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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패러독스를 넘어서 닉슨 패러독스로
R&D 패러독스를 넘어서 닉슨 패러독스로
  • 김소영
  • 승인 2023.09.11 0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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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_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일반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e-나라지표에서 우리나라 연구개발비 통계를 찾아보면 데이터가 처음 나오는 시점이 1976년이다. 당시 정부와 민간을 합친 국가 총 연구개발비는 609억 원으로 GDP 대비 0.4%였다. 이 통계에는 안 나타나지만 경제개발을 막 시작한 1963년엔 고작 12억 원(GDP 대비 0.25%)이었다. 

이후 R&D 투자는 꾸준히 늘어나서 아름다운 우상향을 그려왔다. 1996년에 처음 10조 원을 돌파하고, 2012년에는 50조 원 대에 진입했다. 2014년에는 약 63.7조 원을 기록했다. 이때가 이스라엘을 0.1% 포인트 차이로 제치고 GDP 대비 세계 1위(4.29%)로 등극한 때였다. 이후 2015~2016년은 잠깐 2위로 내려앉았다가 2017년 다시 1위를 회복했다. 이번에는 GDP 대비 4.55%로 이스라엘(4.25%)을 압도적 차이로 제쳤다.

그런데 1위가 마냥 좋은 게 아니었다. 이처럼 투자가 늘면서 ‘R&D 패러독스’라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기술 선진국인 이스라엘이나 기초과학 역시 튼튼한 미국보다 GDP 대비 더 많은 비중의 예산을 R&D에 투자하고 있는데 그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가? 막대한 과학기술 투자가 가성비가 있나? 

R&D 패러독스라는 표현 자체가 지극히 자조적이고 자극적이다. 더욱이 절대 금액이나 민간을 제외한 정부 R&D 예산만 보면 우리가 정말 세계 1위를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R&D 페러독스가 정말 패러독스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갈린다. 그런데도 지난 수년 동안 중앙정부나 과학기술계의 R&D 혁신 관련 논의는 예산·인력·제도·인프라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어떻게 이 패러독스를 해소할 것인지에 집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근 갑작스러운 R&D 예산 삭감으로 과학기술계가 적잖이 충격을 받고 있다. 이번 삭감 결정은 소부장 사태·코로나 위기 등으로 갑자기 늘어난 R&D 예산을 정상적으로 돌려놓고, 그동안 나눠먹기·뿌려주기식 예산의 비효율적 관행을 바로잡자는 취지라고 한다. 

정부 R&D 예산은 2008년 처음 10조 원을 넘어선 후 2019년 20조 원에 오르기까지 12년이 걸렸는데, 5년 만에 다시 10조 원이 늘었다. 확실히 가파른 증가였다. 또한 연구 현장에 여러 형태의 무수한 비효율이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과학기술계도 R&D 예산을 마냥 늘리는 게 능사는 아니고, 제도 개선 등 예산 외의 수단으로 R&D 성과를 늘릴 필요에 대해서는 누구나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런데도 이번 삭감에 놀라는 이유는 무엇보다 과학기술 기반 국정과 기술 패권 시대 과학기술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해온 정부가 오히려 R&D 예산을 대폭 깍기로 한 것, 즉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왼쪽으로 돈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국제관계에서 ‘중국에 간 닉슨’이라는 표현이 있다. 냉전에 균열을 낸 1972년 닉슨 대통령의 방중(訪中)은 닉슨이라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만이 할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를 일컫는 말이다. 즉, 지지자들한테 확고한 평판을 가진 지도자만이 언뜻 그 평판과 어긋나지만 다른 경쟁자가 하면 반발을 가져올 정책에 성공할 수 있다는 뜻으로 ‘닉슨 패러독스’라고도 부른다. 

대체로 보수 정권이 과학기술, 진보 정권이 복지에 방점을 찍는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대 정권별 R&D 예산 증가율을 보면 정반대다. R&D 예산 증가율 평균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각각 17.1%, 10.8%, 11%였고,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9.6%, 4.5%로 떨어졌다. 진보 정권일 때 높고, 보수 정권일 때는 오히려 낮았던 것이다. 

이 자체로 아이러니다. 이번 R&D 예산 삭감이 정부가 강조하는 비정상 예산의 정상화이든 카르텔이든 상관없이 실제로 R&D 분야의 비효율을 제거해 전략적 R&D에 집중한다는 화려한 목적을 달성해준다면 과학기술계의 닉슨 패러독스라고 부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건 연구 현장만큼 정부 역시 잘 알고 있다. 지난 십수년 반복된 R&D 혁신 실패의 경험으로 처절히 알게 된 진실이다. 그나저나 이제 R&D 예산의 우상향이 끝났다니, 과연 우리가 당장 닉슨 패러독스는 제쳐두더라도 R&D 패러독스의 부담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지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다. 

김소영 편집기획위원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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