’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가 제시한 사회적 신체적 개념이다. 

“분단의 신체와 아비투스는 의식적이고 무의식적 차원에서 분단국가가 요구하는 가치관과 세계관, 윤리·도덕률을 내면화한 신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빨갱이’·‘종북’·‘친북’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정치적 단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통일의 과정은 곧 분단의 신체들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바꾸어 가는 총체적인 변혁의 과정이다.”

『통일인문학』은 ‘강만길·백낙청·송두율‘의 사상과 업적, 한계 등을 분석했다. 사진=교수신문 DB

 

분단의 신체를 평화의 신체로

“우리는 분단 체제에 살면서 동시에 분단 체제를 재생산하고 있다.” 김 교수는 ‘끊임없이 냉전으로 회귀하며 회귀하기를 원하는 대중의 본능은 무엇인가’, ‘왜 대중들은 그 스스로 지배받기를 원하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졌다. 과연 대중에게 희망이 있는 것일까. 김 교수는 “분단 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신체가 남북 문제에 있어 적대성을 기계적·자동적으로 곧 무의식적으로 표출하도록 형성됐다”라고 분석했다. 아비투스는 한마디로 ‘구조화된 신체, 신체화된 구조’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다. 

김 교수는 “아비투스는 ‘구조-신체-구조’라는 형태를 지니기에, 변화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라며 “지난 역사를 통해 사회적 구조가 신체에 내면화되는 동시에, 그 신체를 통해 기성의 사회적 구조를 지속시킨다는 점을 설명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선거철만 되면 등장했던 ‘총풍·북풍’ 사건 등은 시민교육과 비판적 의식으로 극복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분단의 신체를 평화의 신체로 바꿔가는 것이 가능하다.” 

 

집단 무의식과 사회심리의 분단 트라우마

서로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지만, 남북 모두를 지배하는 무의식이 존재한다. 『통일인문학』은 분단 트라우마를 강조하면서 사회심리로서의 집단 무의식 설명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즉, 대중의 일상에 각인된 집단 무의식과 사회심리를 강조한 것이다. 집단 무의식의 원인은 일제 식민지이고 그로 인해 분단의 트라우마가 심어졌다. 어머니를 향한 상상적 욕망(민족)은 한국전쟁이라는 골육상잔의 비극으로 치닫고, 남북 내부에 “어머니의 욕망 대상이자 나를 거세하려는 위협의 대상”인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국가)을 남겼다.

그런데 최근 박현옥 캐나다 요크대 교수(사회학)는 『자본의 무의식』에서 “남북한은 이미 자본에 의해 트랜스내셔널 코리아 형태로 통일됐다”라고 주장하며, 노동과 자본의 국경 이주 차원에서 분단을 새롭게 해석했다.(<교수신문> 제1193호, 「‘트랜스내셔널 코리아’ 통일 한반도…그 중심에 자본이 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아직 책을 보지 못했지만 인터뷰 기사를 토대로 다음의 측면에서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평했다. 

“『자본의 무의식』은 민족의 평등,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을 고려하지 않고 신화적 차원에서 민족의 통일상을 제시하는 실태를 비판하는 듯하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 각 지역에 분포하는 코리안 간에 계급적 불평등이 형성됐고,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통일’은 그러한 불평등을 (무의식적으로) 문제 삼지 않거나 혹은 당연시 한다는 점이 핵심인 것 같다.”

2010년 연구단은 자체적으로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한 ‘민족공통성 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다. 이 프로젝트는 각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코리안의 가치와 정서, 생활문화를 양적·질적 조사 방법을 통해 실태를 파악하고, 비교를 통해 각 집단 간 차이와 공통성을 연구하는 것이 목표였다. 

“중국-일본-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각자의 거주국에서 생존을 위해 원주민과 협력적 관계를 맺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에 저항하면서 코리안의 문화를 변용하고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 조선족은 중국공민으로서 국가정체성이 강하지만 한편으로 코리안으로서 민족정체성이 강했으며, 일본 자이니치(재일조선인)는 일본 사회의 억압과 핍박 때문에 일본시민으로서 국가정체성이 약한 반면 강한 민족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김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이 살아온 역사와 실존적 고민을 간과한 채 우리의 중심에서 그들을 판단해오고 있었던 것”이라며 “특히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한국은 오리엔탈리즘 시각에서 북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의 코리안들을 재단하면서 차별하기도 했다”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통일인문학은 통일의 과정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차이의 인정이 상호 간에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아울러, ‘민족공통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차이가 민족 간 평등한 협력에 기반 한 생성의 힘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현옥 교수의 한인 디아스포라 연구가 매우 소중하다는 설명이다. 

