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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적 혜안 없이 과학기술 역량만 뒤흔들다
장기적 혜안 없이 과학기술 역량만 뒤흔들다
  • 전준
  • 승인 2023.09.26 09: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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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과학 ⑧ R&D 예산삭감

과학기술 예산은 자판기에 동전을 넣듯 작동하는 것이 아니며,
한 번 가해진 정책적 충격은 여러 학문세대에 걸쳐 
복합적이고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내년도 과학기술 연구개발 예산의 16.6% 축소가 확정됐다고 알려져 있다. 당장 대학과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차년도 연구계획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다행히 기초과학 분야와 비정규직을 위한 예산은 다시 보전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얼마나 예산이 보전될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수 없거니와, 예산 조정 과정에서 가장 먼저 기초과학과 청년과학자 지원 예산이 흔들렸다는 선례는 여전히 남는다. 국가 과학기술정책의 근본적인 철학을 물어야 할 때다.

여러 괴담도 들린다. 재계약이 거의 확실시 되던 박사후 연구원들이 당장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거나, 중견급 연구자들의 연구비가 모자라게 되었으니 신진 연구자들의 몫까지 넘보게 생겼다는 것이다. 신진 연구자들은 이제 한국에서 도전적인 신진연구를 시도해 보기는 틀린 것 아닌가 하는 한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업비가 대폭 삭감된 과학기술원들과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의 입장도 난처하다. 당장 사업비 삭감의 불똥이 조직 내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 튈 것인지에 대한 예측도 어렵다. 교수들은 현재 수행하고 있는 연구가 좌초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대학원생들은 당장의 급여와 장학금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취약하다. 

1945년, 버니바 부시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과학, 끝없는 개척(Science, The Endless Frontier)」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대학의 기초 연구를 지원함으로써 과학의 발전을 촉진하는 임무를 강조했다. 이를 토대로 미국 국립과학재단을 구상했다. 사진=위키백과

 

국가 과학기술정책 철학을 물어야 할 때

과학기술 예산이 성역(聖域)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가 과학기술을 공공의 산물로 취급하고 사회적 자원을 투입해 육성해야 한다는 관점은 한때는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가내수공업적 과학이 거대과학이 돼 개인보다 큰 사회조직의 자원에 기댈 수밖에 없는 전환이 이루어졌고, 20세기 전반에 걸쳐 이와 같은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계약’이 서서히 공고해졌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과학기술 개발이 국가적 사업으로 편입됐고, 단기간 내에 경이로운 양적·질적 성장을 이루어 냈다. GDP 대비 R&D 예산의 비중은 세계 최정상급에 속한다. 정부와 대학을 합한 공공 영역의 예산은 전체 R&D 개발비의 약 20%가량인데, 지난해 기준으로 그 액수는 29조8천억 원을 기록했다. 정부 총 지출의 4.9%에 해당한다.

한국은 과학기술 연구개발을 통해 선진국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미지=픽사베이

 

