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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조선사 속 진화한 ‘닥종이’…재활용도 고려
500년 조선사 속 진화한 ‘닥종이’…재활용도 고려
  • 이정
  • 승인 2023.07.14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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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 이정 지음 | 푸른역사 | 404쪽

징세 피해 사찰 들어간 유민의 핵심 사업
종이 발명한 중국에 역수출한 장인 정신

이 책은 닥종이의 역사를 통해 과학기술을 좀 색다르게 이야기해 보려 했다. 과학기술의 역사라면 떠올려지는 뉴턴, 다윈이 주인공인 이야기로는 광범위한 과학기술,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 과학기술과 자연의 관계를 충분히 맛보기 힘들고, 유럽의 천재 과학자 몇몇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는 과학기술에 대한 오해를 쌓아왔다는 것이 학계의 오랜 지적이었다. 우리의 24시간을 빈틈없이 채워온 평범하지만 중요한 과학기술은 한두 천재의 발견으로 일시에 이뤄지지 않았다. 그랬다면 과학이 아니라 마법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닥나무이다. 식량, 목재, 금은과 동, 철, 석탄과 석유, 희토류, 바이러스가 역사의 국면을 바꿨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이산화탄소가 역사의 전면에 나선 지도 오래다. 우리가 누리는 과학기술적 성과는 매일매일의 과학기술적 실천, 이 책이 기지(機 베틀 기, 智 지혜 지)라 부른 사물과 인간이 함께한 실천으로 일구어졌다. “닥종이 만드는 게 뭐 과학기술이야”라며 책을 집어 든 독자가 “과학기술을 왜 그리 좁게 본 거지?”라고 물으며 닥나무를 통해 현대의 과학기술까지 다시 보면 좋겠다.

이 연구를 시작한 것은 닥종이가 인삼, 말린 해삼, 소가죽 등과 함께 개항 전후 조선의 수출품 목록에 유일한 ‘공산품’으로 포함된 것이 신기해서였다. 종이는 중국 4대 발명품 중 하나이니 조선의 모조품을 종이를 발명한 나라에 역수출한 것이다. 중국에서 쓰던 마나 대나무 대신 닥나무를 택한 한반도의 장인들이 닥나무의 이야기를 들은 덕분이었다. 

이들은 닥 섬유를 찧되 완전히 분쇄하지 않는 준비 공정, 길쭉한 섬유 올을 얽어 뜨는 외발 뜨기, 힘들여 뜬 종이에 튀어나온 섬유 올을 처리하기 위한 도침이라는 마감 공정까지 중국과 전혀 다른 공정을 택하며 닥의 특성을 살렸다. 공들여 만든 닥종이는 천연 폴리머 구조인 닥풀과 함께 흰빛, 광택, 견고함을 자랑했고, 묵의 스밈을 조절하기 위한 부패성 첨가물이 필요 없어져서 내구성도 확보했다. ‘고려지’로 통칭되는 한반도 종이의 명성이 생겼다. 

닥종이의 성공은 한순간의 과학기술적 탁월함에 그치지 않았다. 일시적·개인적 성취로 끝난 고려청자나 자격루와 달리 닥종이는 500년 조선 역사 속에 다양한 진화를 이뤘다. 닥나무가 열어준 사회적·생태적 틈새 덕분이다. 호적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 정도였던 조선에서 양반으로 태어나지 못한 다수는 겹겹의 징세를 피하려 유민(流民)의 삶을 택했고, 전국에 흩어져있는 사찰은 이들의 피난처였다. 사찰 주변 산지에 닥나무가 잘 자라고, 불경 인쇄로 제지기술이 축적돼 있는 점은 닥 재배와 제지를 이 ‘승려’들의 핵심 사업으로 만들었다. 사찰을 거점으로 조직된 이들은 닥 생산량을 급속히 늘려가며 ‘쇠퇴의 19세기’에 다양한 고부가가치 종이를 생산하며 수출했고, ‘민란의 19세기’에 일상의 기지로 과학기술, 사회관계, 환경을 동시에 변화시켰다. 닥나무와 함께 한 숨어있던 60%의 역사였다. 

닥나무의 힘은 ‘휴지(休紙)’가 일으킨 변화에서도 드러났다. 휴지는 ‘쉬는 종이’라는 뜻으로 환지(還紙), ‘돌아온 종이’와 함께 쉬고 난 다음의 재활용을 염두에 둔 말이고, 한자어지만 중국과 일본에는 없는 말이다. 닥의 특성을 존중한 공정 덕분에 재활용이 쉬웠고, 닥을 아끼는 장인들은 한 번 쓴 종이도 유심히 살폈다. 이들이 휴지로 수입 유리 제품의 가격을 넘어서는 재활용품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호조와 비변사는 휴지 쟁탈전에 나섰고, 결국 휴지를 하나하나 세어 관리하는 투명한 휴지 행정을 만들었다. 

사물을 제대로 알고 존중하는 과학기술에는 이렇게 다양한 힘이 있었다. 켜켜이 살아 숨 쉬는 닥종이의 역동적인 역사가 과학기술에 대한 독자의 생각을 바꿀지는 모르겠다. 다음 연구는 이 책에도 나왔던 조선 후기 지식인들과 그들의 새로운 대화 상대를 따라가 보려 한다. 서양 수학까지 공부하며 세상 만물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이다. 이 명민하고 깨어있는 학자들이 늘 이런 사물과의 대화에 성공했던 것은 아닌데, 농사에 필수였던 저수지라는 사물을 통해 뗄 수 없는 과학과 기술, 머리와 몸의 실행, 과학과 사회, 환경을 이어보고 싶다.

 

 

 

이정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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