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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별의 순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별의 순간’
  • 김기봉
  • 승인 2023.11.28 0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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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_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

* 필자와 모임의 동의를 얻에 이 글을 게재합니다. 글의 출처는 소식지 ‘성숙의 불씨’ 제 860호 「‘별의 순간’의 시대정신: 포용과 혁신」.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차적 요인이 제도인가, 문화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다. 제도가 국가의 하드웨어라면, 문화는 소프트웨어다. 둘의 결합으로 작동하는 국가는 다양한 내부 및 외부 요소들과 연결된 상호작용으로 운명이 결정된다.

20세기에 식민 지배를 받았다가 해방돼 국가를 세운 나라들 가운데 한국만이 유일하게 선진국으로 진입했다. 같은 한반도에 세워진 나라지만, 남한과 북한의 처지는 완전히 다르다. 남한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지만 북한은 가장 후진적이다. 우리는 반만년 역사를 공유한 같은 민족이라 믿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불과 70년 동안 다른 국가에 살면서 양극단의 차이가 발생했는가? 

남한과 북한에 상반된 체제가 정착된 것은 주민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한 냉전적 세계질서가 빚어낸 산물이다. 냉전은 민족분단을 낳은 한편, 대한민국이 북한과 체제 경쟁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발판이 됐다. 모든 위기는 역설적이게도 도약의 기회가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런 전환을 이끄는 동인인가? 다윈이 "가장 강한 종이 아니라 환경 변화에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라고 말한 것처럼, 환경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살아남고 번성할 수 있는 생명체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 가운데 하나가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다. '회복탄력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조건과 환경을 조성하느냐가 국가나 조직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말대로 생명체란 이기적 유전자가 만들어낸 '생존 기계'인데, 인간만이 자신이 그런 존재임을 자각하고 '자기 이유', 곧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다. 개체로서 나는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만, 조상이 살았고 후손이 살아갈 정치공동체는 영원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인간을 거대한 협력공동체를 구성해서 사는 '폴리스적 동물(zoon politikon)'로 진화시켰고, 그 덕분에 위대한 문명을 건설했다. 인류 문명사는 어떤 정치공동체가 가장 좋은 제도인가의 시험대로 전개됐다. 크게 보면 왕정과 공화정의 두 유형으로 구분되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이 역사의 일반적 진행 방향이다.

남한과 북한은 둘 다 공화국이지만, 제도의 차이가 운명을 갈랐다. 1989~1990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진화가 자유민주주의로 끝났다는 선언을 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을 반증한다.

중국의 성장 동력은 개혁·개방을 추진한 덩샤오핑(鄧小平)의 결단에서 비롯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黑猫白猫轮)"라는 그의 명언이 중국의 '회복탄력성'을 상징했다. 하지만 정치는 공산당이 독재하고 경제는 국가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중국의 '회복탄력성'은 결국 한계점에 봉착했다. 그 위기를 시진핑(習近平)이 1인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기회로 삼으면서 전통시대 전제정치(autocracy)가 부활하는 징조가 나타난다.

정치사상가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의 초상화이다. 그림=위키피디아

결국, 체제는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운영한다. 그런 맥락에서 근대 정치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정치사상가가 니콜로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다. 그는 권력이 무자비하게 작동하는 현실정치 속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를 고뇌했다. 강력한 지도자인가, 시민들의 역할인가? 『군주론』에선 통치자의 권력의지와 자질을, 『리비우스 논고』에선 시민적 덕성을 강조했다. 전자의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자고, 후자는 공화주의자다. 그런 이중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문제는 그의 이중성이 아니라, 흔히 말하듯이 정치란 살아있는 생물이라서 때에 맞는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혁신(革新)을 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혁신을 추진하는 지도자의 덕성을 '비르투(virtù)'라고 지칭하고, 환경의 도전적 요인을 '포르투나(fortuna)'라고 총칭했다. 로마인들은 세상의 우연적 사건들은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의 장난이라 여겼다. 우연을 필연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별의 순간'을 잡는 지도자의 능력이 '비르투'다. 존스 홉킨스 대학 명예교수인 존 포칵(J. G. A. Pocock)은 그 전환의 순간을 '마키아벨리언 모멘트(Machiavellian Moment)'라고 명명했다.