사회적 투자라 해도 공동체적 자율성 필요

과학기술의 특징은 그것이 명백히 공공의 영역에서 수행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단방향적인 ‘위임과 대리’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방이나 건설과 같은 영역의 경우 공적인 투자의 결과물이 명확한 물질적 성과로 되돌아온다. 반면 과학기술은 그 성과가 명확하게 측정 가능한 것도 아니며, 그 결과물이 전적으로 투자자 (즉, 국가)의 독점적인 이익을 위해서만 활용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그 구체적인 수행 방법이 공적인 영역에 의해 통제되는 것도 아니다. 공적인 지원, 자율성, 그리고 결과물에 대한 제한적 책임은 필연적으로 연계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과학기술 개발은 과학자가 전적으로 사회적 투자에 의지하여 수행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거의 전적으로 공동체적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하고, 그 결과물이 투입 자원 대비 얼마만큼의 독점적인 단기적·장기적 성과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 입증할 책임을 요구하기는 어렵다. 과학기술 연구개발은 공적 영역에서 이처럼 독특한 생태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공적 지원, 자율성, 제한된 책임감의 3중 구조는 물론 사회적·역사적으로 축적된 결과물이다. 대표적인 갈등의 예시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상원에서 이루어졌던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설립을 둘러싼 논쟁이다. 상원의윈 킬고어는 전시에 축적된 과학기술 역량을 전적으로 국가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통제와 책임 중심의 기관을 설립하고자 했고, 전시 과학기술정책을 총괄하던 MIT의 전기공학자 버니바 부시(1890∼1974)는 과학자들의 자율성을 근간으로 하는 조직 운영안을 제시했다. 버니바 부시 그룹의 정치적 승리로 인해 지금 우리 사회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과학자 사회의 자율성’ 개념이 ‘공공의 과학기술정책’이라는 개념과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공존할 수 있게 됐다.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로고이다. 이미지=SNF

 

단순한 예산 축소 넘어 검열도 해

이후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미국의 국가 R&D 기조에 칼을 빼들었던 것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었다. 4년의 재임 기간 동안 연방정부의 과학기술 예산은 매년 감소했는데, 특히 국립보건원(NIH)·환경청(EPA)·에너지부(DOE)·항공우주국(NASA)의 예산 감축이 두드러졌다. 특히, 기후변화 회의론자였던 트럼프의 눈에 거슬린 환경청은 30%에 가까운 예산이 축소되면서 큰 부침을 겪었다. 단순한 예산 축소를 넘어 검열도 이루어졌다. 환경청은 기후변화에 대한 내용을 홈페이지에서 지울 것을 요구받았고, 에너지부의 각종 대규모 사업단의 이름과 연구 목표에서도 탄소감축과 기후변화가 삭제됐다. 수십년간 미국 사회에서 지켜져 오던 암묵적인 규칙이 대대적으로 훼손당했던 것이다.

트럼프 정부의 돌발 행동이 연구개발 현장에 미친 영향은 매우 복합적이었다. 물론 예산의 감소로 인해 상당수의 과학기술 연구가 중단돼야 했지만 이는 1차적 결과였을 뿐이었다. 정부의 입김에 휘청이는 연구현장을 본 젊은 연구자들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거나 예산 분배에 단기적으로 영합하는 길을 선택했다. 숙련된 연구자들은 R&D 예산 감축을 처음 겪어 보는 것은 아니었기에 조금 더 능숙하게 대처했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연구를 최대한 유지하면서도, 정부에 의해 검열되지는 않도록 그럴싸한 연구계획서를 만들어 내느라 골몰했다. 

부유한 사립 대학들은 그 와중에도 생존을 도모했지만, 중소 규모의 주립대학들과 교육 중점 공립대학들은 R&D 예산 감축의 직격탄을 맞았다. 공화당 주지사가 집권했던 주들의 경우 고등교육 예산 삭감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이중고가 닥쳤다. 단지 예산을 줄였을 뿐인데, 그 파장은 미국의 과학기술 역량의 근간을 흔들고 지나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과학기술정책의 특이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기업인의 시각으로 ‘불필요한’ 예산을 삭감하는 방식으로 과학기술계를 다루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과학기술 예산은 자판기에 동전을 넣듯 작동하는 것이 아니며, 한 번 가해진 정책적 충격은 여러 학문세대에 걸쳐 복합적이고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정책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 공공의 투자를 받는 영역이기에, 과학기술에 대한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만을 당연하게 바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연구현장에 대한 장기적 혜안이 결여된 정책 방향에 대해서만큼은 과학기술계와 더불어 국가정책에 관여하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의 대대적인 비평과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전준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
카이스트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과학기술정책학 석사를 했다.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회미래연 구원에서 부연구위원으로 일했다. 현재 과학기술사회학, 환경사회학, 사회 이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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