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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룰’ 바꾸는 기술패권 경쟁, 신산업 육성 전략도 달라야 한다
‘게임의 룰’ 바꾸는 기술패권 경쟁, 신산업 육성 전략도 달라야 한다
  • 전준
  • 승인 2023.04.20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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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과학 ⑥ 미중 기술패권과 한국 과학기술정책

과학이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과연 어떤 안목이 필요할까. 과학은 이해하기 힘들고 때론 소통이 힘들 때도 있다. 이에 화학을 공부하고 과학기술정책학을 전공한 전준 충남대 교수가 ‘과학의 과학’을 연재한다. 이 연재에서는 과학기술을 사회학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며 성찰한다. 여섯 번째는 중국의 제3기 시진핑 체제와 미국의 바이든 정부 사이에 놓인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이다. 다음 문장에 눈길이 간다. “확실한 것은 정부 투자의 확대와 이에 비례한 양적 성과물의 팽창을 목표로 하는 정책만으로는 전략적인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정책은 자원 분배를 위한 종합 사회정책이기도 하지만, 불확실성 속에서도 창조적인 결실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략적인 투자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3년과 2018년에 이어 올해 3번째 연임 임기를 시작했다. 제3기 시진핑 체제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미국과의 경쟁에서 기술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시 주석은 지난 전국인민대표회의에 중국 내 최대 규모의 반도체 위탁생산기업인 화훙반도체의 장쑤신 회장, 샤오펑의 허사요핑 회장, 샤오미의 레이쥔 회장, 고어텍의 장빈 회장 등을 초청하는 등 100명 이상의 과학기술전문가들을 권력의 핵심으로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시 주석은 중국의 차량용 배터리 기술의 현안, 반도체 불황 사태 등에 대해 직접 언급하며 국제시장에서의 중국 기업의 경쟁력 확보 방안을 주문하기도 했다.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새로운 일은 아니다. 이미 2019년부터 중국은 미국의 압도적인 기술력에 대항하기 위한 국가혁신체제 구축을 선언했고, 미국 또한 이에 대응하며 바이든 정부 시기 동안 「인플레이션 감축법」과 「과학기술과 반도체 지원법」 등을 발표했다. 특히 과학기술과 반도체 지원법은 미국 내 반도체 개발과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예산 2천800억 달러를 투입하는 안을 포함하고 있다. 중국과 대만으로 흘러나간 반도체 파운드리를 다시 미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세제 혜택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학자들은 미국과 중국의 일련의 장군멍군을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라고 부르고 있다. 기술 패권이란 무엇일까? 근본적으로 ‘패권’이라는 개념은 정복·복종이 동시에 진행될 경우 성립하는 것으로 본다. 일시적인 군사적 정복으로는 ‘패권’에 다다르지 못한다. 몽골제국을 역사서 패권 국가로 분류하지 않는 이유다. 대신, 로마 제국과 대영 제국은 한때 패권을 실현했던 사례로 꼽힌다. 이들은 장기간에 걸쳐 넓은 영토를 지배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자신들의 정복사업을 현지의 복종과 순응의 차원으로 심화시켰다. 현대의 패권 국가로는 미국을 꼽는다. 영토의 직접적인 정복이 아니더라도 타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는 뜻이다.

 

 

시장 독점에서 ‘수직적 통합’으로

특히 영국·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패권의 확립과 유지 과정에서 과학기술이 필수적인 요소였던 점을 알 수 있다. 영국은 1750년부터 한 세기 동안 진행된 제1차 산업혁명을 통해 패권국으로 떠올랐다. 제임스 와트가 개량한 증기기관이 방직기와 증기선으로 거듭났을 뿐 아니라, 젠트리 계층의 발명가들이 ‘성능 향상’을 취미로 삼으며 소형 기계 제작에 붐이 일었다. 특허 제도는 이들의 권리를 굳건히 보호했고, 베세머의 탄소강 제철 기법을 비롯한 새로운 생산공정이 탄생했다. 전 세계의 대영제국 식민지는 본토에서 생산한 △면직물 △소형 기계 △철 △석탄의 소비처가 됐다. 동물의 신체 에너지가 아닌 화석연료의 무한한 에너지를 언제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게 된 영국의 발전은 눈부셨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영국은 전 세계 무역의 30% 가까이 독점했다. 