 

남남 갈등 벗어나는 분단 극복의 역량

『통일인문학』은 동질성과 이질성을 넘는 ‘타자의 타자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남북 갈등보다 남남 갈등이 더욱 문제인 듯하다. 그래서 “코리안들 내부에서 분단 극복의 역량을 모아 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현재 통일 관련 정세는 어떻게 진단하는지 궁금했다. 

“2016년 9월, 북한의 제5차 핵실험이 강행되면서 국제사회의 반응이 거세게 표출됐다. 그런데 2년 만인 2018년에는 북한 최고지도자가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힌 이후, 북한 선수들이 참여해 남북팀의 공동 입장·남북 단일팀의 결성 등이 순차적으로 실현됐다. 그 이후엔 남북 양측의 특별사절단이 서울과 평양을 상호 방문했으며, 그 결과로 2019년까지 남북정상회담·북미정상회담이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실제 진행됐다. 하지만 올해 초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로 선언하면서 5년 만에 전혀 상반된 신년사를 발표했다. 그동안 남북 관계가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선언이 갖는 급격한 방향 전환은 다시금 출발점에 돌아온 기분이 들게끔 한다.” 

김 교수는 “통일 관련 정세와 남북 관계가 어려울지언정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라며 “한국사회의 사회구성원들은 아마도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우리 삶의 불투명함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실현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찾으려는 사회적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바로 여기에 통일인문학의 역할이 있다. 

>>>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이번 책 <통일인문학>은 김성민 교수님의 평생 연구를 집약해놓은 듯합니다. 특히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의 연구성과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통일인문학연구단의 성과와 한계, 보충할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통일인문학의 성과는 한마디로 정치-경제적인 거시통합과 체제통합이라는 방식으로 다뤄져 온 한반도의 분단극복과 통일문제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가치, 생활문화의 통합이라는 방식으로 전환해서 모색한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 자신에 대한 학문, 곧 지인(知人)의 학이며 사람다움을 추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통일의 인문학적 패러다임은 분단체제의 극복 또는 통일과 관련하여 한반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 그 자체를 탐구하는 학문이기도 합니다. 통일인문학은 그동안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해 분단체제가 사람들의 몸에 남긴 흔적과 상처들, 그리고 분단체제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심어 놓은 가치, 정서, 생활양식들에 대한 탐구를 수행해 왔습니다. 구체적으로 통일인문학연구단의 성과는 인문학적 통일담론의 이론화와 관련하여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첫째로 학문적인 객관화의 대상화로서 인문학적 통일담론의 개방을 가져왔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전까지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통일론을 벗어나 보다 학문적인 방법론과 인식론 등에 기반하여 인문학적 차원에서 분단과 통일문제를 사유할 수 있도록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로 한반도의 분단극복과 통일을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관점 속에서 사유할 수 있게 했다는 점입니다. 기존의 통일담론은 두 개의 분단된 나라의 정치-경제적 거시 구조를 합치는 문제 또는 양국의 협상과 타협에 의한 일회적인 사건으로 사고되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은 일시적인 사건을 통해서 이룩될 수 없으며 보다 장기적인 과정을 통해서 모색되고 창출되어야 하는 창조 작업이자 새로운 미래의 고향으로서 통일한반도를 만들어내는 장구한 실천과정입니다. 통일인문학의 성과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분단체제가 한반도 구성원들의 내면에 특정한 구조를 만들어 왔음에 주목하면서, 분단트라우마와 같은 학문적 개념들을 생성시켰으며 그 해결을 위한 여러 이론화를 수행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통일인문학은 최근에 학문적 체계가 수립되고 있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보완, 발전해야 할 지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한반도의 평화공존, 분단극복, 통일 등을 설명하는 우리 식의 개념화, 세부 이론 등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어야 하며, 한반도 구성원들의 몸에 체현된 분단심리 등을 어떻게 극복하고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와 관련된 여러 방법론과 실천론 등도 제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인식 속에서 통일인문학연구단에서는 오늘도 많은 연구자가 연구를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들의 학문적 노고에 감사드리며 더 많은 격려와 지지를 보내고 싶습니다.  

