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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과관계 넘어 건축을 ‘객체’로 독해하라
인과관계 넘어 건축을 ‘객체’로 독해하라
  • 백승한
  • 승인 2023.11.24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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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건축과 객체』 그레이엄 하먼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 368쪽

수십 년 걸친 건축 지형도 성찰하는 시도
객체에 대한 실재적·감각적인 차원을 탐구

이 책은 건축과 철학, 그리고 건축과 예술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그레이엄 하먼의 첫 건축 책이다. 하먼은 종종 ‘트리플 오(OOO)’로 소개되는 객체지향 존재론을 창안한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2007년 골드스미스 칼리지에서 열린 사변적 실재론 워크숍을 기점으로 할 때, 그의 이론이 공론화된 지는 어느덧 15년 정도가 된다. 건축 분야에서 또한 10여 년 정도의 변천사를 지니고 있다.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오랜 친구 데이비드 루이와 2011년 만남은 하먼이 건축과 트리플 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됐다. 그리고 이는 2016년에 미국의 건축학교 사이아크(SCI-Arc) 교수 부임으로 이어졌다.

하먼이 건축계에서 활동을 시작한 2010년 즈음에는 지속가능성과 디지털 건축 담론이 지배적이었던 편이다. 전자의 경우 생태와 기후변화, 그리고 에너지와 인류세 담론과 실천으로 확장되고 있다. 한편 후자는 트리플 오와 긴장 관계와 더불어 그 동력이 점차 쇠락한 상황이며, 이제는 파라메트릭 디자인이나 인공지능 등 업데이트된 흐름이 그 빈자리를 대신한다. 

하지만 담론으로서의 건축 전반의 위상이 이전과 같지 못한 학문적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이와 같은 계보학이 유효하거나 유의미한지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럼에도 트리플 오를 서양 근·현대 건축의 지형도에 위치시킬 수 있다면,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디지털 건축과의 관계 속에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이와 같은 최근 몇 십 년의 건축 지형도를 성찰하게끔 하는 한 가지 시도이다.

지금의 짧은 서평에서 그의 방대한 철학을 요약하는 대신, 책에서 등장하는 하나의 사례를 통해 하먼이 객체로서의 건축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소개하고 싶다. 예를 들어, 건축가 마크 포스터 게이지의 지어지지 않은 리조트 프로젝트 「데저트 리조트」가 있다. 여러 개의 건축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사막에 위치해 있다. 지역의 역사와 기후, 형태·공간 논리와 더불어 무슬림 사원 내부 장식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패턴을 구현하고 있다. 

하먼의 책에 수록된 작품 이미지는 위 군집에 포함된 하나의 건축물 입면을 보여준다. 중앙의 거대한 수직 구조물은 아라베스크 문양 또는 각종 배관을 연상시키는 복잡한 기하학적 패턴으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그 양옆에는 곡선의 반투명한 아치 형태의 아케이드가 위치한다. 물론 하나의 도판만으로 그 형태 원리나 기능 등의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는 단지 정보의 부족 때문만은 아니다. 

작품 소개의 목적을 지니는 모노그래프 타입의 출판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트리플 오의 적극적인 옹호자 게이지의 전략적 디자인과 표상의 결과이다. 그 무언가를 연상시키지만 결코 그것을 충분히 언어로 서술하고 소통할 수 없다. ‘형언할 수 없는’ 건축의 차원을 구현시키는 것이 하먼의 이론을 경유하는 게이지의 건축적 비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형태와 기능에 대한 명쾌한 파악을 어렵게 하는 기이한 외관은 그 너머의·잔여의 또는 그것을 아우르는 대상물의 정체를 구체화시키면서 동시에 철회시키는 감각적 객체이다.

건축을 이해한다는 건 과연 어떤 의미일까. 사진=픽사베이

‘네 겹의 객체’ 다이어그램을 통한 객체의 이론화를 시도하는 하먼의 입장은 공고하다. 건축에 대한 입장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그러한 입장을 어떻게 건축이라는 영역에서 작동시킬지에 대한 방식은 열려 있다. 책 전반에서 하먼은 건축을 객체로 독해하기 위한 이론적 논의에 집중한다. 그러나 건축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비평은 말을 아끼는 편이다. 이는 철학자로서 건축을 논의하려는 그의 학문적 엄밀함에 기인할 것이다. 

하지만 객체의 실재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길을 잃은 것처럼 장황하고 두서없는 발화와 글쓰기 행위를 필요로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또한 지울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감각에서 실재, 또는 실재에서 실재로 접속할 방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즉 하먼의 주장을 건축에서 유의미하게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건축 작품 또는 그에 준하는 사례들을 ‘사변적으로’, 즉 명쾌한 인과관계나 실용적 태도 또는 대상화에 의존하지 않은 채 탐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먼의 책은 쉽게 읽히는 건축 이론서는 아니다. 그럼에도 항구적으로 펼쳐지면서 유예될 건축의 차원을 숙고함에 있어서 흥미로운 가이드로 작용할 것이다.

 

 

 

백승한 
부산대 건축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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