미국은 절대적일 것만 같았던 영국의 기술 패권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기술패권국이 됐다. 미국의 기업가들은 영국이 이미 독점한 면직물 공업 분야에서는 승산이 없을 것으로 보고, 대신 화학‧전기‧철강 분야에 진출했다. 이는 단순히 신규 시장을 개척한 수준의 전략이 아니었다. 단일 생산품의 시장 독점을 전략으로 삼던 면직물과는 달리, 화학 제품은 원재료 가공 과정부터 다양한 시제품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상품라인에 걸친 새로운 차원의 시장 확장이 가능했다. 경제사학자들이 수직적 통합이라고 부르는 전략이다. 이에 맞춰 미국 기업들은 조직 구조를 세분화하고 전문화하는 방식으로 효율적인 경영전략을 발휘했다. 게임의 룰이 바뀐 것이다. 

 

후발 주자의 추격 더 어려워

이제 개인 사업가가 발명가의 아이디어로 만든 기계로 단일 상품을 널리 팔아치우며 독점하는 방식으로는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은 대학과 자체 연구기관에서 고등교육과 결합된 연구개발을 수행했고, 기초과학과 연계한 응용과학을 바탕으로 수직적 통합을 구축했다. 20세기의 기술 패권은 이처럼 게임의 룰을 바꾸는 새로운 차원의 기술혁신과 조직혁신으로 시작했다.

한 세기에 걸쳐 독일‧소련‧일본‧대만‧한국 등이 미국 중심의 기술 패권 체제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냈다. 이중 독일·소련은 실제로 패권국의 지위에 다다른 후 쇠락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일본·대만·한국은 기술력을 기반으로 나름대로 ‘니치(틈새)’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현재 중국과 미국이 각자 독점적인 기술력을 확보해 나가기 위해 팽팽하게 겨루고 있는 상황은, 중국이 단순히 몇몇 전략적인 기술로 무역 생태계 안에서 니치를 확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지금의 미국과 견줄 수 있거나 이를 대체할 수 있을 만큼의 새로운 ‘기술패권국’의 지위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지금까지도 그러했지만, 앞으로도 중국·미국은 배타적인 형태로 독점적인 기술을 개발해 확보하려고 할 것이다. 후발주자 국가들이 선진국 추격형 R&D 모델을 구사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한국의 전략은 어떠해야 할까?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는 미중 기술패권경쟁의 구도 안에서, 경쟁력 있는 미래 유망기술 분야를 발굴하고, 이를 통해 신산업분야를 개척하겠다는 비전을 내놓은 바 있다. 원론적으로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실천적으로 보면 미래의 유망기술을 발굴하는 것이 쉬울 리 없으며, 이를 신산업 분야로 연결시켜 육성하는 것은 국가의 바램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당연한 정답을 국가의 전략으로 삼고 멈출 수는 없다. 한층 더 특색 있는 전략과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하다. 

국회입법조사처, 과학기술정책평가연구원, 과학기술정책연구원을 비롯한 다양한 기관들이 미중 기술 패권의 맥락에서 우리 과학기술정책의 기조를 보완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확실한 것은 정부 투자의 확대와 이에 비례한 양적 성과물의 팽창을 목표로 하는 정책만으로는 전략적인 대응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과학기술정책은 자원 분배를 위한 종합 사회정책이기도 하지만, 불확실성 속에서도 창조적인 결실을 이끌어내기 위한 전략적인 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준 
충남대 사회학과 교수
카이스트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과학기술정책학 석사를 했다. 미국 위스콘신-매디슨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회미래연구원에서 부연구위원으로 일했다. 현재 과학기술사회학, 환경사회학, 사회이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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