△지난해 6월 강만길 교수가 별세했습니다. 강 교수의 삶과 연구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앞 서 잠깐 언급했지만 ‘통일인문학’은 한반도의 분단극복과 통일문제를 인문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된 학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학문과 지식이 그렇듯 통일인문학 역시 이전 시대의 학문적 성취를 확대,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강만길 교수님의 문제의식은 저희 통일인문학의 학문적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강만길 교수님은 ‘분단시대’의 사학을 비판하고 ‘분단극복의 사학’을 주창하면서 분단과 통일에 대한 학문적 성찰을 주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강만길 교수님은 이들 분단된 국가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와 상징폭력에 의한 억압 또는 망각되도록 강제되거나 그것이 내면화되어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자기를 검열하고 남북 어느 한쪽의 시각과 관점에서만 인문학적 공부와 사유를 수행하는 분단시대의 인문학을 넘어서, 분단과 통일의 문제를 인문학적으로 사유한, 통일인문학의 선구자였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식민주의적 억압과 남북의 적대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는 자주적 민족국가건설에 위치시키는 동시에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담은 정치공동체건설로 사유하는 강만길의 통일담론은 결국 ‘인문학적 통일담론’이며 그것이 갖는 의의는 분명합니다. 강만길 교수님의 통일담론은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을 역사학의 학문적 대상으로 위치시키고 그것에 대해 지속적이고 철저한 고민을 투영한 결과물이었습니다. 인문학적 차원에서 한반도의 분단과 통일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한 그의 학문적 문제의식은 현재 인문학적 통일담론의 시작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강만길의 통일담론은 세부적인 각론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며 다층적이고 중층적인 분단 구조를 체계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발전적으로 계승되어야 할 통일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저희 통일인문학 연구의 출발점이자 향후 과제이기도 합니다.  

△백낙청과 송두율을 비판하면서, 통일인문학 차원에서 다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인문학적 통일담론은 분단체제가 일상의 신체들에 뿌리내린 심리와 가치, 문화들에 대한 독자적인 탐구로 나아가야 했으며 그 질을 밝힘으로써 이들 ‘신체’들을 일상적인 삼에서 바꾸어 가는 총체적인 변혁의 과정을 제시했어야 한다.”, “분단체제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은 합리적인 소통조차 가로막는 분단된 국가에서 사는 우리들의 신체와 정신에 아로새겨진 분단체제의 아비투스와 정서, 트라우마이다.” 여기서 신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요?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하는 가치적(인지적), 정서적, 문화적 정체성을 포함하는 ‘사람의 통일’ 차원에서 이해하면 될까요? 그렇다면 너무 넓은 개념 아닐까요?

먼저 백낙청, 송두율 두 선생님을 비판한 맥락부터 간략하게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이 두 선생님은 무엇보다 통일을 인문학적으로 고민하신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인문학적 관점에서 통일을 연구하고자 한다면 이 두 분을 경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백낙청 선생님은 ‘분단체제’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분단체제는 세계 체제의 하위체제이면서 남북을 망라하는 특이한 복합체로서 남북의 분단이 자생력과 안정성(자기 재생산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남북의 분단이 유지되는 이유를 이데올로기적 대립에서만 찾아온 전통적인 관점에서 탈피하게 하였다는 의의를 지닙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백낙청 선생님은, 물론 ‘마음의 병’을 언급하시지만, 분단이 지속되고 탈분단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요인으로 분단과 전쟁을 경험한 남북 주민의 사회 심리와 상처까지는 분석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송두율 선생님은 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언급하며 그것이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셨습니다. 동질성 대 이질성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적인 틀에서 벗어나 ‘경계인의 사유’를 통해 차이의 인정과 그를 통한 다양성의 비폭력적 통일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송두율 선생님은 분단 국가의 상징적 폭력에 의해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어떤 성향과 믿음들,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인식적이고 실천적인 장애를 과소평가하신 것 같습니다.

