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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기웃거리는 당신...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
세상을 기웃거리는 당신...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
  • 김재호
  • 승인 2023.02.19 17: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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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개정2판 출간된 ‘욕조가 놓인 방’(작가정신)
구원파적 엄격함의 돈오파 VS 불가지론의 점오파

당신의 세상은 좁은가, 넓은가? 만약 넓다면 당신은 현재 사랑하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사랑은 세상을 축소시키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축소돼 있지 않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다면 당신의 세상은 넓은 만큼 사랑에 빠져 있지 않다. “만물이 그런 것처럼 사랑 역시 태어나고 성장하고 소멸한다.”   

이승우 작가는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이기도 하다. 『욕조가 놓인 방』(작가정신)은 2006년 초판이 나왔다. 2021년 개정판, 지난해에 개정2판에 세상에 나왔다. 이 소설은 마치 ‘사랑’이라는 전지적 시점의 존재가 당신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당신의 이야기는 연애소설이 될까, 아닐까 저울질을 한다. 그리고 당신의 심연에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음모론을 펼친다. 

 

 
『욕조가 놓인 방』의 줄거리는 간단해 보이는데, 그 이면은 디테일하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서툰 당신은 결혼·사회 생활에서 권태를 느낀다. 아내 역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만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다가 마야 문명의 유적지인 멕시코의 욱스말에 일 때문에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는 달빛과 물, 죽음에 관심이 많다. 신비한 곳에서 만난 한국 여인과 당신은 강렬한 키스를 나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서는 당신의 성격 탓에 적극적으로 연락을 하지 못했다. 아내와의 사이도 소원하다. 

그런데 지방의 한 소도시로 발령을 받아 가야 하는 상황이 다가왔다. 당신은 또 망설이지만, 그 도시에 욱스말에서 만난 여인이 산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 한 달 동안 동거를 하지만, ‘욕조가 놓인 방’에서 사는 그 여인으로부터 불편함을 느낀다. 그녀는 비행기 사고로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에 죄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물에 집착하며, 죽음의 그늘에 사로잡혀 있다. 어느 날 당신의 면도기와 액자를 가져가라는 문자를 받고, 그녀에게 계속 전화를 하지만 연락이 닿지 않는다. 가까스로 그녀의 집에 도착했지만, 그녀는 없고 욕조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사랑은 서로를 향한 요구와 복종

사랑은 요구와 복종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서로에게만 소속되길 원하는 게 사랑이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에게 이런 요구를 하고 있지 않거나, 복종 당하고 있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요구와 복종이라는 형식이 중요하지 그 안의 내용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 “계명이 옳고 지킬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계명을 내린 이가 연인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당신에게 말을 거는 ‘사랑’(만약 그렇다면)이라는 화자는 자신이 무엇인지 알아맞혀 보라고 한다. 이 작가는 두 가지 측면의 설명을 제시한다. 과연 당신은 어느 부류에 속할까?

첫째, 구원파적 엄격성을 가진 ‘돈오(頓悟: 별안간 깨닫는 것)’파이다. 이들은 사랑의 시작이 정확히 언제인지 아는 걸 중요시한다. 왜냐하면 사랑의 시작을 아는 것이 사랑의 순결을 담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구원파적 엄격함을 사랑에 빗댄 사람들이 사랑이 시작된 시점을 사랑의 완성과 연결시키고 그 이후의 시간은 다만 그 사랑을 즐기고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간주”한다. 돈오파들에게 사랑의 순수함 혹은 완전무결함을 증명하는 ‘매듭’이 중요하다. 

둘째, 사랑의 시작이 언제인지 아는 건 불가능하다고 믿는 불가지론자들이다. 이들은 사랑의 속성에 대해 ‘점오(漸悟: 점점 깨닫는 것)’파이다. 사랑의 시작과 완성은 동일하지 않다. 특히 사랑의 매듭은 없다. 그래서 사랑은 마치 물과 같다. 이 작가는 불가지론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랑도 물과 같아서 언제 스며들었는지 모르게 스며든다. 그들에게 사랑은 알 수 없는 것, 안다고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사랑의 시작과 완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있지만 구원파적으로 있지 않고, 없지만 무신론자처럼 없지 않다.”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는 『지상의 노래』, 『생의 이면』, 『식물들의 사생활』 등으로 인간에 대한 철학적·종교적 구원과 사랑을 다뤘다. 사진=조선대 문예창작학과

 

자신을 상실해야 사랑이 증명된다

사랑은 그 자체가 이미 역설이다. 왜, 언제, 어떻게 사랑이 시작되고 흘러가는지 정확히 아는 길은 없다.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사랑은 물이 되는 꿈」이라는 작품 해설을 통해 “연인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미학적인 실패의 결사체”라고 밝혔다. 이승우 작가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불가능으로서의 사랑”이라는 뜻이다. 박 문학평론가는 “사랑은 허구적인 진실”이라며 “사랑은 스치는 것이 아니라 섞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치 물처럼 말이다. 

박 문학평론가는 『욕조가 놓인 방』의 두 주인공을 다음과 같이 대비시켰다. “물 위를 걷고 싶은 남자와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여자는 수면에서만 만날 수 있다. 의식의 바닥과 무의식의 천장이 만나는 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지만 의식은 솟아오르려 하고 무의식은 가라앉으려 하므로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여자는 죽음 가까이에 있고, 남자는 생의 한가운데 있다. 이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이란 ‘사랑의 그림자’뿐이라는 결론이다. 

사랑하는 건 일생일대의 모험이다. 그래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각오를 해야 사랑이 출현한다. 박 문학평론가는 “사랑의 서식지가 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을 비워야 한다”라며 “사랑의 증명은 자신의 상실을 통해 입증된다”라고 적었다. 또한 다음과 같이, 사랑이 지닌 물의 속성을 강조했다. “물은 뒤섞이며 혼돈이 된다. 그들이 사랑에 실패한 이유는 혼돈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랑은 물이 되는 꿈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는 「문명화된 아담과 신비화된 이브, 그 비극적 마주침」이라는 작품 해설에서 어떻게 사랑을 하고 소통하는지 일깨웠다. 남자 주인공인 당신은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그녀와의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이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것이다. 그녀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꼼꼼히 확인한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당신은 그녀가 몸을 담았던 욕조에 자신을 누인다. 의식의 당신은 무의식으로 빠져버린 그녀를 찾아 나선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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