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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 展 外
‘FACE' 展 外
  • 김남수 무용평론가 外
  • 승인 2006.06.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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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들이 추천한 6월의 공연·전시

●무용_홍승엽의 ‘아큐’ (LG아트센터, 6.9~10)

루쉰의 문학을 춤춘다! 안무가 홍승엽은 루쉰의 ‘아큐정전’에서 ‘인간의 어리석음’에 초점을 맞춘다. 칼에 맞아죽은 시체가 물풀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습은 마치 아큐 같다. 다만 그 표현이 현대적이라 마치 인형사에게 해킹되어 조종당하는 듯한 이미지, 역시 각성 없이 칼날 아래 헤매는 인간들의 은유다. 그런가 하면, 꽃은 사랑의 기호가 아니라 상대의 등을 찌르는 치명적인 무기다. 허리를 뒤채는 상처는 깊고, 그 상처는 누군가에게 전이된다. 홍승엽은 칼과 꽃을 등치 관계에 놓아둔다. 어리석음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는 사회는 맹목적인 공격성이 유령처럼 떠돈다. 군무는 그 사회의 안쪽을 열어젖힌다. 까마귀 부리처럼 고깔 속에서 혼자만의 환상 현실에 잠긴 사람들이 목적지도 모른 채, 몰려다닌다. 붐 문화의 획일주의를 고발하며 사회의 멘탈리티를 비판한다.
홍승엽이 꽃, 고깔, 칼의 뾰족한 이미지로 루쉰의 문학을 해석한 것은 그가 2004년 올해의 예술상 수상거부 이후의 변화와 관계가 있을까. “춤은 비디오로 심사할 수 없다”는 명쾌한 선언을 통해 실재로서의 몸이 갖는 공연의 진실을 다시 한번 환기했다. 그로 인한 불이익과 사회적 의식을 맞바꾼 것이 아닐까. 고립된 내면의 추구보다 사회로 확장되는 진실 찾기로 나아가는 것이 그에게는 자연스럽다.
홍승엽은 2000년 프랑스 리용 댄스페스티벌에서 ‘데자뷔’, ‘달 보는 개’를 전석 매진시켰고, 일약 ‘한국의 포사이드’라는 찬사와 더불어 고유한 미학을 인정받은 안무가다. 무용과 출신이 아니면서도 누구보다 인문학적 관심을 세련된 춤의 문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김남수 / 무용평론가

●대전시향과 함신익의 ‘전쟁 그리고 그 이후’(예술의 전당, 6.25)
-벤저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 공연
2006년 6월 25일(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오후 7시)

‘전쟁 레퀴엠(War Requiem)’은 2차 대전 때 파괴된 영국의 코번트리 대성당 재건축과 축성을 기념하여 1962년에 영국 현대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이 만든 작품이다. 이 곡은 영국 군대를 칭송하거나 영국군 전사자들만을 기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한다는 신념을 표현하고 전쟁의 잔혹함과 부당함을 고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6월 25일에 이 작품의 한국 초연이 이루어지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전쟁 레퀴엠’ 외에도 애런 제이 커니스의 2005년 신작 ‘새롭게 그려진 하늘(Newly Drawn Sky)’이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공연된다.
런던 초연 당시 브리튼은 독일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러시아 소프라노 갈리나 비쉬네프스카야, 영국 테너 피터 피어스를 염두에 두고 온 세상의 화해와 화합을 염원하며 이 곡을 썼다. 이번 공연에는 바리톤 정록기, 소프라노 김영미, 테너 브라이언 더우넌이 독창자로 출연해 깊이 있고 정교한 가창을 들려줄 것으로 보이며, 특히 완벽한 곡 해석력을 갖춘 바리톤 정록기에게 주목할 만하다. 혁신적인 프로그램으로 클래식 음악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기여해온 지휘자 함신익과 대전시립교향악단이 이 도전적인 연주회에서 수준 높은 연주로 다시금 청중을 놀라게 할 것을 기대한다.

이용숙 / 음악칼럼니스트

‘FACE' 展(송은갤러리, 6.2~22)

"Take lives", 다른 이의 인생을 빼앗아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나’ 안의 ‘다른 나’를 살아가는 일은? 작가 이선경은 ‘나’ 에서 수많은 ‘다른 나’ 의 얼굴을 본다. 거울에 비친 ‘나’ 와 나를 바라보는 페르소나. 어쩌면 그 모든 페르소나의 가면은 ‘나’를 이루는 본질이며, 그래서 동일체로서 다중적일 수 있는 자아의 실상이 아닐는지.
작가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저 아래 깊숙한 곳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사람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자아의 실상이란 ‘나’ 이면서 내가 아닌-나의 다른 모습이 아니라-완전히 다른 사람의 실존으로 이끌린다. 즉, 내 몸과 몸의 영이 분리된 상태에서 서로를 조용히 응시하는, 내면의 다른 존재들과 조우하는 상황을 말함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다중-다층’이 구체화된 얼굴로 표현되고 있으며, 비슷하지만 다른 그 얼굴들은 결국 ‘거울보기’를 통해 내 안에 숨어있는 혹은 가라앉아 있는 삶의 緣起, 즉 인연의 萬有를 드러내고 있다. 내가 살아 온, 내 삶의 인연들이 만들어 낸 ‘얼굴’의 만다라라는 듯이.
 
김종길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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