종합하자면 두 분 모두 남북의 분단과 통일에 대한 너무나도 소중한 통찰을 제공하시지만, 분단의 역사(시간)와 그 역사가 축적한 사회·문화적 구조(공간)가 형성해온 분단국가 구성원들의 성향과 믿음체계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시지 않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통일인문학은 분단의 신체, 분단의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식적이고 무의식적 차원에서 분단국가가 요구하는 가치관 및 세계관, 윤리/도덕률을 내면화한 신체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반공교육이 실시되던 과거, 승공/용공 등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리고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인정받으려면 당연히 지녀야 하는 가치관이었습니다. 북에 대해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원한과 증오의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언제나 옳은 윤리적 태도였습니다. 물론 현재는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 권위적 군사정권에서 강조한 반공의식은 낡은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이 약해졌다는 것이지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아직도 ‘빨갱이’, ‘종북’, ‘친북’은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단죄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신체들이 바뀌지 않는 한 통일도 요원하며, 통일을 하더라도 남북 주민 간에 화합은커녕 심각한 사회적 충돌을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상대를 적대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인식과 정서가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인문학은 통일의 과정은 곧 분단의 신체들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바꾸어 가는 총체적인 변혁의 과정이라 주장하는 것입니다.  

△소통, 치유, 통합의 통일인문학을 강조하면서, 동질성과 이질성을 넘는 ‘타자의 타자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남북갈등보다 남남갈등과 더불어 ‘타자 아닌 타자성’이 더욱 문제인 듯합니다. 특히 윤석열 정부 들어, 국내 상황은 레드 콤플렉스가 더욱 강화되고 있는 듯합니다. 김 교수님께서는 ‘코리안들 내부에서 분단 극복의 역량을 모아내는 작업’을 강조하셨습니다. 현재 통일 관련 정세는 어떻게 진단하시나요?

최근 몇 년 사이 한반도 통일 관련 정세는 매우 급변하고 있습니다. 시야를 조금 뒤로 돌려보겠습니다. 2016년 9월 북한의 제5차 핵실험이 강행되었고 그에 대한 국내 및 국제사회의 반응이 거세게 표출되었습니다. 그런데 2년 만인 2018년에는 북한 최고지도자가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의사를 밝힌 이후 북한 선수들이 참여하여 남북팀의 공동입장, 남북단일팀의 결성 등이 순차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또 그 이후엔 남북 양측의 특별사절단이 서울과 평양을 상호 방문하였으며, 그 결과로 2019년까지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이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실제 진행되었습니다.

한반도 종전(終戰) 선언과 평화체제 실현이 그리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올해 초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남북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로 선언하면서 5년 만에 전혀 상반된 신년사를 발표했습니다. 그 동안 남북관계가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선언이 갖는 급격한 방향전환은 다시금 출발점에 돌아온 기분이 들게끔 하기도 합니다. 아마 우리 사회에서도 통일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더 낮아질 것이며 일부에서는 통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분단은 우리들의 실존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붕괴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인 것 역시 분명합니다. 전쟁을 중단한 채로 상호적대적인 두 국가가 마주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여기에 한반도를 둘러싼 신냉전의 최전선이 둘러쳐 있다는 것은 어떠한 가치평가가 개입할 수 없는 팩트이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의 구성원들의 불안전한 삶, 비평화적인 삶, 상호적대성에 의한 소모적인 삶 뿐만 아니라 군사비 증강을 비롯한 정치경제적인 리스크까지 포함시키면 우리들에게는 분단을 유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통일은 특정 정치적 집단들이 독점하고 다루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 그 자체와 관련된 문제이자 그들이 해결해야 가야 하는 문제로서, 한반도 구성원들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문제입니다. 물론 수십 년 동안 끊이지 않고 발생한 남북의 군사적 충돌과 적대적인 대결에 무감각해지는 것처럼 익숙해져버린 한반도의 분단은 가슴 아픈 고통을 고통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상처처럼 느껴지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통일을 우리들이 다루어야 할 직접적인 문제로서 인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통일 관련 정세와 남북관계가 어려울지언정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 한국사회의 사회구성원들은 ‘아마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졌을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우리 삶의 불투명함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실현시킬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찾으려는 사회적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통일인문학이 조금 기여할 수 있고 앞으로도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단 트라우마를 강조하면서 사회심리로서의 집단 무의식 설명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셨습니다. 즉, 대중의 일상에 각인된 집단 무의식의 사회심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김 교수님은 집단 무의식의 원인을 식민지와 그로 인한 분단의 트라우마로 보신 것 같습니다. 어머니를 향한 상상적 욕망(민족)은 한국전쟁이라는 골육상잔의 비극으로 치닫고, 남북 내부에 “어머니의 욕망 대상이자 나를 거세하려는 위협의 대상”인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국가)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최근 박현옥 캐나다 요크대 교수(사회학)은 <자본의 무의식>에서 “남북한은 이미 자본에 의해 트랜스내셔널 코리아 형태로 통일됐다.”라고 주장하며, 노동과 자본의 국경 이주 차원에서 분단을 바라보는 관점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박 교수가 강조한 ‘트랜스내셔널 코리아’는 남한-북한-중국의 한인 디아스포라 차원의 단순 통합이 아니라 “남북 통일의 담론과 정치학을 회피하는 집단 자본주의적 무의식”이다. 한 마디로 민족통일의 주체가 된 자본의 변화(불평등)를 비판하는 것이다.] 

