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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폐허의 도시를 이동하다
여성, 폐허의 도시를 이동하다
  • 남승석
  • 승인 2023.10.13 10: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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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동아시아 영화도시를 걷는 여성들』 남승석 지음 | 갈무리 | 288쪽

전지현·장만옥·카라타 에리카 등이 보여주는 도시 산책 
멜로드라마 장르 안에 내포된 국가적 재난과 트라우마

뉴 밀레니엄 이후 동아시아의 정치, 경제, 문화 지형은 압축적인 근대성의 변화를 겪었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 도시의 공간에 그러한 변화의 흔적이 누적되고 있다. 『동아시아 영화도시를 걷는 여성들』에서는 「엽기적인 그녀」의 서울, 「화양연화」의 홍콩, 「밀레니엄 맘보」의 타이페이, 「여름궁전」의 베이징, 「아사코」의 도쿄에서 다섯 명의 여배우, 전지현, 장만옥, 서기, 학뢰, 카라타 에리카의 도시 산책을 통해 트라우마의 흔적을 탐색한다. 

이 다섯 편의 멜로드라마 영화들은 2000년 이후 개봉한 영화 중에서 여성의 도시 산책, 이동, 걷기를 중요한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멜로드라마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건 직후에 제작되거나, 재난 및 트라우마와 연관되어 있다. 정치적, 경제적, 생태적 재난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더라도, 이 영화들의 배경이 되는 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 상황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 저자는 이번 저작을 시작하게 된 계기로, 여성 도시산책자에 대한 영감을 받게 된 1948년 중국 영화 「작은 마을의 봄」을 소개하고자 한다. 2000년 작품 「화양연화」에서 걷는 여성을 통해 홍콩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탐색하던 중, 그 영상미학적 원천으로 「작은 마을의 봄」을 재조명하게 되었다. 「작은 마을의 봄」은 중화권 여성 도시산책자의 원형을 구현하며, 중국 국공내전 직후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인 1949년에 제작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는 현재의 중화권 국가 개념이 형성되기 전의 시기이다.

무페이 감독의 「작은 마을의 봄」은 1946년의 봄, 전쟁 후의 중국 남부 마을을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에서는 병약한 다이 리얀과 그의 아름다운 아내 주유웬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리얀의 오랜 친구로 의사인 장 지첸은 고향에 돌아와 리얀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주유웬에게 서서히 마음이 기울게 된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무르나우의 「선라이즈: 두 사람의 노래」의 서사, 여기서는 도시의 여성이 시골로 와서 시골의 남성을 유혹하는 구조와 유사하지만, 인물의 성별이 바뀌었다. 영화 내에서는 주인공들의 정체성과 감정을 의상과 소품을 통해 뛰어나게 표현했다. 특히, 주유웬이 착용한 치파오는 그녀의 여성성을 강조하고 중국 여성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도출해낸다. 이 작품은 홍콩 반환 이후 홍콩의 상황을 사랑의 비유를 통해 탐색하는 「화양연화」에서, 치파오를 입은 수리첸(장만옥) 캐릭터의 원형, 즉 중국 여성의 도상으로 영향을 준다.

「작은 마을의 봄」, 유웬과 제천上, 「화양연화」, 리첸과 모우下. 사진 상단에는 「작은 마을의 봄」에서 유웬과 제천의 친밀한 대화 장면이며, 사진 하단에는 「화양연화」에서 리첸과 모우의 친밀한 대화 장면이다. 

사진 상단의 「작은 마을의 봄」 장면은 폐허 같은 미장센으로 자연스러운 혹은 목가적인 느낌을 준다. 그러나 도덕적 부재나 여전히 존재하는 도덕적 관습의 흔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사진 하단의 「화양연화」 장면은 도시의 밤거리 골목 속에서 진행되며, 비가 내린 뒤 그치는 모습이 폐허의 벽 앞 배경으로 촬영된다. 「화양연화」의 이 장면은 「작은 마을의 봄」에서의 무너진 벽 앞 대화 장면의 미장센과 배우의 몸짓을 차용하여 새롭게 구성된 배우의 표현을 통해 중첩된 문화적 기억을 반영하고 있다.

「작은 마을의 봄」은 영화의 배경이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기를 배경으로 하며, 이 시기 과거의 사회적 통념이 붕괴되고 새로운 시대 가치가 대두되던 한 작은 마을의 모습을 그린다.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가진 이 작품들은 역사적 사건에 따른 개인의 고통을 배우의 몸짓과 시선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뉴 밀레니엄 이후 중국은 경제 개혁과 개방, 그리고 산업화를 통해 겪은 사회의 급진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동아시아 영화도시를 걷는 여성들』에서는 이런 급진적 변화 과정이 다섯 편의 작품들 내의 배우들의 새로운 몸짓들을 통해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 분석하고 있으며, 그것이 중국 고전영화들 속 문화적 기억으로서 배우의 몸짓을 어떻게 전유적으로 차용하고 있는지 탐색하였다.

본 저자는 국가적 트라우마가 반영된 영화적 도시 공간에서 여성 도시산책자가 그리는 지도, 즉 감정의 지도 그리기에 주목하여 도시 사회학과 예술철학의 접점에서 도시의 역동성을 연구하였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저자는 거대한 재난과 그로 인한 고통에 대한 공감을 통해 아시아의 미를 재발견하는 논의로 확장하였다.

 

 

 

남승석 
연세대 매체와예술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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