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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평: 우상의 포착자, 전미숙
사진비평: 우상의 포착자, 전미숙
  • 정진국 영남대
  • 승인 2006.06.0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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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 소박한 시선 속에 마련된 생각의 자리

이 사진가는 여러 해 동안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기념상과 초상화를 촬영했다. 그 ‘우상’들은 대학 교정에 서있는 것에서부터 3류 초상화가의 화실에서 한창 작업 중인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그 우상들은 열렬한 숭배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분위기 속에서 포착되지 않았다. 그 생김새와 됨됨이와 입지가 어떻든, 그것들은 우상 또한 하나의 물건이라는 인상을 자아낸다.

이 우상들은 사진기의 눈을 통해서 더 극화되기는커녕, 신비의 거품이 빠진 듯이 심지어 시큰둥해 보일 지경이다. 여기에서 사진은 "과거를 기념"하거나, "순간을 영원히 얼어붙게" 한다는 고유의 수사학을 포기한다. 사진은 그 대신, "정말로 거기 있는 것"을 우리 눈 앞에 바짝끌어다 놓으면서 "현재"와 결부된다. 사라져 버릴 것에 대한 초조함이나, 없어진 것을 되새겨 보려는 감정과도 무관하다. 사진은 여기에서 과거를 눈 앞에 보여주려는 간절한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먼 시간을 건너오는 사진이 아니다. 가까이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현실을 바라보게 하는 사진이다. 


그런데 당장 눈 앞의 이미지에 실물과도 같은 실감을 불어넣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 신문이나 광고 사진이 즐기는 것아니던가? 특히 그렇게 용도가 뚜렷한 사진일수록 그 궁극적 목적은 아무튼 눈길을 끌기 위한 선정성이다. 사진이 애당초 타고난 절대적인 본질 같은것은 없을지 모른다. 사진을 사용하고, 그것을 수단으로 서로 의사소통 하는 사람들과 그 사회적 관례만이 있을 것이다. 거대산업이 된 대중매체 시대에 사진을 너무나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데에 익숙해 지다보니, 이제는 예술사진이니, 보도사진이니, 포르노사진이니, 어떤 분야와 용도를 가릴 것도 없이사진이면 모두 선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결국 사진의 선정성이 곧 사진 이미지의 본질 비슷한 것처럼 된지경이다. 이 선정성은 비단 성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참신함을 내세워, 훔쳐보려는 욕망을 자극하고, 무조건 눈길을 끌어 보려고 강권하는 것이면 어느 것이나 선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은 점점 더 그 수사학적 설득력 대신 폭력적인 표현에 의존한다. 또 그럴수록 점점 더 사진은 현실의 이미지에서 멀어 지고 사진 그 자체의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가 된다. 


이제 막 끝난 지방자치선거에서 벽보 속을 줄줄이 채우고 있는 후보자들의 눈웃음과, 호감을 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입가의 미소 또한 선정적이기 마련이다. 선정성이란 늘 목표가 뚜렷하다는 점에서 명쾌하고 따라서 그만큼 대중적 호소력도 없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모습은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의 생활방식만큼이나 복잡하고, 불투명하며, 모순투성이이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데에는 어지간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한, 또 한 장의 사진에서 산뜻하고도 덧없는 자극을 기대하는 대신 어떤 생각의 실마리를 끌어낼 자세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우리가 지금 보고있는 사진 같은 것이 이렇다 할 이야기를 전해 줄지 의문이다.


‘우상의 자리’를 들여다보면 여러 가지 생각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된다.


훼손된 단군상을 붙잡고 노는 철부지들의 모습에서 그 만행의 주인공들이 바로 우리 이웃이자 기독교도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또 민족의 우상이 더 이상 성스러운 대접을 받지 못하고 교육현장에서조차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 두상이 떨어져 나가 흉측하기 짝없는 좌상은 민족의 시조로서 위엄을 완전히 잃은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


신앙을 빙자한 "방달리즘"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는 아니다. 아프가니스탄도, 아메리카도 아닌 이곳에서도 광신도의 문명파괴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민족의 시조조차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문명인지 구별하지못하는 종교적 맹신도의 주먹질을피하지는 못한다. 맹신도들은 같은 민족을 이교도로 간주하고, 그 성상의 상징적 죽음에서 자신의 신앙적 황홀경을 만끽했을 것이다. 즉 "신화에 대한 모독은 사실과 역사에 대한 모독보다 더욱 섬찟하고 엽기적이다." 이렇게 방자를 당한 우리 조상신의 동체는 서구적 현대화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박세리상’을 보자. 그녀는 기념탑에 새긴 명문대로 민족투혼의 우상이다. 골프채를 휘두르는 이 스포츠 "신데렐라"는 그 많은 텔레비전과 신문과 잡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였다. 이토록 빠르게 살아생전에 우상화된 인물이 있었을까? 그녀는 차라리 우리들 모두의 "조급증의 알레고리"는 아닐까?


또 ‘김대중초상’을 보자. 한 때 귀환하는 주한미군들에게 한국의 토속적 풍경을 배경으로 이른바 기막히게 재미있고도 서글픈 "이발소그림"을 주문 받아 그리던 삼각지 거리의 초상화가들의 화실 한 구석을 볼 수 있다. 성모마리아와, 은퇴한 대통령과, "핀-업 걸"과 이름없는 사람들의 초상이 거의 동등한 대접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 위계와 다른 이런 초상의 질서는 역설적으로, 우상이란 현실성을 희석시키고 망각하게 하는 공허한 실루엣일 뿐이라는 점을 알려 준다.


사진가의 수법을 보자. 화면은 가능한 보통 우리의 육안에 비친 현실적 시야에 가깝다. 억지로 탐미적인 구도를 쥐어짜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진기의 시선은 평범한 산책자의 발걸음과 눈높이에 맞추어 진다. 예쁘고 깨끗한 이미지에 대한 집착이나, 반대로 더럽고 위악스런 것에 대한 집착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수수한 시선에서, 사진이 현실의 단면을 도려내고 재단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은 없다. 이 겸손한 기다림 속에서, 현실은 화면 속에서나마 어느 정도 그 현실성을 유지하는 듯하다. 그렇게 관객은 사진가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그 화면 속의 현실을 뜯어 보고, 생각해 볼 여유를가질 수 있게 된다.


 바로 여기에 사진의 자리가 있지 않을까? 그 우상들은 사진적으로, 또는 예술적으로 복제하는 데에 대한 관심 때문에 포착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진들로는 우상의 작품집이나 그 조각가와 초상화가의 작품집을 만들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 사진들을 통해서 그 우상을 감상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진이 보여 주는, 우상이 일정한 배역을 맡고 있는현실을 바라보도록 만드는 그특유의 사실 환기력이 돋보인다. 사진가의 시선은 사진만의 매력이랄 수 있는 일종의 절대적 자연주의에 취한 듯하다. 사진은 그 이미지로서 재현된 입상과 초상을 가리키려고 자기자신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당당하게 내세운다. 그것은 오직 입상들 앞의 전경에서 어슬렁거리고, 기웃거리며, 기념촬영을 하거나, 장기를 두거나, 무심히 담배연기를 내뿜는저 생생한 인물들의 아직 정형화되거나 "사진 발이 잘 받도록" 포즈를 취하지도 않은, 덧없는 이미지 때문에 가능한 효과이다. 우상들은 이렇게 사진가 앞에서 자신들의 좌대에서 일어나 현실 속으로 걸어 내려온다.

정진국 / 영남대학교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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