박현옥 교수님의 책을 읽지 않아서 그 내용을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인터뷰 내용을 통해 미루어보자면, ①오늘날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 각 지역에 분포하는 코리언 간에 계급적 불평등이 형성되었고, ②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통일’은 그러한 불평등을 (무의식적으로) 문제 삼지 않거나 혹은 당연시 한다는 점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즉, 이 책은 민족의 평등,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들을 고려하지 않고 신화적 차원에서 민족의 통일상을 제시하는 실태를 비판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박현옥 교수님과 같이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깊게 고민한 적은 없지만 남북 주민과 코리언 디아스포라에 대한 비교연구를 수행한 경험을 들어 대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0년 경에 통일인문학에서는 자체적으로 ‘민족공통성 프로젝트’를 수행한 바가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각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코리언들의 가치와 정서, 생활문화를 양적/질적 조사방법을 통해 실태를 파악하고, 비교를 통해 각 집단 간의 차이와 공통성을 연구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남과 북은 분단 이후 체제경쟁과 아울러 각자 스스로가 민족의 적자이며, 전통의 계승자임을 주장해왔습니다. 반면 남은 북을, 북은 남을 민족의 전통성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배신자 혹은 불순세력 등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해 남과 북은 유사하게 생각했습니다. 한(조선)말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코리언 디아스포라를 향해서는 민족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전통을 상실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프로젝트의 결과는 분단국가의 남과 북이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었는가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중-일-러에 거주하고 있는 코리언 디아스포라는 각자의 거주국에서 생존을 위해 원주민과 협력적 관계를 맺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에 저항하면서 코리언의 문화를 변용하고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해오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조선족은 중국공민으로서의 국가정체성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코리언으로서의 민족정체성이 강했으며, 일본 자이니치는 일본 사회의 억압과 핍박 때문에 일본시민으로서의 국가정체성이 약한 반면 강한 민족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이 살아온 역사와 실존적 고민들을 간과한 채 우리의 중심에서 그들을 판단해오고 있었던 겁니다. 특히나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한국은 오리엔탈리즘 시각에서 북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의 코리언들을 재단하면서 차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통일인문학은 통일의 과정에서 다름을 인정하는 차이의 인정이 상호 간에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던 겁니다. 그리고 ‘민족공통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차이가 민족 간의 평등한 협력을 통한 생성의 힘이 되어야 한다는 점 또한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이때의 ‘민족공통성’은 상호 간의 ‘동질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차이들 간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것을 생성한다는 미래발전적인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A와 A가 만나면 A라는 결과밖에 나오지 않지만, A와 다른 B가 만나면 제3의 새로운 어떤 것이 나올 수 있으며 그것이 미래통일공동체의 사회문화적 역량을 풍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차이를 열등함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평등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박현옥 교수님의 연구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부르디외의 사회적 신체화 설명을 통해 “우리는 분단체제에 살면서 동시에 분단체제를 재생산하고 있다.”라고 지적하셨습니다. 특히 ‘끊임없이 냉전으로 회귀하며 회귀하기를 원하는 대중의 본능은 무엇인가’, ‘왜 대중들은 그 스스로 지배받기를 원하고 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김남주 시인의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대중에 대해선 어느 정도의 희망을 품어야 하는 것일까요?