인간사는 국가든 개인이든 '비르투' 대 '포르투나'의 관계로 전개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별의 순간'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포르투나'를 제압하는 '비르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공정과 상식을 주창하면서 잡았던 '별의 순간'은 더는 없다. 이젠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가시밭길을 만날 거다. 다음 '별의 순간'은 누가 잡을 것인가? 이재명 대표든 아니면 그 누구든 간에 '비르투' 대 '포르투나'의 시험대가 펼쳐질 것이다. 결국, 시대정신의 바람을 타는 자가 '별의 순간'을 잡는 주인공이 된다.

지도자의 역량이냐 시민적 덕성이냐의 마키아벨리 이중성은 '포르투나'의 향방이 어디에 있느냐, 곧 지금이 어느 때인가에 달려 있다. '내로남불'을 타파하는 공정과 상식이 지금 우리의 시대정신은 더는 아니다. 이젠 공정과 상식의 기치를 들었던 사람들 또한 '내로남불'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것은 한국이 돌진적 근대화로 압축 성장을 하면서 생겨난 부작용 가운데 하나다. 경쟁과 비교가 한국인 마음의 습관으로 굳어지면서 '내로남불'의 위선이 내면화됐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과 혐오로부터 생겨난 마음의 병이 '헬조선' 증후군이다.

국가는 선진국이 됐지만 한국인들은 불행하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불행의 늪에 빠진 한국인들이 집단으로 범하는 미래의 한국인을 죽이는 '사회적 자살'이 저출산이다. 따라서 국가의 미래와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선 비교와 경쟁에 찌든 한국인의 마음의 습관부터 개조해야 한다. 국민의 심판인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계층, 젠더, 세대, 지역 간에 갈등이 더 심화할 전망이다. 갈라치기 전술로 선거판의 승패가 갈리는 풍토에선 요동치는 국제정세로 나타나는 '포르투나'의 변덕을 제압할 역량을 가진 지도자가 선출될 수 없다.

적자생존으로 전개되는 진화의 과정에서 '적자'란 경쟁력이 가장 강한 것이 아닌 협력을 가장 잘하는 집단과 종이다. 인간사에서도 가장 힘이 센 사람이 아니라 가장 친구가 많은 사람이 성공한다. 가장 많은 친구를 얻기 위해선 갈라치기가 아닌 포용을 해야 한다.

그런데 김포가 서울로 편입되는 것은 수도와 지방의 갈라치기인가, 포용인가? 선진국이 된 이후 한국의 새로운 미래를 여는 '별의 순간'을 잡는 시대정신은 포용과 혁신이다. 포용이 경계 밖의 것들을 안아내려는 노력이라면, 혁신은 경계 밖으로 자기 영역을 넓히려는 기획이다. 포용이 한 공동체를 결집하는 구심력이라면, 혁신은 공동체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원심력이다. 영어로 혁신인 innovation은 in(안)과 nova(새롭다)가 결합한 단어로 '안에서부터 새로워지는 것'을 뜻한다.

대한민국이 냉전의 '포르투나'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해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마카아벨리언 모멘트'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혁신의 지도자와 민주적 덕성의 시민들의 노력과 헌신 덕분이다. 이제는 제2의 '마카아벨리언 모멘트'를 해야 할 때고, 그 성공 여부는 포용과 혁신의 시대정신 바람을 탄 지도자와 국민에게 달려 있다. 우리가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으로 역사의 시험대를 통과하면, 우리는 진정 21세기를 선도하는 글로벌 문명국가로 도약하는 새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김기봉
경기대 사학과 교수·<철학과현실> 책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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