분단체제는 단지 분단의 정치권력이 위로부터 강제하기 때문에 지속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일상에서도 발견할 수 있듯이 ‘북한’이라는 단어만 주어져도 우리는 스스로 원한과 증오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합리적으로 판단하기를 중단합니다. 남북 간에 군사적 충돌이 있을 경우는 사태가 더욱 심각합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을 할 것처럼 북한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소리치기도 합니다. 이는 분단체제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신체가 남북 문제에 있어 적대성(Antagonism)을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곧 무의식적으로 표출하도록 형성된 신체라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대중적 정서적 에너지를 분단의 적대적 정치를 가능케 하는 지지기반으로 제공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부르디외의 사회적 신체, 아비투스(Habitus)를 차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분단의 신체를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아비투스는 한마디로 ‘구조화된 신체, 신체화된 구조’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지난 역사(시간)를 통해 사회적 구조가 신체에 내면화되는 동시에, 그 신체를 통해 기성의 사회적 구조를 지속시킨다는 점을 설명하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개념에서도 보다시피 아비투스는 ‘구조-신체-구조’라는 형태를 지니기에, 변화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습니다. 즉, 기성 구조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경우, 그것을 자신의 신체로 내면화되기를 거부할 경우 기성 구조가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과거 총풍이나 북풍이라는 불리는 사건을 보면 선거철이 되면 남북 간에 충돌이 발생하고 그에 따라 반북/반공 등을 외치는 정치세력들이 그러한 정세를 선거에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오히려 선거철에 남북 간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조작되었거나 선거에 활용하려는 불순한 의도라는 점을 의심합니다. 남북 간의 적대적 정치가, 군비경쟁이 오히려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한다는 비판적 의식이 대중들에게 일반화된다면 앞서 말씀드린 ‘구조-신체-구조’와 같은 반복이 힘을 잃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사회문화적인 차원에서, 또 학교교육과 시민교육 등을 통해 분단의 신체를 평화의 신체로 바꿔가는 것이 가능하리라 봅니다. 

△통일인문학 관련, 대학/교수사회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분단체제의 극복과 평화로운 한반도로의 이행이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라고 한다면, 한국사회의 대학 연구자들에게도 이러한 전망들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학문의 시작은 우리가 사는 ‘지금, 이곳’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했음은 학문의 역사가 여실히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추상도가 높은 철학만 하더라도 ‘지금, 이곳’에 대한 ‘의심과 경탄’, ‘반성과 비판’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학문은 구체적인 사회현실과 괴리된 채 남겨질 수 없습니다. 개별학문이 전문적으로 발전하고 세분화된다고 하더라도 학문의 근본적 문제의식은 우리들에게 고스란히 남겨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차분히 둘러보면 ‘지금, 이곳’에 대한 문제의식을 관통하는 것이 바로 한국의 분단상황과 통일인 것임을 우리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일에 대한 미래적 전망들을 구체화하기 위한 연구는 특정한 분과학문이 주도하거나 특정 학문에 종사하는 개별적 연구자들이 단독적으로 담당할 수 없는 방대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통일연구가 통일의 구체적이고 실효적인 대안들을 도출할 수 있기 위해선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의학 분야의 연구성과들이 함께 결합되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한 ‘남북의 민족적 연대’를 위해서는 실질적인 남북교류협력사업의 성과가 결합될 필요가 있고, 통일한반도의 미래적 가치인 ‘생명과 평화’가 구체화될 수 있기 위해선 에너지, 농생물학, 의학 등의 연구성과가 결합되어야 하며, 통일과정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에도 한반도에 필요한 ‘민주주의와 인권’과 같은 이념들이 정립될 수 있기 위해선 정치학과 법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의 결합이 무엇보다 요구되기 때문이다.

즉 통일연구의 미래는 곧 융복합적 통일연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통일연구는 대학사회에 주어진 마땅한 연구주제이자 그 자체로 더욱 많은 성과창출이 가능한 블루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배출되고 다 같이 이 주제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가 지속되길 소망합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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